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영정의 높은 솔이 사는 곳은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 산 75-1번지이다. 정자 정(亭)자는 언덕 위의 집을 가리킨다, 그 언덕 위의 집 식영정의 높은 솔들은 나이가 어리면 2백 살, 3백 살이다.
이 식영정은 김성원이 자신의 스승이자 장인인 임억령을 위해 별뫼라 불리는 성산 기슭에 터를 닦아 명종 임금의 1560년에 지었으니, 가장 나이가 많은 소나무는 4백 살, 5백 살도 되었을 것이다.
식영정 이웃 마을 소쇄원의 5백 30살쯤 되는 소나무가 10여 년 전 고사하였는데, 이곳 식영정의 5백 살 높은 솔은 아직 청청하니 그나마 고마운 일이다.
소나무는 크게 육송, 곰솔, 외래종으로 구분한다. 야산에 흔한 리기다는 북미산이고, 곰솔은 해송이니 바닷가 소나무이다. 내륙 소나무인 육송은 적송, 금강송, 반송, 처진소나무 등 색깔이나 형태로 나눈다. 그런데 붉은소나무를 적송이라 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말 말살에 따른 이름이다. 우리 조상들은 그냥 송이나 송목이라 했다. 그리고 송진은 각종 도료나 의약품, 화학제품의 원료이고, 하얀 속껍질은 보릿고개의 구황식품이었다.
이 귀한 높은 솔이 있는 식영정은 그림자가 쉬어간다는 곳이다. ‘장자’의 그림자가 두려워 도망치던 바보 이야기가 그 유래이다. 그러니까 그림자가 두려운 바보가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달아나다, 문득 그늘에 들어가서야 자신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림자는 인간의 욕망이다. 옛 선인들은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 쉬는 곳을 ‘식영세계’라 했다. 임억령이 송순, 김윤제, 김인후, 기대승, 양산보, 김성원, 정철, 고경명, 백광훈 등과 교우했던 이곳 식영세계는 부용당, 서하당, 연못, 성산사가 한 울타리에 있는 전통원림이다.
부용당은 피어나는 연꽃 못에 그림자를 던져놓고 쉬는 쉼터이며, 삶터를 벗어나 노는 집인 서하당은 숨터이다. 성산사는 여기 머물던 식영인들의 영혼을 모신 곳이니 삶터이자, 숨터, 쉼터이다. 그러니 부용당, 서하당, 성산사를 지키는 높은 솔의 위상이 어떠할지 짐작이 된다.
그럼에도 양산보가 은거하던 이웃 마을 소쇄원이나, 식영인들이 어린 시절 공부하던 창계천 건너 이웃인 환벽당은 그저 그렇지만, 그중에 취가정만큼은 사뭇 마음이 쓰인다.
취가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총사령관이었던 김덕령(1568~1596) 장군을 기리기 위해 1890년에 세웠으니 이곳 정자들의 막내이다. 취가정이란 이름은 권필의 꿈과 관련이 있다.
어느 날 권필이 꿈을 꾸는데 술 취한 김덕령이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며 노래를 불렀다. 잠에서 깬 권필이 이를 옮겨 썼으니 ‘취할 때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듣는 사람 없네./ 나는 꽃과 달에 취함도 바라지 않고/ 나는 공훈을 세움도 바라지않네./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네./ 취할 때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아는 사람 없네./ 내 마음은 장검으로 명군께 보답만 하고 지고 .’이다. ‘취시가’라는 제목이 붙여진 연유이기도 하다.
또 마음 쓰이는 것이 있다. 원효계곡에서 발원하여 흘러온 창계천을 이곳에서는 자미탄이라 한다. 식영정의 석병풍 아래로 이어지며 피어난 백일홍이 물결에 여울져 흘러가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워서 얻은 이름이다. 신작로가 나며 그 석병풍은 흔적만 남았고, 또 2018년 폭우에 3백 살 소나무 아우가 먼저 죽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그리움을 어찌하랴? 용트림하듯 하늘 향해 솟은 식영정 높은 솔을 우러르며 삶과 숨과 쉼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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