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3000원
김 목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세요.
성훈이 그 녀석 참 나쁜 애거든요. 왜냐고요?
걸핏하면 날 툭툭 치고 달아난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내 뒤로 다가와서 머리카락을 힘껏 잡아채고 쥐처럼 도망치는 것입니다. 하마터면 뒤로 엉덩방아를 찧을 뻔 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거든요. 여기까지만 듣고도 그 성훈이 녀석, 나쁜 녀석 맞지요?
그리고 그냥 도망만 치는 것도 아니랍니다. 때리고 머리끄덩이를 잡아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나 봅니다.
“현정이는 바보래요! 말 더듬는 더듬이래요.”
노래 부르듯 큰 소리로 놀려대기까지 합니다.
화가 나서 �아가지만 나는 빨리 달리지도 못합니다. 뒤를 돌아보며 실실 웃으면서 도망치는 성훈이를 도무지 잡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너무 화가 난 나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날 때리고 골탕을 먹이는 녀석은 성훈이만이 아닙니다. 우리 반에만 해도 장수, 진주, 명철이 등 다섯 손가락을 다 펼쳐도 셀 수 없습니다.
“야! 이 말더듬아!”
학교 공부를 끝내고 나올 때입니다. 교문을 나오는데 성훈이가 날 부르며 가로 막았습니다.
“너, 이거 먹고 싶지? 줄까?”
성훈이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가, 그걸 내 코앞으로 내밀었습니다. 먹고는 싶었지만, 어떻게 남이 먹던 걸 먹습니까?
“아, 아 안머어!”(안 먹어!)
왜, 어째서 나는 말도 또록또록하게 못하는지 답답합니다. 그래서 ‘안 먹어’라는 말보다, 고개를 더 크게 절래절래 흔들어 주었습니다.
“먹고 싶으면서 뭘 그래? 그렇지? 이 말더듬아.”
성훈이는 아이스크림을 흔들어대며 계속 약을 올립니다. 마침 그 때 장수와 진주가 교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장수야! 진주야! 이리와. 내가 아이스크림 사줄게.”
성훈이가 장수와 진주를 데리고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나도 슬그머니 그 뒤를 따라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성훈이가 장수와 진주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었습니다.
나도 먹고 싶었지만, 사 먹을 돈이 없습니다. 성훈이가 사줄 리도 없습니다. 그래서 침만 꿀꺽 삼켰습니다.
“아저씨, 이 자동차 얼마예요?”
멋진 자동차입니다. 성훈이는 장난감 자동차도 샀습니다. 그 옆에 봉지에 넣어진 예쁜 인형이 눈에 띕니다. 나도 그걸 사고 싶습니다. 손이 자꾸만 빈 호주머니에 들어갑니다.
“아저씨, 이 인형 얼마예요?”
“응, 그거 이천 원이다.”
내가 점찍어 둔 인형을 진주가 삽니다. 나는 너무 부러워 또 한 번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이 말더듬아. 저리 비켜. 재수 없어.”
성훈이가 날 툭 치고 밖으로 나갑니다. 장수도 저리 비키라는 듯 눈을 흘깁니다. 진주도 이거 보라는 듯 자랑치는 얼굴로 인형을 안고 나갑니다.
“아, 아저이! 이 이거 어 어마여?”(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응, 이천 원이다.”
나는 부러운 눈으로 인형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돈이 없는 걸 어찌합니까?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머릿속에는 자꾸만 인형이 떠오릅니다. 입안에 군침이 돕니다.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습니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는 성훈이 모습이 떠오릅니다.
“나, 나아븐 녀서!”(나쁜 녀석!)
나도 모르게 성훈이에게 욕을 합니다. 빈 호주머니를 만져봅니다.
‘저녁에 아빠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지. 나도 인형을 살 거야. 아이스크림도 사먹을래.’
하지만 아빠가 돈을 주지 않으면 어쩌지? 어제처럼 오늘도 술 마시고 와서 엄마와 싸우면 어쩌지?
그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무거워집니다. 저절로 두 어깨가 축 처집니다. 집으로 오는 길이 별스레 멀기만 합니다.
‘서후이 나아븐 녀서!’(성훈이 나쁜 녀석)
그래서 성훈이에게 한 번 더 욕을 합니다. 욕을 하고 나니 맘이 조금 후련합니다.
그날 저녁입니다. 아버지는 또 술을 마시고 들어왔습니다. 술 마시고 왔다고 엄마랑 한바탕 또 말다툼을 합니다. 나는 무서워서 방 한쪽에 아무 말도 못하고 웅크리고 있습니다.
아빠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틀린 거 같습니다. 아빠는 이내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고 잠을 잡니다. 엄마는 아직도 잔뜩 화가 난 얼굴입니다.
이럴 때 용돈을 달라고 했다간 크게 꾸중을 들을 게 뻔합니다. 매까지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 생각을 하니 온 몸이 부르르 떨립니다. 나는 그대로 방 한쪽에서 잠이 듭니다.
다음 날 아침입니다. 나는 눈을 번쩍 떴습니다.
아직도 아빠 엄마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났습니다.
그 때 내 눈에 쏙 들어오는 것이 있습니다. 엄마의 손지갑입니다. 더욱이 그 손지갑이 비죽이 열려 있습니다.
갑자기 눈앞에 어제 보아 둔 이천 원짜리 인형이 보입니다. 아이스크림도 보입니다.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손지갑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콩닥콩닥 뜁니다. 그래서 얼른 손지갑 안으로 손을 넣어 종이 돈 한 장을 꺼냈습니다. 그런 다음 엄마 쪽을 쳐다보았습니다.
다행입니다. 아직 엄마는 자고 있습니다.
엄마에게 들키면 매를 맞을 것입니다. 나는 살그머니 방에서 나왔습니다. 신을 신었습니다.
집을 나와 학교 쪽으로 걸었습니다. 한참 오다보니 책가방을 안 가지고 왔습니다. 선생님 얼굴이 언뜻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책가방을 가져오려고 집에 갔다간 엄마에게 돈을 뺏길지 모릅니다.
‘안 돼. 인형을 꼭 사야 해.’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 다음, 그냥 계속 걸었습니다. 골목을 벗어나니 저만큼 학교가 보입니다.
아직 길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학교 가는 아이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차들만 바삐 지나갑니다.
나는 건널목도 무사히 건넜습니다. 이제 학교 앞 문방구까지 다 왔습니다.
“일찍 학교에 오는 구나. 뭘 살 거냐?”
내가 가게에 들어가자, 길을 쓸고 있던 아저씨도 가게로 들어왔습니다.
“이혀이요.”(인형이요.)
나는 어제 봐두었던 인형을 골랐습니다. 아이스크림도 통에서 꺼냈습니다. 큼지막한 막대 사탕도 하나 샀습니다. 이 막대 사탕은 선생님 드릴 겁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돈 만원을 꺼냈습니다. 아저씨가 7천원을 거슬러 주었습니다.
나는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학교로 들어왔습니다. 교실로 갔습니다. 아직 아무도 교실에 없었습니다. 내가 제일 먼저 온 것입니다.
조금 있으니 아이들이 들어왔습니다.
“야, 말더듬이. 너 그 인형 진주꺼지?”
교실에 들어 온 성훈이가 대뜸 내 인형을 보고 눈을 부라립니다.
나는 금세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방금 돈 주고 산 내 인형을 진주 거라고 하니, 숨이 막힙니다.
“아, 아야, 내 거아!”(아냐, 내 거야.)
난 인형을 끌어안으며 큰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어디 봐. 어제 이 인형 진주가 샀는데. 현정이 니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인형을 사냐? 이거 진주 인형이 틀림없어. 너 도둑질했지? 바른대로 말해.”
성훈이가 계속 날 윽박지릅니다. 나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게집니다. 하지만 입에서는 말이 잘 나오질 않습니다.
“이리 내놔. 이 도둑아!”
마침내 성훈이가 내 손에서 인형을 뺏어가려고 합니다.
“내, 내 거야.”
난 안 뺏기려고 인형을 가슴에 꼭 끌어안습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
교실에 들어 온 아이들이 우르르 우리 옆으로 모여듭니다.
그 때입니다.
“애들아! 현정이 엄마다 현정이 엄마!”
깜짝 놀라 쳐다보니 엄마가 교실로 들어옵니다.
“너 지갑에서 돈 만원 가져갔지? 돈 어딨냐?”
엄마는 내 손에 들려있는 인형을 보았습니다. 이내 눈치를 채고 다짜고짜 내 손에서 인형을 뺏었습니다. 호주머니를 뒤져 남은 돈 7천원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내 등짝을 사정없이 한 대 때렸습니다.
“아이고, 내가 못 살아. 너 이번 소풍도 안 보내줄 테니 그리 알아?”
엄마는 더 이상 때리지는 않고, 화가 잔뜩 난 얼굴로 교실에서 나갔습니다.
“흥! 그러고 보니 너 엄마 돈 훔쳤구나. 도둑이구나.”
성훈이가 비웃는 얼굴로 한 마디 하고 자기 자리로 갔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무슨 흉측한 벌레라도 보는 것처럼 날 쳐다보더니 수근 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 때입니다.
“선생님! 현정이가 엄마 돈을 훔쳤대요. 도둑질했대요.”
선생님이 교실로 오셨나 봅니다. 성훈이가 날 고자질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 현정아! 너 그게 무슨 꼴이냐? 머리도 빗지 않고 학교에 왔구나.”
고개를 들어보니 선생님이 내 앞까지 오셨습니다.
“세수도 하지 않았구나. 얼른 가서 세수부터 하고 오너라.”
나는 화장실로 갔습니다.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보니 엉망진창이었습니다. 머리는 풀어 헝클어져 있고, 얼굴에는 땟국물이 흘렀습니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에 옷도 마구 구겨졌습니다. 후줄근한 모습이 내가 봐도 꼭 거지였습니다. 나는 그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대충대충 세수를 마치고 교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엄마가 막대 사탕은 안 가져갔습니다. 나는 막대 사탕을 가지고 머뭇머뭇 선생님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서어님 이거.”(선생님 이거.)
두 손으로 막대 사탕을 잡고 선생님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현정아, 이만큼 가까이 오너라. 머리부터 좀 빗자.”
막대 사탕을 받아서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선생님이 헝클어진 머리를 가지런히 빗겨주었습니다.
“그래, 엄마 돈을 가져온 거야? 그 돈으로 인형을 샀어? 막대 사탕도 사고? 이번 소풍도 안 보내 준다고 했고?”
아이들이 선생님께 다 말을 해주었나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습니다.
“엄마 돈을 마음대로 가져온 건 잘 못 한 거야. 현정아!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냐?”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오늘 집에 가선 먼저 집안 청소부터 하거라. 마당도 쓸고 방도 걸레로 잘 닦는 거야.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를 하거라. 엄마가 오시면 무릎을 꿇고 엄마에게 잘 못했다고 빌어야 해. ‘엄마,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말씀 드려야 해. 알았지?”
나는 또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소풍도 보내주세요.’ 하고 말 하는 거야. 알았지?”
그렇습니다. 소풍을 꼭 가야합니다. 이번 소풍은 어린이대공원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꼭 타야합니다.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오늘 집에 가서 잘 해야겠다고 맘먹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입니다.
나는 다른 때보다도 일찍 일어났습니다. 어제 저녁에 엄마와 약속한대로 세수를 하고 머리도 단정히 빗었습니다. 아침밥 준비하는 엄마를 도와드렸습니다.
“아빠, 엄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올 때입니다. 엄마가 소풍 안내장에 이름을 써주었습니다.
“이번 소풍 보내줄 테니 앞으로는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그리고 이거 용돈이다. 앞으로는 엄마 지갑에서 돈 꺼내면 안 된다.”
“예!”
이상했습니다. 그전에는 입에서 예 소리가 잘 안 나왔습니다. 말이 입 안에서 웅얼거려지며 ‘어!’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이상하게도 ‘예!’하고 말이 또록또록하게 나왔습니다.
학교에 왔습니다. 교실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나는 엄마가 이름을 써준 소풍안내장을 꺼내 들고 선생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그 소풍안내장을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놓았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서어님! 아녀하어오. 어기이어요. 소푸우아내자어오.”
무슨 말이냐고요?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물론 다른 때 같으면 내 입에서 그렇게 말이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말이 나온 지 아십니까? 다시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엄마가 준 소풍안내장을 꺼내 선생님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놓았습니다.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 친 것입니다.
“선생님! 안녕하셔요. 여기 있어요. 소풍안내장이어요.”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뭐 언제까지나 말을 더듬거릴 줄 알았어? 이제 나도 말 잘할 거야.’
나는 선생님께 다시 절을 꾸벅 하고는 날 바라보는 아이들도 자신 있게 마주 보았습니다. 씩씩하게 내 자리로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