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4

운당 2011. 8. 3. 09:31

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4

 

빛의 의미를 찾아서(1)

 

2011728, 아침 일찍 일어나 작은 가방을 꾸린다. 어머니께서 준비해주신 김밥, 생수 작은 병 2, 옥수수 삶은 것 3개 등이다.

시내버스를 타러가면서 하늘을 보니 구름이 오락가락이다. ‘아차, 비옷과 수건을 빠뜨렸네.’ 하지만 어차피 비 오듯 흘리는 땀으로 젖을 텐데, .’ 그런 생각으로 마침내 원효사 들머리에서 무등산 높이(1187m)와 같은 1187번 버스를 내린다.

무등산 옛길. 푯말을 따라 큰 길을 벗어난다. 말로만 듣던 옛길로 들어선다.

하늘도, 산등성이도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길이다. 그저 나무와 그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 새소리뿐이다. 길이 어두워지면 지나가는 구름이 숲을 덮었나 보구나, 나뭇잎이 황금빛으로 반짝이면 다시 햇살이 비추나 보구나, 그리 생각할 뿐이다. 깊은 숲 아니면 볼 수 없는 신비한 풍광이다.

1000m급의 산 아래에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고을은 세계적으로도 흔치않다고 한다. 산 아래 어디서고 10여분이면 이내 깊은 산속이니, 아무리 작고 허름한 집이라도, 다들 무등산을 멋진 정원으로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빛고을 광주 사람들의 행복이요, 자랑이다.


<자랑스런 무등산 안내도>

<옛길 2구간이 복원되어 우리 품으로 왔다>

<옛길 들머리>

 이 빛고을 사람들의 행복이요, 자랑인 무등산이란 이름은 삼국사기무진악(武珍岳)’의 표기가 처음이다. ‘삼국사기 잡지 지리편(雜志 第五 地理三)’에 무진주(武珍州), 무주(武州)라는 지명과, 역시 잡지 제1 제사편의 소사조(小祀條)’에 무진악, 무진주라는 기록이 있다.

이후 고려사 악지(樂志)’삼국 속악 백제조(三國 俗樂 白濟條)’무등산은 광주의 진산이다. 광주는 전라도에 있는 큰 고을이다. 이산에 성을 쌓았더니 백성들은 그 덕으로 편안하게 살며 즐거이 노래를 불렀다(無等山 光州之鎭山. 州在全羅道巨邑. 城此山 民束負以安樂而歌之)’의 기록이 있다. 이때에 이르러 무등산이라 불리웠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등 많은 자료들이 무진악, 무악, 서석산 등 무등산의 이름과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또 입말로는 무돌뫼,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등으로 불렀다 한다.

 

빛고을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의 옛 지명을 떠올리며 숲길을 걷는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호남가의 화평한 세상, 대동세상, 큰 세상을 이룰 빛(光州)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을 뜻하는 걸까? 오늘 산행의 숙제다.

새 소리, 바람 소리만 있는 고즈넉한 숲길에 허리 구부정한 노인 한 분이 앞 서 걷고 있다. 느릿느릿 마치 바람결에 시나브르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가볍게 걷는다.

안녕하세요. 저 먼저 갈께요.”

할아버지를 앞질러 휘적휘적 숲길을 오른다. 그러다 주검동(鑄劍洞) 제철유적지(製鐵遺蹟地)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광주읍지 고적조(古蹟條)주검동은 무등산 서석 밑 계곡에 있는데 김덕령장군이 거사할 때 여기서 칼을 치니 뇌성과 같은 소리가 산을 울리고 흰 기운이 계곡에서 하늘에 솟아올라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었다(在無等山 立石下金德齡擧義時於 此鑄劍劍且成山有聲 如雷嗚 白氣自谷中 天數日人皆異之)’라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의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1567~1596)장군이 23세 때, 그러니까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이다. 이곳 삼밭골 주검동에 믿음직스런 장정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땅땅!’ 쇠붙이를 두드리는 소리가 원효계곡에 울려 퍼졌다.

장군과 의병들이 이곳 계곡에서 사철(砂鐵)을 채취해 그 철로 각종 무기 등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제철로(製鐵爐), 단조로(鍛造爐), 정련로(精鍊爐)터 등, 지금은 흔적만 남은 그곳을 바라보며 잠시 시간에서 벗어난다.

향토애와 애민심에 불탔던 김덕령 장군과 의병들이 바로 눈앞에서 분주히 움직인다. 쇠풍로에 불길이 이글거리고, 쇠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들린다.

한동안 그렇게 생각에 잠겼다 자리를 뜨는데, 조금 전에 만난 할아버지가 커다란 바위 앞에서 쉬고 있다.

큰 바위에는 누가 새겼는지 모르나 만력계사 의병대장 김충장공 주검동(萬曆癸巳 義兵大將 金忠壯公 鑄劒洞)’이라 쓰여 있다. 안내문에 만력은 1573년부터 1620년까지 사용하던 연호고, 계사란 선조 26(1593)으로 의병으로 활약한 시기를 뜻하며, 충장이란 시호를 쓴 것으로 보아 1788년 이후 김덕령장군의 활약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새긴 것으로 보인다.’라고 쓰여 있다.

할아버지! 여기 자주 오세요?”

힘들어서 많이 걷지는 않으오.”

할아버지와 헤어져 다시 숲길을 오른다.


<김덕령 장군이 무기를 만든 주검동터>

이어 치마바위다. 충장공의 누님도 힘이 천하장사였다 한다. 두 남매가 어린 시절 힘자랑을 했는데, 이 치마바위는 장군의 누님이 치마폭으로 감싸 갖다 놓았다 한다. 장정 10여명이 넉넉히 둘러 앉을만한 바위 곁을 지나며, 여인들의 역할과 내조를 생각한다.

옛 위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누님의 역할에 대한 얘기가 많다. 남아선호, 장자상속의 시대가 되면서 누님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머언 얘기가 아니다. 개발독재 시절에도 우리네 누님들은 시내버스 안내양,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부모를 공양하고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까지 책임을 졌다. 그 무렵 시골에 가면 자신의 희생으로 가정을 지킨 그 누님들의 집이 한집 건너였다. 그 시절이 바로 엊그제다. 이제 회갑을 넘겼을 그 누님들이 오늘의 우리와 이 나라를 있게 했다고 하면 너무 과장하는 말일까?

치마바위 이야기는, 치마폭에 싸서 옮긴 바위 자체가 아니라, 충장공을 위해 헌신했던 누님의 정성과 노력을 말함일 것이다. 잠시 고개를 숙여 충장공과 누님을 만나본다. 오뉘의 애틋한 정이 시원한 바람이 되어 땀을 식혀준다.


<만력계사 의병대장 김충장공 주검동이라 쓰인 바위>

<치마바위>


<원효계곡 시원지>

조금 더 오르니, 숲이 수런거린다. 바람이 흔드는 숲소리가 아니다. 수런대는 물소리가 시원하다. 원효, 용추, 증심사 계곡 등 무등산의 3대 계곡 중 하나인 삼밭실 원효계곡 시원지다. 이곳에서 시작하여 원효계곡을 내려가 충장공의 생가 앞에 머무를 테니, 바로 광주호를 이루는 물이다.

이어 옛날 나무꾼들이 땔감이나 숯을 구워 나르던 물통거리를 지나니 숲 사이로 희미하게 하늘이 보인다. 이제 서석대 들머리 쪽으로 나서는 오르막길이다.

그 기쁜 마음을 아는지 군락을 이룬 주황색 동자꽃이 아이들(童子)의 그 해맑은 웃음으로 반겨준다. 그러자 힘이 더 솟는다. 단숨에 숲을 벗어나 하늘과 산과 저 아래쪽, 아파트가 숲을 이룬 도심을 내려다본다. 군부대 삼거리로 불리는 곳이다.


<동자꽃과 하늘 말나리꽃>

이제 서석대가 눈앞이다. 산수국이 군락지를 이룬 곳을 지나니 바로 쭉쭉 하늘을 향해 서있는 입석들, 서석대가 가슴에 안긴다.

바람에 실려 구름이 지나가는 모습이 더 서석의 모습을 신비롭게 한다. 동으로는 화순의 동복수원지와 이서땅이 보이고 남으로 백마능선을 타고 가니 안양산 휴양림이다. 북으로는 담양 창평땅이다.

서쪽은 빛고을 광주 시가지다. 낯익은 건물들이 한눈에 든다. 잠시 옥작복작 살아가는 이웃들을 내려다 보다, 여기가 해발 1100m 지점임을 알리는 무등산 서석대 석비 앞에 선다.

바로 코앞이 무등산 최고봉인 천왕봉이다.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재빠르게 흘러가는 흰구름을 천왕봉이 잡았다가 놓아준다. 그것도 잠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사방이 어두워진다. 작은 빗방울이 눅눅하게 온몸을 적신다.

천왕봉 쪽은 가보지 못해서 바라만 보는데, 역시 충장공과 얽힌 얘기가 생각난다. 저곳 정상은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의 세 바위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한다. 세 바위봉우리 모두 서석대나 입석대처럼 선돌로 솟아있어 신비롭고 장엄한 풍광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지왕봉은 일명 비로봉이라고도 하는데 이 바위를 뜀바위라고도 한단다. 충장공이 어렸을 때 지왕대 정상의 이쪽 바위에서 저쪽 바위로 뛰어다니며 무술을 연마하고 담력을 길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 장교 하나가 나도 뛸 수 있다고 뛰어 보다가 떨어져 죽은 일이 있다 한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졌다는 말이 이때 증명되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죽었다 하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야하는데, 크크크 웃음이 나오니, 좀 얄궂다.


<무등산 최고봉 천왕봉>

<서석대>


<서석대>

여기서 잠깐 무등산의 선돌(立石)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보자. 무등산 선돌은 화산암체다. 이 화산암체는 지금부터 약 6,600만 년 전9,000만 년 전의 중생대 백악기 말, 수차례 화산활동의 결과다. 화산활동은 지하의 마그마(magma)가 지표의 약한 부분을 뚫고 나오는데, 우리나라의 백두산과 한라산은 신생대에 분출된 화산이며 화구가 있다. 이곳에 물이 고여 천지와 백록담을 이루었는데 무등산에는 화구호()가 없다. 이유는 화산활동이 있은 지 오래되어 침식과 풍화에 의해 화구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풍화에 강한 입석대와 서석대만 남아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에 현재 활화산이 없으나, 백두산이 얼마지 않아 분출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고, 그 폐해가 엄청날 것이라고 하는바, 어떤 모습일까? 지난해 여름 백두산 온천지대에서 보았던 부글부글 끓던 지표면의 모습이 떠올라 우려와 기대가 교차한다.

한동안 사위를 살피며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서석대를 뒤로 한다. 비에 젖은 터라 바위들이 미끄럽다. 큰 바위, 작은 바위틈을 요리조리 몸을 돌리며 조심조심 입석대를 향해 내려온다.

조금 내려오니, 길고 넓적한 바위가 있다. 마치 미끄럼틀처럼 생긴 바위가 비스듬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다. 용이 승천했다는 승천암이다. 잠시 그 바위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하늘을 함께 올려다 보다 하강길을 재촉한다. 이무기야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르면 좋겠지만, 땅을 밟고 사는 나야 무엇하러 승천을 서두를까? 천국이나 극락이 좋다면 돈 많은 재벌, 무서운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찌 먼저 가지 않을까? 그들이 설령 서로 먼저 가려고 싸우든 말든, 나는야, 저 아래 사람 사는 세상이 좋다. 산행을 마치고 술 한 잔 마실 생각으로 들뜬 하강길이다. 몸이 나를 듯 가벼워진다.


<승천암>

마침내 입석대다. 육각인가, 오각인가, 수정체 모양으로 우뚝우뚝 선 바위들이 언제 봐도 신비롭다.

문득 임란 의병장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 선생이 쓴 무등산 기행기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떠올린다. 유서석록은 제봉 선생이 41세 되던 1574년 음력 420일부터 24일까지 5일간 당시 74세의 광주목사 임훈(林薰)일행과 함께 무등산을 둘러본 뒤 4,800자의 순한문으로 기술한 기행문이다. 임진왜란과 정묘왜란 등 2차례의 왜란이 1592(선조 25)~98년이니, 그 왜란이 일어나기 18년 전에 썼던 글이다.

유서석록은 무등산과 적벽, 그리고 성산(星山)의 승지 등 지금부터 4백여 년 전인 16세기의 무등산과 그 인근의 모습을 유려한 문장, 자세하고도 재미있게 표현한 산행기(山行記)로 소중한 기록이며 빼어난 작품이다.

다음은 제봉 선생이 쓴 유서석록의 입석대에 관한 글이다. 이 유서석록의 기록으로 입석대를 둘러보자.

 

<절집 기둥을 세운 흔적>

<입석대>

<입석대, 구름을 머금고 있을 때 찰칵>

입석대(立石臺)’

석양에 입석암(立席庵)에 닿으니 양사기(楊士奇 ,中國 明나라 文人 정치가)의 시에 이른바 십육봉장사(十六峯藏寺)라는 곳이 바로 여기로구나 싶다.

암자 뒤에는 괴석이 쫑긋 쫑긋 죽 늘어서 있어서 마치 진을 치 병사의 깃발이나 창검과도 같고, 봄에 죽순이 다투어 머리를 내미는 듯도 하며, 그 희고 곱기가 연꽃이 처음 필 때와도 같다.

멀리서 바라보면 벼슬 높은 분이 관을 쓰고 긴 홀()을 들고 공손히 읍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철옹성과도 같은 튼튼한 요새다. 투구철갑으로 무장한 듯한 그 가운데 특히 하나가 아무런 의지 없이 홀로 솟아 있으니 이것은 마치 세속을 떠난 선비의 초연한 모습 같기도 하다.

더욱이 알 수 없는 것은 네 모퉁이를 반듯하게 깎고 갈아 층층이 쌓아 올린 품이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튕겨 다듬어서 포개놓은 듯한 모양이다.

천지개벽의 창세기에 돌이 엉켜 우연히 이렇게도 괴상하게 만들어졌다고나 할까. 신공귀장(神工鬼匠)이 조화를 부려 속임수를 다한 것일까. 누가 구워냈으며, 누가 지어부어 만들었는지, 또 누가 갈고 누가 잘라냈단 말인가. 아미산(峨眉山)의 옥으로 된 문이 땅에서 솟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성도(成都) 석순(石筍)이 해안(海眼)을 눌러 진압한 것이 아닐까. 알지 못할 일이로다.

돌의 형세를 보니 뾰족뾰족하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그 가운데 헤아려볼 수 있는 분명한 것이 16개 봉우리이다.

그 속에 새가 날개를 펴듯, 사람이 활개를 치듯 서 있는 건물이 암자이다.

입석암은 입석대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아 우러러보면 위태롭게 높이 솟아서 곧 떨어져 눌러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서 머물러 있기가 불안하기 그지없다.

바위 밑에 샘이 두 곳이 잇는데 하나는 암자의 동쪽에 있고 또 하나는 서쪽에 있어 아무리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불사의사(不思議寺)’

암자를 떠나 조금 북쪽으로 입석을 오른편에 끼고 불사의사로 들어갔다. 승방은 몹시 좁아서 좌선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견디기 어렵게 보였다.

승방 남쪽에 있는 석대(石臺)는 평탄하여 앉을만하고 그 곁에 큰 나무가 차일을 쳐놓은 것 같이 그늘을 이루고 서 있다.

입석암은 무등산의 여러 절 가운데 지대가 가장 높아 산이나 바다와 같은 높고 깊은 곳을 한눈에 멀리 바라볼 수 있어서 경치의 극치라 하겠으나 아깝게도 바람이 세어서 몸이 떨리므로 그곳에서 오래 견디기가 어려웠다. 다 함께 바위문을 나와 배회하면서 뒤돌아보니 마치 친구와 헤어지는 것처럼 서운하다.

입석에서 동쪽 길은 험하지 않다. 반석이 마치 방석같이 판판하게 깔렸는데 지팡이를 짚으면 맑고 높은 소리가 울리고 나무 그늘이 깔린다.

혹은 쉬기도 하고 혹은 걷기도 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니 낭선(浪仙)나무 그늘 밑에서 자주 쉬어가는 몸이로다. 삭게수변신(數憩樹邊身)’ 이라는 시구가 이 정경을 나타내는데 알맞아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뵈기만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신 입석대에는 입석암불사의사라는 절집이 있었는 듯 싶다. 지금도 입석대 주변 바위에 당시 절 집 기둥을 세웠던 주춧돌의 흔적이 남아있다. 주춧돌 바위의 둥그렇게 파인 홈 자리에 빗물이 고여 있다. 인걸도, 그 인걸이 밟았던 흔적도 희미하고, 산천만 유구하나 보다.

 

입석대를 둘러보고 근처 너럭바위에서 가지고간 김밥을 먹는다. 물까지 마시고 마악 일어서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다행히 바로 옆에 바위틈이 있다. 그 좁은 바위틈에 마치 산짐승처럼 몸을 숨긴다. 자리가 비좁아 한 다리는 높이 세워 구부려야 했지만, 비를 몽땅 맞는 것보단 낫다.

나도 좀 들어갈 틈이 있소?”

물에 빠진 생쥐꼴이라더니, 쫄딱 젖어 내려가던 사람이 묻는다. 안타깝지만 고갤 젖는다.

소나기라 금세 그친다. 더욱 미끄러워진 바위를 밟아 장불재에 이른다. 휴게소에는 젖은 몸을 말리는 사람들 몇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입석대에서 점심을 먹고 비를 피하느라 30분 이상을 넉넉히 쉰 터여서 그 휴게소를 그냥 지나친다. 미끄러운 돌을 조심조심 밟아 광주천의 시원지 샘골로 간다.

샘골은 이 장불재(해발 900m)에서 중머릿재(해발 586m)로 내려가는 길가(해발 800m) 계곡에서 솟구쳐 나오는 샘물터를 가리킨다. 바로 그 샘물이 광주천의 시원지인 것이다.


<서석대에서 바라본 천왕봉>

<광주천 발원지 샘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