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

운당 2011. 7. 26. 11:20

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3

 

나비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 함평

 

일제 강점기 왜인들이 삼성 삼평이라고 폄하하는 전남의 여섯 고을이 있었다. 삼성은 곡성, 장성, 보성이고, 삼평은 함평, 남평, 창평이다. 이 전남의 삼성삼평 사람들은 고춧가루 서 말을 먹고 뻘속(물속도 아닌 갯벌 속) 삼 십리를 뀐다.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난다고 했다. 성질과 인심이 못 돼먹은 고장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침략자 왜인들이 이 고장에서 얼마나 살기 힘들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이 고장 사람들의 저항정신, 애향심, 애국심을 알 수 있으니 자랑스러운 말이다.

 

오늘의 호남 기행은 함평의 두 젖줄인 함평천과 고막천 일대다. 2011721, 시원한 시간을 택해 아침 일찍 김 철 선생(1886~1934)을 찾는다. 선생은 삼평 중의 하나인 함평 신광면 함정리에서 태어나셨다. 김 구, 손병희,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내신 분이다.

생가 터에 세워진 김 철 기념관을 찾으니, 더위 때문이고 이른 시각이어서 그런지 고즈넉하기만 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참배했던 기념관이어서 선생의 동상 앞에서 잠시 목례만 올리고 곧바로 단심송으로 갔다. 단심송은 선생이 1917년 상하이로 망명하며 나는 조국독립을 위해 기꺼이 이 한 몸 조국에 바쳤으니, 부인은 나를 찾지도 기다리지도 마시오라는 서신을 보내오자, 일제의 감시에 시달리던 부인은 남편이 가족 걱정 없이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길은 죽음 밖에 없다.’ 생각하고 목을 매 자결한 소나무다. 그 단심송 앞에서도 잠시 목례를 올리고 기념관 옆 상해임시정부청사 건물 쪽으로 내려왔다. 상하이의 건물보다는 조금 작지만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이곳 함평의 임시정부청사 앞뜰에는 안중근 장군의 동상이 있다. 금방이라도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을 향해, 동양평화의 권총을 빼어들 것 같은 표정의 장군상을 올려다보는 나그네의 마음은 무겁다.

()? 왜냐?

첫째는 안중근 장군을 테러리스트라고 폄하하는 친일파, 극우, 광신적 종교 세력이 아직도 이 땅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독립지사의 후손과 친일파 후손들의 극명한 삶이 슬퍼서다.

일제 강점기, 친일은 귀족 작위와 은사금의 보상을 받는 입신양명의 길이었다. 항일은 재산과 자식들의 목숨까지 내던지고 낮선 땅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는 길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것은 일제 강점기를 벗어난 현재도 현재진행형의 길이다. 친일파 후손들은 조상의 후광을 입어 좋은 교육, 기득권을 대물림 받으며 떵떵거린다. 못 배우고 물려받은 것 없고, 국가는 물론 사회에서도 외면을 받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길은 고통의 길이다.

그 고통이 길이 어떤 것인지, 두어 가지만 더듬어보자.

독립지사 우당 이회영 선생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10대손이다. 조선 시대에만 정승 판서를 9명이나 배출한 조선 최대 명문가 집안의 후손이다. 그 이회영 선생 6형제는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층부터 나서야 한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바로 그 신념으로 전 재산을 처분 600억여 원을 마련해 우리 조선의 옛 땅 만주로 집단 망명했다. 그리고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이회영 선생은 일제의 고문으로 1932년 사망했고, 조선 최대 부호이기도 했던 둘째 이석영도 1933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이석영의 두 아들도 모두 중국에서 사망해 절손이 되었다.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가문의 대를 이어갈 아들을 낳지 못하면 죽어서도 조상의 얼굴을 못 본다는 시대에 독립운동이란 이름으로 천추의 한을 남긴 것이다.

 

그 신흥무관학교의 또 다른 주역이자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선생은 안동에 있는 99칸 대저택인 임청각(臨淸閣)의 주인이었다. 선생은 경술국치 직후 독립운동을 위해 일가를 이끌고 중국으로 집단망명, 그곳에서 사망했다. 9명의 가족이 독립운동에 헌신 목숨을 바쳤건만, 그 후손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보상은커녕 고아원에 입소하는 등 모진 가난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해방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도 임청각의 소유권도 되찾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지금도 친일파의 후손들은 각계 각층에서 기득권 층으로 군림하며, 심지어는 조상이 물려준 재산권을 지키겠다며 국가의 친일재산환수조치에 반발하고, 소송을 진행중이다. 민족정기까지 따지지 않더라도 가관이 아닐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누굴 탓할까? 막걸리 투표, 고무신 투표는 과거지만 오늘도 형태만 다를 뿐이다. 우리가 만든 더 무서운 지역감정 조장도 과거가 아니라, 역시 현재진행형이니 말이다.

 

김 철 선생 기념관을 나와 함평 해보면 용천사로 간다. 삿갓 선생 김립의 시 보림사를 지나며에 나오는 그 용천사다.

 

빈궁과 영달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쉽게 구하랴.

내가 좋아하는 대로 유유히 지내리라.

북쪽 고향 바라보니 구름 천 리 아득한데

남쪽에 떠도는 내 신세는 바다의 물거품일세.

술잔을 빗자루 삼아 시름을 쓸어버리고

달을 낚시 삼아 시를 낚아 올리네.

보림사를 다 보고나서 용천사에 찾아오니

속세 떠나 한가한 발길이 비구승과 한가지일세.

 

용천사는 영광 불갑산 줄기와 닿은 모악산에 자리한 꽃무릇 군락지로 유명한 절집이기도 하다.

지팡이를 짚으며 내려오는 스님과 잠시 예를 나눈 뒤, 용천사에 들어선다. 눈 부릅뜬 사천왕상, 대웅전, 숙종 11(1685)에 만들어졌다는 석등(유형문화재 제84),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있는 세 분의 돌부처님, 범종각 등을 차례로 둘러본다.

9월초, 여름이 물러가고 꽃무릇을 피워내면 용천사는 꽃동산에 둥실 뜬 극락으로 변한다. 극락이야 가보질 않았으니, 이런 풍광이 그런 곳일 거라 짐작만 하는 거다. 오늘은 무더위에 지친 걸음으로, 달려드는 모기를 쫒느라 손을 휘두르지만, 여름은 어느새 저만큼 갈 것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그때를 기다리며 꽃무릇 대신 매미 소리 벗 삼아 용천사를 나온다.

함평읍으로 가기 위해 목포의 상수원인 대동저수지 길을 택한다. 너른 저수지의 물굽이를 따라 가는데 중간에 작은 쉼터와 조류관찰대가 있다. 그곳 수암공원의 조롱박을 볼 수 있는 시설물 입구에 흑인 남녀가 환하게 웃고 서있다. 그들을 따라 한바탕 웃는다.

그렇게 한숨 쉬고 저수지 아래 전라남도야구경기장을 지나 대동면 소재지에 이르니 조형물 하나가 눈에 띈다. 바로 함평 대동면의 고산봉(359m)에 사는 황금박쥐상이다. 청동과 황동으로 제작된 약 10m 높이의 황금박쥐탑은 대동면 주민이 성금을 모아 제작했다.

고산봉은 일제 강점기 말엽 때 금광이 있던 곳이다. 이제는 폐광된 그 금광에 황금박쥐가 서식하는 걸, 1998년에 대동면 주민 최수산 씨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이 대동면 소재지 향교리(鄕校里)에 유서 깊은 향교(鄕校)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향교라는 지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 대동면 소재지 향교에서 함평천에 놓인 다리 영수교를 건너면 바로 함평읍이다.

 

함평나비축제는 나비를 보기 위한 축제가 아니다. 나비가 사는 자연환경, 청정한 생태환경을 위한 우리의 희망, 꿈을 보는 것이다.

함평읍에서의 첫걸음은 기산봉을 감고 휘돌아 함평읍으로 들어오는 기산영수(箕山潁水). 중국 하남성 동봉현에 있는 기산과 영천의 지명은 요() 임금 때의 선비 소부와 허유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그와 비슷한 풍광, 유래가 있어 기산영수라 하는 기산봉과 함평천을 둘러보고 나비축제장으로 간다.

나비축제장은 한 여름을 맞아 조용하다. 이곳도 여러 차례 들린 곳이고 해서 곧바로 황금박쥐생태전시관으로 갔다. 이 황금박쥐 생태전시관은 깊은 산 속의 동굴처럼 꾸며져 있어 함평세계나비곤충엑스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곳도 이미 들려본 곳이지만, 사진을 찍어야겠기에 매표소로 갔다. 다가오는 손님을 보고 밖으로 나온 매표소의 다문화 아주머니가 이천원이요하는데 내 귀에 이천만원으로 들린다.

이천만원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스개말을 하자,

, 그렇게 주셔도 되요.”

익숙한 우리말과 웃음으로 능숙하게 받아넘긴다.

오늘은 사진 몇 장 찍으려고 이천원을 투자했지만, 황금박쥐를 보고 나와 역시 이천만원짜리라, 볼거리가 많습니다.’ 했더니 고맙습니다하고 환하게 웃는다. 짧은 대화지만 이것이 사람끼리 주고받는 정 아닐까?

곧바로 화양 전망대에 오른다. 오늘 주요 목적지 중의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화양 전망대는 산이라기보다 작은 동산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웅장하고 신비롭다. 집채만한 바위들이 아기자기하면서도 기묘한 풍광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나비축제장은 물론, 함평천이 펼쳐놓은 너른 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이열치열이라, 더위에는 찬 음식보다 더운 음식이 좋다. 시장으로 가 함평의 유명한 국밥을 먹는다.

오메, 장마땜시 채소값이 징그럽게 올라부렀어라우.”

나이 지긋한 주인 아짐씨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무김치며, 맛있는 파김치를 듬뿍 준다. 파김치를 훨씬 더 맛나게 먹으니, ‘더 줄께라?’ 묻는다. 고마운 함평천지 인심이다.

점심을 먹은 뒤, 함평천과 잠시 헤어진다. 함평천은 너른 들녘 가운데로 가고, 나그네는 들녘 갓길을 택해 엄다면으로 간다. 남도노동요상을 보기 위해서다. 이 엄다면과 이웃 학교면은 함평천지 들판의 주인이다. 함평천의 물로 농사를 짓는 이곳에 민초들의 노래가 없다면 안 될 말이다.

이곳 엄다 노동요는 모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늦은 상사 소리, 작은 상사 소리), 논매는 소리(무삼벗기는 소리, 외주삼장, 긴소리, 들내기 소리), 풍장소리, 등짐소리, 홀태소리, 개상질소리, 매통질소리, 디딜방아소리 등으로 짜여있는데 매년 7월 백중날을 기해 전승 보전 행사를 하고 있다.

그 농부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는 남도노동요상 앞에서 잠시 함께 어깨 짓을 하고 학교면(학다리)으로 넘어간다. 학교면(鶴橋面)은 모내기를 마친 너른 들판에 날아온 학()이 마치 다리()를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화를 할 때 학교면보다 학다리라는 명칭을 많이 쓴다.

그 학다리역의 옛 역사로 간다. 이곳 학다리역의 이름은 호남선 복선화로 사라졌으나, 위치를 광주 목포간 국도 1호선 도로로 자리를 옮겨 함평역이 되었다.

이곳이 그 옛 학다리 기차역터였다는 흔적은 급수탑이다. 증기기관차는 석탄으로 물을 데워 그 증기의 힘으로 달렸다. 그래서 수질 좋은 물이 필요했고, 이곳 학다리역에서 그런 물을 공급받았다. 그 급수탑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기차가 오고 가던 때, 사람들의 발길이 분주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사진 두어장을 찍고는 금계포란지형의 명당 곡창마을을 지나 예전에 대굴포(大堀浦)라고도 했던, 지금의 사포(沙浦)에 이른다. 여기서 함평천은 영산강으로 들어가고 사포에 놓아진 다리는 이웃 고을 나주 동강면으로 이어진다.

이 사포는 영산강이 크게 휘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 한 번 더 휘어지면서 한반도 모양의 지형을 만든 뒤 목포(木浦) 앞 바다를 향해 간다.

목포(木浦)라는 지명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이 목포(木浦)라는 지명은 영산강 중류(中流) 지점인 영산포의 옛 이름이라고도 한다. 당시 포구는 나무판자로 만들었기에 목포라고 했고, 퇴적과 함께 바다가 멀어지면서 목포라는 지명도 강물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영산포란 이름의 유래는 나주를 돌아볼 때 소개하겠다.)

아무튼 영광군 군남면에서 발원한 함평천이 영산강과 합류하는 사포도 예전에는 나무로 만든 목포(木浦)였고, 마한시대, 아니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서부터 함평과 나주를 잇는 주요 나루터였다.

하지만 21세기에 이르러 나루터 구실은 동강대교에게 맡기고, 이제 고기잡이 배 몇 척만이 물결과 놀뿐이다.

그 사포에서 이번에는 고막천을 찾아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중간에 이제는 이름만 남은 작은 포구 중천포(中川浦)가 있다. 그 중천포에 잠시 들린다. 중천포도 이제 그날의 영화는 꿈이련가? 작은 배 몇 척이 갈대숲바람에 흔들거리며 굽이굽이 휘어져 흐르는 강물과 배를 맞대고 있을 뿐이다.

고막천 역시 주변에 비옥한 농토를 선물로 줘, 골골마다 풍족한 삶터를 일구며 흐르는 강이다.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태청산(泰淸山. 593m) 남동쪽 능선 장승백이 골에서 발원하여 나주 다시면 석관정에서 영산강으로 들어가는 고막천은 함평천과 더불어 함평의 젖줄이다.

그 고막천 주변은 온통 버드나무와 갈대숲이다. 천변 논에는 벼가 한창이고, 고추와 콩, 깨 등 밭곡식도 풍성하다. 나그네의 발걸음 따라 눈앞에 마을이 나타났다가는, 이내 산모롱이 뒤로 숨는다. 너무 더워서인지 마을 앞 느티나무가에 세워진 정자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네 다리 펴고, 크게 코골며 한숨 자고 갈까 하다가, 한가하게 놀러 다니는 게 미안하여 오늘 마지막 기행지인 고막천을 향해 길을 멈추지 않는다.

고막천에 이르러 먼저 고막소공원을 찾는다. 20051227일 함평군의 폭설피해지원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숨진 고 이익주 부산광역시 행정관리국장의 순직 기념비가 있는 곳이다.

고 이익주 국장은 지난 200512월 유례없는 폭설로 큰 피해를 입은 함평지역을 방문해 복구 작업을 하고 귀가하다 승용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이에 고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영호남 화합과 우호증진을 다지기 위해 함평군이 20062월 국도 1호선 인근의 고막소공원에 9.5m 높이의 추모비를 세우고 매년 추모식을 갖고 있다.

이제 고막천석교다. 이곳 사람들이 고려 때 고막대사가 도술로 똑딱 만들었다고 해서 똑다리로 부르는 이 고막천석교의 나이는 700여살이다. 지난 2001년 보수 공사 때 바닥기초 나무말뚝의 탄소 연대를 측정한 결과이다. 고려 원종 14(1273)에 건립된 것으로 판정됐다는 것이다.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물이 잘 넘치기로 소문난 고막천의 거센 물살을 요지부동으로 버텨온 멋진 다리다.

 

그러나 연대나 예술성으로 고막천석교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으뜸이라 말하기는 좀 쑥스럽다. 연대나 예술성으로 볼 때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신라 경덕왕, 751), 강진 병영성의 홍교(조선 태종, 1417)와 충북 옥천의 청석교(신라 문무왕 660) 등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막천석교의 참된 가치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막천석교가 그 잘난 권력의 상징인 홍예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월을 이어온 바로 우리네 민초의 발이었다는 것이다. 소말이 끄는 달구지, 개와 닭도 지나가고, 산자가 탄 가마, 죽은 자의 상여도 건너던 다리, 거지도, 선비도, 나그네도, 장사꾼도 건너 주던 다리, 사랑에 빠진 사내와 처자의 애환이 깃든 다리, 돈벌이 떠난 지아비를 기다리던 아낙의 다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가 건너는 삶의 다리이기 때문이다.

1910년대에는 쌀 백석을 실은 큰 배가, 그리고 1960년까지도 서해의 지도나 암태도 등의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과 각종 해산물이 배에 실려 돌다리 앞의 고막포(古幕浦)까지 왔다. 그러면 보부상들이 부지런한 걸음으로 그 물품을 호남의 내륙까지 운반했다.

하지만 지금의 고막천은 돛단배조차 다닐 수 없게 폭이 좁고 수심도 얕다. 더욱이 콘크리트로 엉성하게 보수해놓은 모습은 한 가닥 그리움마저 앗아간다.

그렇다고 누굴 탓하랴? 저나마 남아서 나그네를 길손으로 맞아주니, 그 변함없는 소탈한 모습에 고갤 숙일 뿐이다.

평화로운 세상, 나눌 줄 아는 세상이 오긴 올까? 지금 남과 북의 형제들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서로 쌈질중이다. 재벌 기업은 큰돈을 긁어모으다 못해 콩나물, 두부장사까지 빼앗아 말 그대로 돈 벌이에 환장한 나라다. 가진 자, 기득권층일수록 부와 권력의 대물림을 위해 투기, 위장전입, 탈세는 기본이요, 병역비리 등 온갖 부정, 편법을 일삼는 나라다. 과연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가난한 이들, 노동자들이 에해라, 대해라!’ 덩실덩실 어깨춤 출 날이 올까?

 

하지만 살기 좋은 세상이 오겠지. 그건 믿음이요 희망이다.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고향을 보려하고. 화평한 세상, 함께하는 세상, 거어드렁 거리며 살아갈 세상, 호남가의 세상을 바라며 광주고향을 보려고 이제 함평을 떠난다.


김철 기념관 무더위에 한가한 아침이다.

상해임시정부 청사와 안중근 장군이다.

단심송, 소나무 가지에 밧줄이 걸려 있어 그날의 아픔이 생생하다.

용천사 들머리

스님! 과연 어디로 가야합니까?

용천사 대웅보전

석등과 느티나무 아래 돌부처 형제님들

제발 좀 잡아갈 놈좀 잡아가쥐요.

수암공원 쉼터에서 함께 웃는다. 웃음은 만인 만국 공통어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의 기념비다. 수몰로 고향을 등진 사람들에게 이 비가 바로 고향이다.

대동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황금박쥐상

기산 영수, 세상이 뭐 별거냐? 자연과 더불어 살리라.

영수에 발을 담근 기산봉, 우리들 민초도 기좀 살리고 삽시다.

화양전망대의 신비한 바위와 풍경

이 계단을 오르면 바로 낙원입니다.

화양전망대에서 바라본 함평천지 들판

함평나비축제 전시장

황금으로 제작한 황금박쥐상

황금박쥐 실물

함평장의 식당 거리

엄다 노동요상

옛 학다리역의 급수탑

금계포란지형의 곡창리 마을, 소나무는 마을 앞 연못을 감싸고 있다.

함평천과 영산강이 만나고 있다.

나룻배와 영산강이 한가롭게 놀고 있는 중천포

고막소공원의 이익주 기념비

의로운 삶에 안식 있으라

700살 먹은 고막천석교, 도술로 똑딱 만든 똑다리다. 여기서 함평천지 기행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