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동화

노 프로블럼

운당 2007. 10. 26. 10:10
<동화>

노 프로블럼(No problem)

김목


영우와 은희는 짝꿍이다. 이름만 들어도 짐작이 되듯 영우는 사내애고 은희는 여자애다.

물론 이름만 보고 남녀를 구별하는 건 문제가 있다. 영우가 여자 이름일 수도 있고, 은희가 남자 이름일 수도 있다. 영우의 별명은 꽃돼지이고 은희의 별명은 새우깡이다. 그러니까 별명만 가지고 남녀 구별을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짝꿍이라고 하면 조금 다정한 짝이 떠오르지만 둘이는 영 아니다. 하루에 몇 번 쯤이나 다투고 싸우는지는 말 그대로 손가락으로 세어봐야 안다.

둘은 금세 다투고, 머리 맞대고 공부하고 그러다 싸우고 그런다. 5학년이니까 하루 여섯 시간이 기본이다. 한 시간에 한 번만 싸워도 하루에 여섯 번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알아서 짐작해 보시라.

영우와 은희는 강마을분교장 5학년 1반이다. 반이 하나뿐이어서 굳이 몇 반인지 말할 필요가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5학년 1반의 학생은 딱 두 사람이다. 그러니까 영우와 은희가 그 5학년 1반의 두 사람 뿐인 학생이라는 말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두 사람 뿐인 건 아니었다. 1학년 입학할 때만 해도 12명이 입학을 했다. 그러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한 사람, 두 사람 전학을 가고 5학년이 되자 둘만 남았다. 그러면서 학교도 강마을 초등학교에서 강마을 분교장으로 바뀌었다.

학교 이름이 바뀐 건 아무 것도 아니다. 이제 곧 학교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한다. 학교가 없어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없어질 때 없어지더라도, 누구하나 걱정하는 아이는 없다.

걱정하는 것은 어른들 뿐이다. 학교를 없애려고 걱정하는 사람도 어른들이고, 없어질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어른들이다.

“야, 새우깡!”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꽃돼지가 먼저 시비를 건다.

“왜? 이 꽃돼지야.”

“너너너너…, 여, 영어 수, 수, 숙제했어? 다, 다 외웠냐?”

꽃돼지는 말을 더듬는다. 마음이 급하면 더 더듬는다. 말이 얼른 안 나오자, 얼굴이 벌게지면서 뒷말을 잇는다.

“안했다. 왜? 이 말더듬이 꽃돼지야!”

“이, 이, 이 새우깡! 너, 말, 다, 해, 해해해했냐?”

“니가 무슨 상관이야?”

“나, 나, 나는 너, 너어를 생각해서 그 그러는데….”

“누가 너보고 생각하라고 그랬냐? 너나 잘해 임마.”

“임마라니? 이 써어어어….”

진짜 화가 난 벌게진 얼굴을 하며 영우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글놈아!”

이에 질세라 은희도 자리에서 일어나 꽥 소리를 지른다. 그러니까 두 아이의 말을 합치면 ‘이 썩을 놈아!’라는 욕이다.

“야, 너희들 조용히 못 해?”

이번엔 교실 뒤쪽에서 큰 소리가 들린다. 한 학년 위인 6학년 청수다.

아참, 깜빡 소개가 늦었다. 여기 강마을 분교장은 5, 6학년이 한 반이다. 교실을 두 개로 나누어 한쪽은 5학년, 또 한쪽은 6학년이다. 그래서 칠판이 앞뒤로 두 개다. 교실은 하나지만 앞쪽 칠판은 5학년 것이고, 뒤쪽 칠판은 6학년 것이다.

“여긴 안 보이지만 벽이 있다고 생각해라. 서로 오고갈 땐 ‘똑똑!’ 노크를 하고 다녀야 한다.”

물론 그렇게 5, 6학년 사이에 벽은 없다. 하지만 벽이 있다 생각하고 지내라고 선생님이 말씀 하셨다.

그래서 5학년이 6학년 쪽으로 갈려면 ‘똑똑’ 아무 것도 없는 공중에다 노크를 했다. 하지만 한 학년 높다고 6학년은 그냥 아무 말 없이 5학년 쪽으로 넘어왔다. 그래서 가끔 그 문제로 서로 다툼이 일기도 했다. 5학년 영우가 이따금 항의를 했다.

“어, 어, 어째서 우리보고만 노, 노, 노크하라고 하, 하는가?”

“노크를 하는 게 예의야. 모름지기 학생은 예의를 지킬 줄 알아야 해.”

“그, 그, 그러면 어, 어째서 혀, 형하고 누, 누나들은 노, 노크도 아, 안하고 너, 넘어오는가?”

“너, 지금 선배를 뭘로 알고 그런 말 하지? 입에서 침 튀어오는데, 조용히 못해!”

1년 선배지만 그래도 6학년이다. 두 눈 부라리며 ‘조용히 못해!’ 에다 힘을 콱 주면 그만 쏙 들어가고 만다. 더욱이 6학년이 5명이어서 숫자로도 강세다.

아무튼 영우와 은희가 삿대질을 하며 다투자, 청수가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꽥 지른다.

“야, 나나나, 나아는 너 생각해서 그, 그러는데 진짜 너 마아알 다해해했냐?”

이번에 큰 소리가 아니고, 목소릴 낮춰 작은 소리로 영우가 핏대를 올린다.

“그러니까 언제 너 보고 날 생각하라고 했냐고? 이 말더듬이 꽃돼지야!”

은희도 한 마디를 지지 않는다.

“야, 너, 너, 너 같은 걸 내, 내내가 어, 언제 생각해? 보, 보기만 해도 지, 징그러운데….”

“정말 느그들 계속 시끄럽게 할래. 그러잖아도 영어 단어가 안 외워져서 미치겠는데.”

6학년 청수가 다시 소리를 꽥 지른다.

“야,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럽냐?”

그 때 6학년 성실이가 교실로 들어온다.

“저것들이 또 시끄럽게 싸우고 있냐. 그러잖아도 영어 단어 안 외워져서 미치겠는데.”

“그러니까 집에서 영어 숙제를 해와야지. 맨 날 학교에 와서 할려고 하니까 그러지.”

공부를 제일 잘하는 성실이가 한 마디 하고는 5학년 쪽으로 간다.

“야, 새우깡, 꽃돼지! 시끄럽게 하면 가만 안 둔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단단히 주의를 준다. 5학년이고 6학년이고 성실이에겐 꼼짝 못한다.

이치가 정연하고, 사리에 맞는 말만 하니까,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성실이의 조리 정연한 말에는 ‘그래, 네 말이 맞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저것들 또 사랑 싸움이대?”

이번엔 6학년 금지가 들어오며 한 마디 한다.

“영어 단어 안 외워지는데 저것들이 시끄럽게 해서 미치겠다니까. 그런데 금지야! 너는 영어 단어 다 외워왔냐?”

“미쳤냐? 그걸 다 외워오게. 지금부터 외우면 돼지. 그런데 왜 우리 선생님 그렇게 까다롭냐? 대충 넘어가면 안 되냐? 졸업도 얼마 안 남았는데.”

금지는 신경질이 난다는 듯 가방에서 책을 꺼내 책상 위에 내팽개치듯 올려놓는다.

“우리 선생님, 그 미국 놈들 이쁘지도 않다면서 왜 이렇게 영어는 징그럽게 외우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너무 까다롭단 말야.”

“우리 오늘은 다 하지 말아불까?”

“야, 잔소리들 말고 빨리 외우기나 해. 미국이 이뻐서 영어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영어를 알아야 미국을 이길 수 있다고 하셨잖아? 그러나 저러나, 야, 새우깡! 꽃돼지! 너희들도 영어는 다 외웠냐?”

“아니!”

성실이의 말에 새우깡과 꽃돼지는 고개를 흔든다.

“참, 너희들도 너무한다. 어제도 못 외워서 노 프로블럼(No ploblem)을 큰 소리로 백번이나 말하는 벌을 받았으면서.”

“그러게 말야.”

“그런데, 오늘도 정균이와 다정이는 지각인가 보다.”

“그러게 말야. 둘이 또 밤새 컴퓨터 오락 했나보다. 정말 큰일이야. 오늘도 지각하면 선생님께 또 꾸중들을 텐데.”

정균이는 할머니하고 산다. 정균이가 새벽 한 시, 두 시가 되도록 컴퓨터 오락을 해도 할머니는 나무라지를 못한다. 아버지, 어머니도 없이 사는 손자가 안쓰러워서 그런단다. 예전에 아들, 딸을 키울 땐 엄하게 꾸중도 하고, 때로는 회초리도 들었다. 그런데 손자에게는 그러지 못하고, 그냥 두고 보면서 혼자서 속만 끓인다.

아버지가 이따금 집에 온다는 다정이도 마찬가지다. 컴퓨터와 날을 새도 누구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다.

그런 날은 두 아이의 눈이 벌겋다. 하루 종일 멍한 얼굴이다.

“아주 하지 마라는 게 아니다. 하루에 한 시간만 해라.”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또 귀신처럼 어떻게 알아차리는지 모른다. 그런 날 아침이면 두 아이들은 선생님께 꾸중을 듣고, 다짐을 받고, 약속을 한다. 하지만 그 약속이 얼마가지를 못한다. 하루 이틀이면 끝이다. 마침내 컴퓨터 중독이 된 것이다.

‘이 나라의 밀어붙이기식 교육정책이 아이들을 잡는구나. 컴퓨터만 있으면 교육이 살고, 세계화, 정보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게 교육은 물론 세상일까지 모두 다 해결될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더니. 쯧쯧쯔! 컴퓨터가 아이들 잡는 요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선생님은 정균이와 다정이를 나무라고는 혼자서 혀를 끌끌 차곤 했다.

“야, 그런데 왜 오늘은 선생님도 안 오시냐?”

시계를 보니 시각이 9시가 다 되어간다. 다른 때 같으면 8시도 못 되어 오시는 선생님이다.

“무슨 사고일까?”

어제 학교 교문 앞 구부러진 길에서 교통사고가 났다. 승용차가 과속을 하다 미처 구부러진 길을 견디지 못했다. 그냥 돌진을 해서 가로수를 들이 받았다. 그런 다음 개울로 곤두박질을 쳤는데, 운전자가 겨우 목숨을 건지는 끔찍한 사고였다.

그렇게 학교 앞 교문의 구부러진 도로는 언제나 마음을 졸이는 위험한 곳이다. 지난봄에도 1학년 선호가 길을 건너다 자동차에 치이는 사고가 있었다.

“글쎄? 이상하다. 이렇게 늦은 날이 없었는데.”

아이들은 갑작스레 걱정이 되었다.

“곧 오시겠지. 그러니 얼른 영어 단어나 다 외워라.”

“까다로운 우리 선생님! 제발 교통사고 없이 오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금지가 기도를 하듯 그렇게 말한다.

“오브 코-르스! 오 에프 시오유알에스이(Of course)"

"슈어! 에스유알이(Sure)"

"노 프로블럼! 엔오 피엘오비엘이엠(No ploblem)"

금지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뜬금없이 영우와 은희의 입에서 영어가 부드럽게 술술 나온다.

“야, 웬일이냐? 너희들 발음 좋다.”

“누 누우나, 가, 가, 갑자기 영어가 술술 나오네. 이상하아네.”

“나도 그래. 어제는 백번이나 외워도 잘 안 됐는데.”

영우와 은희가 좋아서 입이 귀 밑까지 찢어진다.

“야, 오늘은 너희들 웬 일이냐? 사운드스 굳! 엑설런트(Sounds good! Excllent)다.”

그때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들어오신다.

“금지 언니가 기도를 해서 그래요. 기도 끝나자마자 영어가 술술 나와요. 노 프로블럼, 슈어, 오브 코-르스!(No problem, Sure, Of course) 잘하지요? 선생님!”

“선생님! 저도 영어 다 외웠어요. 방금 저절로 외워졌어요. 들어보세요. 노 프로블럼, 슈어, 오브 코-르스!(No problem, Sure, Of course) 잘 하지요?”

“그래, 잘한다. 그리고 참 신통방통이다. 영우가 말도 안 더듬고.”

“다 금지 누나의 기도 덕분이예요.”

“그래, 금지가 무슨 기도를 했는데?”

“선생님은 몰라도 돼요.”

“그러고 보니 알겠다. 뻔하구나. 선생님 까다롭게 하지 말라고 기도했겠지 뭐?”

“그래도 영어가 술술 나오니 잘 됐지 뭐예요?”

“그래 맞다. 노 프로블럼!(No problem)"

그 때 영균이와 다희가 교실로 들어온다.

“저 컴 안했어요. 영어 단어 외워 오느라 좀 늦었어요.”

“저도 그래요. 영어 단어 외워 볼게요.”

영균이와 다희의 눈동자가 맑다. 컴퓨터 오락으로 날을 샌 얼굴이 아니다.

“그래, 좋아! 숙제 검사 한다. 그러니까 모두들 노 프로블럼(No problem)?”

“오브 코-르스(Of course)!”

선생님이 자리에 앉자, 아이들이 다가와 빙 둘러 싼다.

강마을 분교장 5, 6학년 교실에서 어느 날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 아이들 단어장 살펴보기

노 프로블럼 (No problem) 문제없어, 괜찮아

슈어 (Sure)틀림없어

오브 코르-스 (Of course) 물론, 당연히

사운드스 굳 (Sounds good) 좋아, 멋진 생각

엑설런-트 (Excellent) 우수한, 아주 훌륭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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