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밖 여행기

이집트, 그리스, 터키 여행기 3

운당 2008. 3. 9. 11:59

그러나 무엇보다 이 박물관의 보물은 비록 모본이지만 로제타석이었다. 길이 114㎝, 폭 72㎝인 이 로제타석은 모양이 다듬어지지 않은 검은 현무암의 비석조각이다. 오랜 세월 마모된 채로 있다가 1799년 8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 포병사관 부샤르가 알렉산드리아시 동쪽 약 60 km 지점 나일강 하구의 로제타 마을에서 진지구축 중 발굴했다고 한다. 이 로제타석의 원본은 1801년 프랑스가 이집트를 포기한 뒤 영국인의 손에 들어가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당시 멤피스의 사제들이 쓴 듯한 비문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BC 205~180)의 은혜를 요약하고 있으며, 그의 즉위를 기념해 재위 9년째에 쓰여졌다고 한다. 이집트어와 그리스어의 2가지 언어와 상형문자, 민용문자(民用文字:이집트 상형문자 필기체), 그리스 알파벳의 3가지 필기방식으로 쓰인 이 비문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석하는 열쇠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해독작업은 주로 영국의 토머스 영과 프랑스의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했다고 한다. 로제타석의 상형문자 본문에는 6개의 똑같은 테두리(상형문자를 둘러싼 타원형)가 있는데, 토머스 영이 이 테두리를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으로 해독해, 다른 비문에서 발견된 이 같은 테두리가 오랫동안 짐작해온 대로 왕의 이름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새나 동물이 바라보는 그림의 방향을 조사해 상형문자의 부호 읽는 방법을 알아냈다고 한다.

샹폴리옹은 영이 다 해석 못한 부분에서 출발해 신관문자(神官文字)와 상형문자를 해독했으며 마침내 각 이집트 상형문자 부호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전체 목록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이집트학 학자 가운데 최초로 이들 부호 중 일부는 알파벳이고 일부는 음절을 이루며 또 다른 일부는 전체 개념이나 앞서 표현한 대상을 나타내는 한정사(限定詞)라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로제타석의 상형문자 본문이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반대로 그리스어를 번역한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업적은 그 뒤 모든 이집트 상형문자 문서 해석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박물관 견학을 마치고 나오니 12시다.

“공무원은 12시면 퇴근하지요. 대부분 2,3가지 다른 직업을 갖고 있지요. 경제적 이유지요. 그래도 학교엔 스클버스가 다 있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의 높이가 2285m지요.”

“이집트 사람들은 모든 걸 다 ‘인샬라’(신의 뜻)라고 받아들이지요.”

하긴 포기라는 것은 배추 한 포기 두 포기 하듯 배추나 꽃을 세는 단위지만, 우리도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고 곧잘 포기하고 체념하고 산다. 하긴 신의 뜻이라고 포기하거나 체념하면 핑계가 되어서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저런 설명, 그런 저런 해석을 하면서 예수가 3개월을 피난했다는 교회와, 나일강물에 떠내려 온 모세를 처음 건진 장소에(파라오가 살고 있는 왕궁과 28km 떨어져 당시에 행궁이 있었을 거로 추정 되는 나일강의 지류. 현재는 강물의 흔적이 없음)세웠다는 모세회당(회당은 유대교회를 지칭한다 함)을 둘러봤다.

그런데 배가 고프다. 금강산도 식후경, 점심은 나일강 선상식당의 양고기 구이다. 등 따슬뿐 아니라, 검은빛 나일강 위에서 배부르게 먹는 양고기다. 파라오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잠시 파라오가 되어 영세불멸의 허망을 꿈꾸어 본다.

<검은 빛 나일강은 카이로 시민은 물론 이집트인들의 생명수다>

 <카이로 시내를 흐르는 나일강>

 <나일강과 함께 하는 카이로 시민들>

 <예수가 로마의 박해를 피해 3개월을 피난했다는 피난교회와, 나일강을 떠내려 온 모세가 이집트 왕녀에게 구출 된 모세회당으로 가는 길>

 <피난교회와 모세회당으로 가는 길의 기념품 가게>

 <모세회당으로 가는 골목에 전시된 기념품들>

 <기념품 가게에 전시된 기념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