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은 광주사람들에게 아리랑과 같은 말이다. 먼 나라에서 아리랑 노랫가락에 눈물 흘리듯, 먼 곳에 다녀오다 바라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어머니의 품 같은 산이기 때문이다.
이 무등에 눈이 세 번 내리면 빛고을에서도 펄펄 날리는 첫눈을 맞이한다. 그렇게 무등은 또 영험한 산이니 희망이요 민주, 인권, 평화의 상징이다.
이 무등을 바라보며 식영정의 늘푸른 높은 솔이 지키는 광주호 상류로 올라가 화순 동복 가는 갈림길에서 환벽당 쪽으로 길을 잡는다. 그렇게 무등의 품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충효동 1021번지에 장승처럼 서 있는 대여섯 아름의 왕버들나무 세 그루를 만난다.
충효리 왕버들 이름은 김덕령(1567~1596) 장군과 관련이 있다. 김덕령은 1593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익호(翼虎), 충용(忠勇) 장군이란 칭호를 들으며, 이순신 장군과 장문포에서, 곽재우 의병장과 의령에서 왜를 크게 물리친 조선의병총대장이었다.
어릴 적에는 효자로 아우 덕보와 함께 화순 동복의 석교천(남면)까지 수십 리 길을 걸어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고, 진주의 명의 김남신에게 약을 구하러 수백 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1596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운봉까지 진군하였음에도 적과 내통하였다 하여,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모진 국문에 숨졌다.
그의 형 덕홍도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장군의 처 흥양 이씨도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에서 순절하였다. 천만다행으로 아들 광옥은 고모와 함께 전북 익산의 용안현으로 피란했고, 왜란이 지난 뒤, 평안도 숙천군의 북도 방어사인 외숙 이인경에게 의탁했다. 그 뒤, 평안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에 정착, 용안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또 천만다행으로 숙종 임금 때에 장군의 억울함은 신원 되었고, 정조 임금 13년에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 시호를 충장공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충효리란 이름은 장군과 그의 가족의 우국, 효성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이름이고, 광주의 중심거리인 충장로는 장군의 시호이다.
여기 빛고을 광주의 삶터를 일군 충효리의 옛 지명은 석저촌이고, 이곳에 장군의 쉼터였던 옛 집터가 있다. 정려비각은 마을 앞 길가에 있고, 세 그루의 왕버들나무가 마주 보고 있다.
왕버들은 4월에 꽃이 피고 5월에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이곳 충효리 왕버들은 석저촌 사람들이 1580년 무렵에 마을의 상징으로 일송(一松), 일매(一梅), 오류(五柳)로 심은 것이다. 굳이 손가락 꼽아보지 않아도 장군이 열 살 무렵에 심어진 나무가 아닌가 싶다.
세월과 함께 소나무와 매화는 사라지고, 왕버들도 세 그루만 남았으나, 이 왕버들이 가까이 거느리는 정자와 원림이 여럿이다. 창계천으로 내려가면 환벽당과 취가정이 있고, 냇가 건너 왼쪽 언덕의 식영정과 그 일가들, 오른쪽의 소쇄원 등이 그것이다.
환벽당은 명종 임금 때 나주 목사를 지낸 김윤제가 지었다. 취가정은 1890년 김덕령 장군의 후손인 김만식과 친족들이 지었다. 정자의 이름 취가정은 조선 중기의 문인 권필이 자신의 꿈에서 술에 취한 김덕령과 서로 시를 나누고 억울하게 죽은 장군의 혼을 달래기 위해 읊은 ‘취시가’에서 유래한다.
식영정은 1560년 김성원이 그의 장인이자, 스승인 임억령을 위하여 서하당과 함께 지었다. 또 소쇄원은 조선 중종 임금 때 학자 양산보가 1519년 기묘사화에 스승인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자, 은거하기 위해 지은 별서정원이다.
이들 정자와 정원 이야기는 식영정의 소나무에게 더 자세히 들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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