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동화

그건 비밀이야

운당 2007. 11. 26. 11:35

<동화>

그건, 비밀이야

김 목


“사내 녀석은 모름지기 강해야 해. 알았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아버지의 그 말과 함께 모래주머니가 지환이의 발에 채워졌습니다.

“자, 발차기다. 이얍!”

아버지의 발이 재빠르게 다가오더니 지환이의 정강이를 걷어찹니다. 그 발에 걸려 지환이는 저만큼 나뒹굴었습니다. 콧속으로 풀냄새, 흙냄새가 확 들어옵니다.

욱신욱신 다리가 절립니다. 금세 눈물이 쏘옥 쏟아지려 합니다.

“사내 녀석은 모름지기 강해야 해. 그러니까 남자는?”

“우, 울지 않는다.”

그러지만 지환이의 눈에 눈물방울이 대롱대롱 달립니다. 금방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습니다.

“사내 녀석이 저렇게 약해서야. 누굴 닮았냐? 자, 어서 일어 나!”

지환이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찹니다.

이번엔 지환이가 이를 앙다물고 아버지의 다리를 걷어찹니다. 하지만 번번이 땅바닥을 구르는 건 지환이입니다.

그렇게 그날도 지환이는 삼십분 넘게 아버지의 발길에 채여 이리 구르고 저리 굴렀습니다.

지환이 아버지는 태권도 도장을 운영합니다. 날마다 지환이에게 특별훈련을 시킵니다.

지환이는 그 태권도가 싫습니다. ‘사내 녀석은 모름지기 강해야한다’ 라는 말도 싫습니다. 왜 남자는 울면 안 됩니까? ‘남자는 울지 않는다.’ 라는  말도 정말 듣기 싫습니다.

아플 땐 실컷 울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도 머리가 아플 때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나니, 어느새 아픈 게 나았습니다.

그 생각을 하며 지환이는 수돗가로 갑니다. 태권도복을 벗어서 아무렇게나 휙 던져버리고, 팬티까지도 홀랑 벗습니다. 바가지로 물을 잔뜩 떠서는 머리 위로 부어 제킵니다.

그 때 여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야, 꼬마! 안녕!”

얼마 전에 새로 이사를 온 이웃집 누나입니다. 담장 위로 올라온 얼굴이 생글생글 웃고 있습니다.

지환이는 얼른 두 손으로 고추를 가립니다.

“야, 꼬마! 괜찮아. 사내 녀석은 모름지기 부끄러운 줄도 몰라야 해.”

누나가 아버지 말투를 흉내 냅니다.

“에이! 비겁하게 훔쳐보는 거야?”

지환이가 바가지에 물을 가득 떠서 휙 뿌립니다.

“이크크크!”

하얀 물줄기가 날아가면서, 누나의 얼굴은 번개처럼 담장에서 사라집니다.

하지만 빙글빙글 웃는 누나 얼굴이 다시 담장 위로 쏘옥 올라옵니다.

“미안 해. 그냥 우연히 본 거야. 빨리 씻으렴. 과자 줄게.”

방싯방싯 웃는 얼굴이 다시 담장 아래로 사라집니다.

잠시 뒤입니다. 지환이와 누나는 담장을 사이에 두고 얘길 나눕니다.

“애, 이 과자 먹어. 그런데 네 눈동자가 마치 산머루알처럼 새카맣구나. 몇 학년이냐? 일학년?”

“응!”

지환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 한 개를 보여줍니다.

“난, 금년 봄에 대학을 마쳤다. 그럼 일곱 살?”

“응!”

이번에는 손가락 일곱 개를 펼쳐 보입니다.

“난, 스물세 살이야. 이름은?”

“지환이.”

“난 혜진이야. 참, 나도 말야. 어릴 적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 있어.”

“무슨 말인데?”

“모름지기 여자도 강해야 한다. 결코 울어선 안 된다. 자, 아버지의 검을 받아라!”

누나는 손을 쑥 뻗어 칼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습니다.

“검?”

“응, 우리 아버진 검도 도장을 운영했어. 날마다 내게 검도를 가르쳤지.”

“누난 검도가 좋았어?”

“좋았냐고?”

누나는 대답 대신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목검을 가져왔습니다. 마당 가운데에 서더니 두 손으로 칼을 움켜쥐었습니다.  이마 앞으로 우뚝 세우더니, 이내 왼쪽으로 비스듬히 늘어뜨렸습니다. 다시 칼끝이 날카롭게 위로 솟구쳤습니다. 그렇게 하늘을 가르고 베고 찌르면서 누나는 마당을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한바탕 휙휙 칼바람을 일으키더니, 가쁜 숨을 내쉬며 다시 담장 옆으로 왔습니다.

“나도 검도가 싫었어. 하지만 살아오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어.”

“응, 그랬구나. 검 휘두르는 누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

“그래? 난 네가 아버지의 발길에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참 보기 좋던데.”

“놀릴 거야?”

“아냐, 나도 아버지의 칼끝을 피하지 못해 땅바닥을 얼마나 굴렀다고. 그렇게 땅바닥을 구른 덕에 얻은 칼솜씨야.”

“아무튼 난 태권도가 싫어.”

“그럼 뭐가 좋은데?”

“그냥 놀고 싶어.”

“그래, 실컷 놀아야지. 놀고 싶으면 언제든 내가 놀아줄게.”

“누난 뭐하는데?”

“나? 뭐하는지 보여줄까?”

누나가 저만큼 세워져 있는 이젤을 가리켰습니다.

“저기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널 봤지. 난 맨 날 그림이나 그리고 논단다.”

“와! 누난 화가구나.”

“화가? 네가 그렇게 불러주니까 기분 좋구나. 그래, 난 화가야. 그림쟁이지.”

“누나! 난 그림 잘 못 그려. 하지만 누나랑 그림 그려도 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 그리고 싶으면 언제든 와.”

“알았어. 그럴게.”

지환이는 혜진이가 좋아졌습니다. 놀러 가서 그림을 그려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다음 날입니다.

혜진이는 그림 도구를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담장 곁으로 갔습니다.

오늘은 조용합니다. 지환이 태권도 배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넘겨다보니 지환이가 기다란 나무의자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멀리서 봐도 기분이 안 좋은지 시무룩한 얼굴입니다.

“무슨 일 있어?”

기다렸다는 듯 지환이가 반가운 얼굴을 합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시무룩한 표정이 됩니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입니다.

초롱초롱 머루 알처럼 새카만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것만 같습니다. 가만 보니 두 손바닥을 슬슬 마주 비비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그 손바닥을 들어서 보여줍니다. 살펴보니 손바닥에 시퍼런 게 묻어있습니다.

“손바닥에 묻은 게 뭐야? 공부하다 연필심가루 묻혔어?”

“…….”

대답대신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그럼, 그림 그리다 물감이 묻은 거야?”

이번에도 고개를 옆으로 흔듭니다.

고개를 갸웃대다 무슨 생각이 번쩍 납니다. 손바닥이 시퍼렇게 멍이든 듯싶습니다.

“너 잘못해서 맞았구나.”

이번에는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입니다.

“무슨 잘못 했는데?”

“그건 비밀이야”

뾰로통한 얼굴로 퉁명스레 대답합니다.

사실은 어제 오후에 어머니의 지갑에서 돈 만원을 꺼냈습니다. 종민, 영철, 상구에게 이천 원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대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서 군것질한 걸 이르겠다는 누나를 두 번이나 발로 찼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맞았습니다. 그걸 어떻게 밝힌단 말입니까?

“얼마나 아프냐? 이리와 내가 약 발라줄게.”

혜진이는 약을 꺼내와 지환이의 손에 발라 줍니다.

“누나 지금 그림 그리려 가는데 함께 갈련?”

“나, 학원가야 해. 그러지 않으면 또 맞아.”

지환이는 손을 호호 불며 빙글 돌아섭니다. 아마 누나에게 시퍼렇게 멍든 손을 보여주려고 기다렸나 봅니다.

“아무리 잘못했다고 저렇게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때리냐?”

혜진이는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어릴 적 매를 맞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아이들은 공부를 잘하거나, 군것질을 시켜주는 친구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혜진이는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의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몰래 가지고 나갔습니다. 아이들에게 군것질을 시켜주었습니다. 그 날은 아이들과 어울려서 대장 노릇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도 또 만 원짜리 한 장을 훔쳤습니다. 그 날도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놀았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날은 들키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에게 손바닥이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맞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문득 그 생각을 떠올리며 그림 도구를 실은 자전거를 끌고 혜진이는 밖으로 나왔습니다.

뜻밖에도 지환이가 자전거를 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니, 넌 학원 간다고 했잖아?”

“아빠, 출장 가셨어. 오늘 하루 빼먹을래. 누나랑 그림 그릴래.”

“좋아! 그림 공부도 좋은 공부지. 그리고 나처럼 훌륭한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 암 그렇고 말고. 자, 그럼 출발!”

그림도구가 한 짐 실린 혜진이의 자전거와 지환이의 작은 자전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람을 가릅니다. 둘이는 금세 시내를 벗어나 커다란 저수지를 휘돌며 언덕길을 오릅니다.

“자, 여기야. 참 경치 좋지?”

둘이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 등성이로 올라섰습니다. 한참을 함께 달려온 저수지가 저만큼 발아래에 있습니다. 봄이면 벚꽃이 아름다운 팔각정도 보입니다.

“누나, 뭘 그릴까?”

“으음, 눈에 보이는 것, 그래, 보이지 않는 걸 그려도 돼. 네 맘속을 네 맘 내키는 대로 그려봐.”

한동안 둘이는 말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뭘 그렸지?”

그만 싫증이 나는데, 혜진이가 말을 겁니다. 등 뒤에 서있습니다.

“응, 이거 비행기야. 내가 조종하고 있어. 난 에어쇼를 하는 비행사가 될 거야.”

비행기 한 대가 그려져 있고 큰 창문에 조종간을 잡은 사람이 자기랍니다.

“그런데 비행기 밑에서 비행기를 올려다보는 이 작은 사람은 누구지.”

“우리 아빠야. 아무리 태권도를 잘해도 나처럼 하늘을 날 수는 없어. 그래서 부러워서 쳐다보는 거야.”

“그런데 말야. 이렇게 멋진 에어쇼를 하는데 너무 조용하다.”

“그래, 맞아. 잠깐만 기다려 봐.”

지환이가 다시 크레파스를 쥐고 쓱쓱 더 그립니다.

“여긴 관중석이야.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엄마야. 우리 엄마는 직장에 다니기 때문에 날마다 바빠. 하지만 이 날은 특별 휴가를 내고 나온 거야.”

“지환이에게 누나도 있다고 했지?”

“그래, 알았어. 잠깐만 더 기다려봐.”

지환이가 다시 쓱쓱 그림에 덧붙입니다.

“누나를 발로 차서 울게 했거든. 미안해서 내 뒷자리에 태운 거야.”

지환이는 비행기에 창문을 하나 더 내더니, 그곳에 누나를 그렸습니다.

“난 그 속에 들어갈 수 없냐?”

지환이의 눈빛이 환해집니다. 두 볼에 배시시 웃음이 번집니다. 왜 그 생각을 미처 못 했을까? 하는 표정입니다.

“이 비행기 이름이 혜진이야. 이 비행기 누나 거야.”

지환이는 비행기 머리 쪽에 ‘혜진’이라고 이름을 써넣었습니다.

“야, 신난다.”

혜진이는 아이처럼 깡충깡충 뛰었습니다. 두 손을 펴면 비행기처럼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때입니다. 언제 몰려왔는지 하늘이 시커멓습니다. 후두둑, 후두둑 소리가 나더니, 세상이 온통 빗속입니다.

“애, 빨리 이쪽으로 와.”

그림도구를 치우는 둥, 마는 둥 주섬주섬 챙겼습니다. 두 사람은 비바람을 피해 소나무 뒤쪽으로 숨었습니다. 해 가리개로 가져온 우산 속에 웅크리고 앉아 소나기를 피했습니다.

“우르릉 쾅!”

번쩍번쩍 번개가 하늘을 갈랐습니다. 뒤이어 천둥이 산골짜기를 흔들었습니다.

“무섭지?”

우산 속에서 혜진이가 지환이를 꼭 껴안아주었습니다.

“누나가 꼭 엄마 같네.”

“뭐라고?”

엄마라는 말이 싫지는 않았지만, 스물 세 살짜리를 엄마라고 하다니 말이 됩니까? 일부러 화난 척 두 눈을 둥그렇게 뜨며 힘을 주니까, 얼른 말을 바꿔줍니다.

“으응! 그러니까 얼굴이 아니고, 그냥 냄새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고, 영리합니다.

금세 비는 그쳤습니다.

“헤에, 물에 빠진 생쥐네.”

숨이 막힐 듯 했지만, 향긋하고 따뜻한 누나에게 더 안겨있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비가 갰습니다.

“누나, 나 무지개 잡으러 갈래.”

“무지개?”

“봐, 저기 무지개 떴잖아.”

“정말!”

“기다려. 누나, 무지개 잡아다 줄게.”

지환이는 무지개 속으로 깡충깡충 뛰어갔습니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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