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살구꽃 벌어지네
김 목
봄 가뭄입니다.
하늘이 누렇습니다. 그 누우런 하늘에 부우연 바람이 불어가면 숨이 탁탁 막힙니다. 꽤 오래 물맛을 못 봤습니다. 삐질삐질 마른 흙이 부석부석 일어나 불어가는 바람에 먼지가 됩니다.
“��! 아니, 무슨 날씨가 이래요? 쿨럭쿨럭!”
몽실몽실 봉오리를 벌리며 연분홍꽃잎이 비죽이 비저 나오는 진달래가 기침을 해댑니다.
“그러게 말이오. 지금쯤 아지랑이가 아롱거려야 하는데, 누우런 먼지바람이라니….”
뾰족한 새 잎을 앙증맞게 펼치는 멍석딸기의 목소리에도 먼지가 잔뜩 묻어있습니다.
“그래도 우린 다행이요. 어제 저쪽 건너 산에서 일어난 산불 안 봤소? 삽시간에 시커멓게 변해버린 산등성이를 좀 보라고요?”
아기가 손가락을 쥐엄쥐엄 하는 것 같습니다. 큰 키를 쑤욱 빼며 녹색꽃송이를 주렁주렁 흔드는 오리나무의 목소리도 갈라진 쇳소리입니다.
“그것 참 신통하네요. 그동안 어디 숨어있다 다시 나오는 거지요?”
호수와 가장 가까운 언덕바지를 가시울타리로 칭칭 둘러친 찔레가 맨 살을 드러낸 호숫가를 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흔듭니다.
삼십 년도 더된 오래 전의 일입니다.
땅을 웅큼웅큼 파헤치는 포클레인, 흙덩이를 쓱쓱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불도저가 이곳 산골짜기에 들이닥쳤습니다. 뒤이어 커다란 덤프트럭이 꼬리를 물고 달려 다니며 흙을 실어 날랐습니다. 그 흙은 금세 기다랗고 높은 둑이 되었습니다.
그 둑은 산과 산 사이 너른 논밭 사이로 흐르는 강물을 막았습니다. 이내 논밭과 강은 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널따란 호수가 되었습니다. 마을도, 길도, 논밭도 그 호수 속에 잠겼습니다.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사람들은 논밭을 떠났습니다. 철따라 논밭을 가득 채우던 곡식들도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봄 가뭄이 너무 심합니다. 호수 물은 날마다 쑥쑥 줄어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잊고 있었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호수 물에 잠겼던 예전의 마을 터가 보이더니 논밭이 나오고, 옛길도 드러났습니다.
아, 그리고 이게 웬 일입니까? 맨 살을 드러낸 진흙땅에 쏘옥쏘옥 돋아난 새파란 쑥이 보입니다. 새움을 틔운 냉이도 보이고, 달래도 보입니다.
“저 애들이 어디 숨어 있다가 다시 나온 걸까요?”
초여름에 향기로운 하얀 꽃을 가득 피워낼 찔레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진달래, 멍석딸기, 오리나무도 그 진흙땅의 새 움이 신기한 듯 내려다봅니다.
“정말 그러네요. 모처럼 논밭에 새움이 돋았네요.”
“저 논밭은 수십, 수백 년 동안 곡식을 키웠었잖아요? 그동안 물속에 갇혀서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그러니까 맨살이 드러나기 바쁘게 쑥이랑, 달래, 냉이를 불러들였겠지요. 얼마나 새 생명을 키우고 싶었으면 그랬겠어요?”
“그래, 맞아요. 그리고 정말 신통해요. 이 봄 가뭄에 저렇게 새싹을 키웠으니….”
“그러게 말이요. 저 논밭을 위해서는 쑥이랑, 달래, 냉이가 다 자랄 때까지 가뭄이 계속되어야겠어요. 안 그래요? 논밭님?”
찔레는 논밭과 가장 가까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논밭이 물속에 잠겨 있어서 그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찔레는 가뭄이 오래 계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논밭은 손사래를 쳤습니다.
“아니어요. 그건 안 돼요. 나야 좋지만, 그래서야 되나요? 나야 오랜만에 쑥이랑, 달래, 냉이를 키워서 소원풀이 했으니 이제 됐어요. 비가 와야 농사를 짓지요.”
“그건 그래요. 이대로 가면 올 한 해 농사를 망치고 말거예요.”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비가 오고 농사를 지어야 사람들이 먹고 살지요.”
호숫가 나무 식구들이 논밭하고 그렇게 말을 주고받을 때입니다.
“아니 저게 누구야?”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에 살구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아기 젖꼭지 같은 꽃봉오리가 금방 터져 나올 듯합니다. 그 살구나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습니다.
“누구? 누구 말이어요?”
모두들 살구나무가 바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등산 모자를 눌러쓴 남자와 여자 어른, 그리고 열 살 쯤 되어 보이는 사내 아이 입니다. 세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살구나무님! 저 사람들 아세요?”
“그럼요, 저 아이는 여기 살던 개동이지요? 바로 저기 집터에서 살았어요.”
“개동이요?”
“그렇다니까요. 여기에 물이 차오르면서 마을을 떠날 때였지요. 저 개동이가 자꾸만 뒤돌아보며 엉엉! 소리 내어 울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지요.”
“그래요. 그 말을 들으니 나도 기억이 나요. 개동이가 맞네요.”
나이가 많은 오리나무도 옛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개동이 집은 여기 산기슭에서 가장 가까운 집이었지요. 그래서 개동이는 날마다 내게 놀러왔어요. 주렁주렁 열매를 누렇게 익혀놓으면 얼굴을 찡그리며 베어 먹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바로 엊그제 일만 같아요.”
“그래, 맞아요. 살구나무는 그 때 이 마을 아이들에게 제일 인기가 있었어요.”
이번에도 오리나무가 살구나무의 말에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런데, 누가 개동이지요?”
가까이 다가온 남자 어른과 아이를 보고 오리나무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남자 어른의 모습과 아이의 얼굴이 너무 똑 같았습니다.
“그 때 개동이의 모습이라면 저 아이가 딱인데….”
“우리도 작은 나무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됐잖아요? 개동이도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거예요. 저 어른이 개동일 거예요.”
“그래, 맞아요. 개동이처럼 생긴 저 아이는 개동이의 아들일 거예요.”
오리나무와 살구나무가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입니다.
“아빠! 여기 이 나무여요?”
“그래, 여기다. 이 살구나무다.”
“살구꽃이 곧 피겠네요.”
세 사람은 살구나무 그늘로 들어왔습니다.
“살구나무야! 나 개동이야. 날마다 너랑 놀았잖아. 네가 익으면 널 맛있게 따먹었던 개동이야.”
아빠라고 불린 사람이 살구나무 등을 툭 쳤습니다.
이제 확실해졌습니다. 누가 그 옛날 개동이인지 분명해졌습니다.
“내가 꼭 너 만큼이었을 때다. 그 때도 봄이면 이 살구나무는 분홍꽃을 가지가지마다 가득 피웠지. 정말 아름다웠어.”
이제 어른이 된 개동이는 살구나무를 올려다봅니다.
눈앞에 분홍꽃을 활짝 피운 꽃구름 한 덩이가 보입니다. 그 꽃구름이 걷히면서 주렁주렁 콩알만한 살구열매가 보입니다. 그 살구가 살이 토실토실 찌며 누우렇게 익어갑니다.
손을 뻗어 잘 익은 살구를 땁니다. 조심스레 살구를 두 손으로 잡고 양손에 힘을 줍니다. 살구는 누우런 속살을 보이며 쩌억 갈라집니다. 입 안 가득 침이 고입니다. 달콤새콤한 살구 맛이 혀끝에 느껴집니다.
그 때입니다. 아지랑이처럼 아른아른 메아리가 들려옵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개동이가 물에 빠졌어요!”
아이들의 숨 넘어 가는 다급한 목소리가 골짜기를 울립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개동이가 물에 빠졌다고 질러대는 소리입니다.
산밭을 매던 개동이 어머니가 호미를 던져버리고 달려옵니다. 못자리판을 돌보던 개동이 아버지도 삽자루를 던져버리고 달려옵니다. 장에 다녀오던 순옥이 할머니도 달려오느라 신발이 벗겨졌습니다. 소를 끌고 밭갈이를 하던 이웃집 수돌 아저씨도 쟁기를 버리고 헐레벌떡 달려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는 누렁황소만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잠시 쉽니다.
강물에 빠진 개동이가 물살 따라 둥둥 떠내려 옵니다.
조금 전의 일입니다. 개동이는 아이들과 함께 잘 익은 살구를 땄습니다. 호주머니에 잔뜩 집어넣었습니다.
이번에는 강에서 고기를 잡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은 강 위쪽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은 강둑길 따라 모래밭이 펼쳐진 낮은 물가입니다. 아이들은 강물이 무릎까지만 차는 풀숲을 두 손으로 더듬어 붕어며 메기를 잡습니다. 개동이도 허리를 굽혔습니다. 두 손으로 물풀 숲을 더듬었습니다.
그 때 개동이의 호주머니에서 살구가 삐죽이 빠져나왔습니다.
살구는 둥둥 강물을 타고 떠내려갔습니다. 잠시 허리를 펴다가 개동이는 저만큼 떠내려가는 살구를 보았습니다.
“어, 어, 내 살구!”
개동이는 성큼성큼 살구를 따라갔습니다.
“어어, 거기 멈춰!”
살구는 손에 잡힐 듯 말듯 손끝을 간지럽힙니다. 물이 허리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래도 개동이는 휘적휘적 살구를 뒤쫓습니다.
철버덩! 철버덩! 물을 튀기는 소리가 났습니다. 개동이가 두 손으로 물을 쳐대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동시에 들렸습니다.
발을 헛디딘 것입니다. 개동이는 세찬 물살에 휩쓸려 금세 저만큼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사람 살려! 개동이가 물에 빠졌어요!”
깜짝 놀란 아이들이 강둑 위로 올라와 목청껏 소릴 질렀습니다.
모두들 허겁지겁 달려올 때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수돌 아저씨가 강둑을 냅다 달렸습니다. 떠내려가는 개동이보다 더 아래쪽으로 가더니, 이내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 들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살구나무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물에서 건져낸 개동이는 그 살구나무 밑에 눕혀졌습니다. 한참 뒤, 개동이는 물을 잔뜩 토해 내고 숨을 내쉬었습니다.
“정신이 드냐?”
눈을 뜨니 눈앞이 온통 누우런 살구열매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살구 열매 하나가 어머니의 얼굴로 바뀌었습니다. 이어서 또 한 개가 아버지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뒤이어서 살구 열매들은 순옥이 할머니, 수돌 아저씨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 속에 친구들의 얼굴도 있었습니다.
“나 살았어?”
“그래, 인석아!”
어머니가 와락 껴안으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렇게 지난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입니다.
“어머나, 여기 이 나물들 좀 봐요. 쑥도 너무 예뻐요. 우리 나물 캐요.”
“그래, 아빠. 우리 나물 캐요.”
꼭 개동이처럼 생긴 아들이 개동이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살구나무야! 순옥이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단다. 그리고 그 때 날 구해준 수돌이 아저씨도 지난해에 돌아가셨단다. 그래, 이번 봄에는 그 때 함께 놀았던 친구들을 찾아볼 생각이다. 연락이 되면 내년엔 그 친구들과 함께 널 찾아올게.’
아들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난 개동이는 살구나무를 힘껏 껴안아봅니다. 두 볼을 나무 등걸에 부벼봅니다.
“아빠, 어서 가. 엄마가 기다려.”
어른이 된 개동이와 꼭 빼닮은 작은 개동이가 맨 살을 드러낸 논밭 쪽으로 내려갑니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들을 보며 찔레, 멍석딸기, 진달래가 묻습니다.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오리나무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살구나무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투둑투둑 툭!’ 살구꽃이 벌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