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에 취해 쓰러졌다면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꽃에 취해 쓰려졌다고 누가 비웃겠는가? 그저 한바탕 웃고 말 일이다. 그럼에도 진정 꽃에 취해 쓰러지면 평생에 경험하는 귀한 멋이고, 아니더라도 무슨 손해가 있을 것인가?
아무튼, 앞말이 길었다. 그러니까 꽃에 취해 쓰러지는 곳이 있으니,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274-1번지의 서창 만귀정이다.
서창은 광주의 서쪽 창고이니, 말 그대로 큰 곡식 창고가 있던 곳이다. 그 창고의 세곡을 실어나르던 배들이 들판의 젖줄인 극락강을 오갔다.
또 ‘서창 만드리풍년제’는 7월 백중(음력 7월 15일) 무렵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마지막으로 김매기를 재현하는 놀이였다. 논 주인이 봄부터 수고한 농사꾼들을 위로하고 마을 주민들의 화합을 위한 오랜 전통의 축제였다,
여기 만귀정의 역사는 흥성장씨 장창우(1704~1774)가 전북 남원에서 이곳 동하마을로 이주하며 시작된다. 장창우는 초가 정자를 지어 자신의 호를 따 만귀정이라 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으니, 세월이 흘러 장창우와 만귀정은 이야기로만 남았다.
1934년이다. 7대 후손 장안섭이 나서서. 만귀정 옛터에 네모난 연못을 만들고 연못 안에 둥근 동산을 만들어 정자를 지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옛사람들의 우주관 ‘천원지방(天圓地方)’에 따라 만든 별서정원이다.
만귀정은 하나의 연못을 두고 하늘과 땅, 사람을 상징하듯 세 개의 정자가 나란히 있다. 제일 맏형인 만귀정과 아우들인 습향각, 묵암정사가 다리로 이어져 있다. 몇 해 전까지는 멋들어진 나무다리였는데, 안전문제인지 이제는 돌다리가 놓여있다. 이 돌다리 또한 세월이 흘러야 이끼가 끼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서 멋이 되리라.
아무튼, 세 정자 중 가장 막내인 묵암정사는 송정 읍장이었던 장안섭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광산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서 지었다. 묵암은 장안섭의 호이다.
연못 가운데의 정자는 습향각이다. 이름 그대로 ‘꽃향기가 깊이 스며드는’ 곳이다. 겨울이면 만발한 하얀 눈꽃, 이어받은 봄에는 흩날리는 하얀 벚꽃에 눈이 부시고, 여름에는 붉은 배롱과 연분홍 연꽃, 보랏빛 맥문동, 가을에는 붉은 상사화에 가슴이 뛰는 곳이다. 마음 깊숙이 스며드는 꽃향기에 취해 어찌 쓰러지지 않겠는가?
그렇게 만귀정은 꽃대궐인 삶터요, 꽃향기에 숨 쉬는 숨터이고, 꽃에 취해 쉬는 쉼터이다.
설령 습향각에서 꽃에 취해 다리가 후들거리더라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만귀정의 주인이 참 신비로운 장치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만귀정 축대 밑에 네모반듯한 돌이 제단처럼 놓여있다. 들여다보면 앞면에는 취석(醉石), 뒷면에는 성석(醒石)이라 새겨져 있다. 다리를 건너갈 때는 꽃향기에 취해 ‘신선의 세계’로 가고 나올 때는 깨어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라는 뜻이다.
절집이나 사당을 들어갈 때는 오른 쪽문, 나올 때는 왼쪽 문, 가운데 문은 신령이 다니는 문인 것처럼, 만귀정의 취석과 성석은 선계와 인간계, 이상과 현실의 가르침을 주는 돌이다. 그렇게 만귀정으로 돌아오면 마치 천상과 지상을 오가듯 선계 체험을 할 수 있다.
하찮은 돌멩이라고 툭툭 발로 차는 사람이 아니라면, 만귀정의 여름꽃 배롱에 흠뻑 취해도 좋다. 만귀정의 여름 배롱꽃은 지친 삶과 숨, 쉼을 다시 일깨워주는 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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