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동화

1000원

운당 2007. 10. 5. 10:28
<동화>

1000원

김목


파아란 하늘이 뭉게구름 밭입니다. 몽실몽실 하얀 목화 꽃송이가 피어납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한가위가 낼 모래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오늘은 검은 구름이 몰려옵니다. 아침부터 잔뜩 찌푸리더니, 마침내 점심 무렵에 후두둑 소리가 납니다.

‘후두둑, 후두둑…….’

이내 빗방울이 창문 밖 세상을 뿌옇게 덮어버립니다. 오후 내내 주룩주룩 비가 내립니다.

배꽃초등학교 1학년 2반 교실입니다.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제 바람까지 부는지, 열어놓은 창문으로 비가 들이칩니다.

김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고 옵니다. 다시 자리에 앉으며 시계를 봅니다. 오후 4시가 막 됩니다.

그 때 출입구 문 쪽에서 인기척이 납니다. 작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살그머니 문이 열립니다.

작은 그림자는 머뭇머뭇 문 안으로 들어옵니다. 비를 맞았는지, 머리칼이 착 달라붙어있습니다. 얼굴에도, 옷에도 빗물이 달라붙어 있습니다.

“현정이구나.”

현정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입니다. 눈에 가득 두려움과 머뭇거림, 그리고 물기가 서려 있습니다.

“누가 때렸어?”

현정이는 이번에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입니다.

“뭐라고? 어떤 녀석이 널 또 때렸다고?”

김 선생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집니다. 불현듯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도, 동훈이가 자꾸만 때려요. 도, 동훈이가…….”

“왜? 세상에 때릴 사람이 없어서 널 때렸다냐?”

현정이는 다른 아이에 비해 발달이 조금 늦습니다. 말하기, 쓰기는 물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도 느립니다.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에 비해 마음이 부족한 아이는 아닙니다. 엊그제만 해도 한 아이가 점심을 먹고 체했는지, 교실에서 토를 했습니다.

‘아이 더러워!’

아이들은 코를 싸매고 토해놓은 음식찌꺼기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더러워도 치워야지.”

그 때 걸레와 쓰레받기를 가져와, 그 아이가 토해놓은 오물을 치운 아이가 바로 현정이입니다.

“아이 냄새!”

오물을 치우고 온 현정이의 손만 보고도 아이들은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더러워! 저리 가.”

자기 자리에 앉는 현정이를 짝꿍이 밀쳐냈습니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현정이는 넘어질 뻔 했습니다.

그래도 그 정도는 별거 아닙니다. 때려서 울리지만 않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래, 동훈이가 널 왜 자꾸 때리지?”

김 선생은 잔뜩 겁먹은 현정이의 얼굴을 보며, 목소리를 낮춰 다시 묻습니다.

“돈을 주라고 때렸어요.”

“뭐? 돈?”

이거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냥 간단히 넘어갈 일이 아닌 듯 싶습니다.

“지금 동훈이란 그 애 어디 있냐? 가서 데리고 오너라.”

현정이의 얼굴에서 겁먹은 표정이 사라집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교실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시계를 보니 4시 반입니다.

출입구 문 쪽에서 다시 인기척이 납니다. 거무스레한 그림자들이 어른거리더니, 스르르 문이 열립니다.

현정이가 먼저 들어옵니다. 얼굴을 보니 이제 겁먹은 표정이 아닙니다. 그렇게 당당한 모습의 현정이가 들어오고 그 뒤로 동훈이로 여겨지는 녀석이 들어옵니다. 또 쭈빗쭈빗 여자아이가 뒤따라 들어옵니다.

“네가 동훈이냐?”

“예!”

“넌 누구지?”

“현정이 언니 현화예요.”

“그래, 닮았구나. 몇 학년이냐?”

“3학년이어요.”

“그렇담 이제 얘길 해보자. 동훈이 너부터 말해라. 왜 현정일 때렸지?”

“돈을 안 갚아서요. 3년 전, 1학년 때였어요. 그때 돈이 5천원 있었거든요. 내 친구 남수가 2천원을 꿔가고 현화는 3천원을 꿔갔어요. 그런데 남수에게는 받았는데 현화는 지금까지 안줘요.”

“그러니까 그때 1학년 때, 너하고 남수, 그리고 현화 너! 모두 한 반이었느냐?”

“예!”

동훈이와 현화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동훈이는 당당한 표정이고, 현화는 겁을 잔뜩 먹은 얼굴입니다.

“그래, 그렇담 이번에 현화 차례다. 너 정말 동훈이에게 돈을 꿨어?”

“예.”

현화가 모기 소리로 대답합니다.

“그런데 왜 갚질 않았지?”

“2백원은 갚았어요.

“그래? 2백원은 받았냐?”

“예, 맞아요. 그런데 나머지를 안 갚아요.”

동훈이가 2백 원은 받았다고 대답을 합니다.

“현화야! 왜 안 갚았어?”

“돈이 없어서요.”

현화의 고개가 푹 숙여집니다.

“그래, 돈이 없는데 어찌 갚겠냐? 좋아. 알았어. 그런데 동훈이 너 왜 현정일 때렸지? 돈은 현화가 꿔갔는데 말야?”

“현정이가 언니 대신 갚겠다고 했어요.”

“현정이가 언니 대신 돈을 갚겠다고 했단 말이지? 현정아 그랬냐?”

조금 전까지 당당하던 현정이의 눈빛에 잠시 그늘이 집니다. 맞다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왜 대신 돈을 갚겠다고 했지? 현정아?”

김 선생이 부드럽게 묻습니다.

“동훈이가 돈 갚으라고 언니를 때렸어요. 그래서 대신 갚아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동훈이가 언니를 때리지 못하게 하려고, 네가 돈을 갚겠다고 했단 말이지?”

“예!”

대답하는 말투가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어디에 저런 야무진 마음이 있었을까? 언니를 생각하는 현정이의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왜 돈을 안 갚았지?”

“근데 돈이 없어요. 돈이 없어서 못 갚아요.”

“그렇게 돈이 없어서 갚을 수 없으면 대신 갚겠다는 말을 하지 말았어야지.”

“언니가 맞는 게 불쌍했어요. 언니를 때리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언니를 때리지 못하게 하려고 대신 돈을 갚겠다고 했단 말이지? 그런데 돈이 없어서 도저히 갚을 수 없었단 말이지?”

“예, 돈이 없어요. 도저히 못 갚아요.”

“동훈이가 계속 때려도 정 갚을 수 없단 말이지?”

“예. 정 갚을 수 없어요. 하지만 맞기는 싫어요.”

고개까지 가로젓는 현정이의 얼굴에 당당함과 두려움이 반반씩 섞인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김 선생은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올려 했습니다. 애써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잠시 돌려야했습니다.

“그래, 현정이 네 말이 맞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갚겠느냐? 그리고 동훈이에게 맞아서도 안 되지. 좋아, 그럼 동훈이!”

“예!”

“현화나 현정이나 돈이 없어서 못 갚겠다는 데 어쩌겠냐? 기어코 받아야겠냐? 때려야겠냐?”

“예. 현화와 현정이만 보면 딱 돈 3천원이 생각나요. 그래서 때려요.”

“그러니까 현화와 현정이 얼굴만 보면 3천원이 떠오른다 그 말이지?”

“예, 그렇다니까요. 얼굴만 보면 3천원이 생각나요.”

“앞으로도 얼굴만 보면 때릴 거란 말이지?

“예!”

“그럼 만약에 돈을 안 갚으면 언제까지라도 �아 다니며 때릴래?”

동훈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금도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듯 말합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아 다닐 거예요. 그때까지만 때릴 거예요.”

“그것 참 큰일이로구나. 현화와 현정이 얼굴만 보면 3천원이 생각나고, 중학교 때까지는 때려야겠고……. 이걸 어쩐다?”

김 선생은 세 아이의 얼굴을 다시 천천히 훑어봤습니다.

동훈이는 여전히 당당한 얼굴입니다. 내가 꿔준 돈을 받겠다는데 뭐가 잘못한 얼굴이냐는 표정입니다.

현화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동훈이를 만날 때마다 맞아야 하고, 이제 선생님께 꾸중까지 들을 일로 얼굴에 걱정이 가득합니다.

현정이는 언니인 현화를 위해서 자기가 대신 돈을 갚겠다고 한 일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갚을 돈이 없습니다. 더 이상 동훈이에게 맞기도 싫습니다. 어떻게든 선생님이 해결을 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과 믿음이 눈빛에 가득합니다.

“좋아. 그럼 이제 해결을 해보자. 동훈아! 내가 대신 갚을 테니까, 얼마면 되겠느냐?”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동훈이의 입에서 시원스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5백원만 주세요.”

“그래, 5백원이라. 그거 주면 현정이와 현화를 다시는 때리지 않겠지?”

“예!”

“좋아, 그렇게 하자.”

김 선생은 호주머니를 뒤집니다. 그런데 아이구, 이걸 어쩌나? 동전이 3백 원뿐입니다.

이번엔 지갑을 열어봅니다.

‘아니 오늘 사 말고 돈들이 다 어디로 갔지?’

다행입니다. 지갑에 천 원짜리 한 장이 보입니다.

“자, 내가 5백 원을 더 보태겠다. 이거 천원이다. 분명히 갚았다.”

김 선생이 동훈이 호주머니에 천원을 넣어줍니다. 손바닥으로 호주머니를 두 번 탁탁 치며말 합니다.

“가서 이 돈으로 맛있는 걸 사먹던지, 어쩌던지 이제 네 맘이다. 그런데 또 혹시라도 현화와 현정이 얼굴 보면 3천원이 생각날지 모르니까, 너부터 먼저 저쪽 문으로 나가거라.”

“예, 선생님!”

동훈이가 인사를 꾸벅하고 만족스런 웃음을 띠며 교실을 나갑니다. 김 선생은 다시 현화와 현정이에게 말합니다.

“현화야? 너 동생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앞으로도 이런 일 있어야겠냐?”

현화가 개미 소리로 대답합니다.

“부끄러워요.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좋아. 그리고 현정이! 너도 앞으로는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언니를 위해 대신 돈을 갚겠다고 말한 건 참으로 기특하구나. 그리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선생님에게 말한 것도 잘 한 일이다. 앞으로도 누가 때리거나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꼭 선생님께 얘길 해야 한다. 알았지? 현화 너도 그래야 하고.”

“예!”

“그럼 이만 가 보거라.”

인사를 꾸벅하고 현화와 현정이가 밖으로 나갑니다.

그새 30분이 또 지나갔습니다. 시계를 보니 5시입니다.

비도 그친 듯합니다. 검은 구름틈새로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또르르 구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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