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군 도암면에 개천산(497.2m)과 조금 낮은 천태산(497m)이 어깨를 나란히 형제처럼 서있다. 멀리서 보면 붓끝처럼 보여 문필봉이라고도 부르는 데 개천산이 더 뾰족하다. 또 이른 봄, 노루귀며 괭이눈, 바람꽃 등이 어느 곳보다 먼저 지천으로 피어나는 산이다.
개천산은 하늘을 연 산이고 천태산의 그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니 이름으로만 하면 이보다 큰 산이 또 있을까 싶다. 또 개천산의 물은 춘양천이 되어 지석천으로 가고 천태산의 물은 대초천이 되어 지석천으로 가니 잠시 헤어졌다 다시 한 몸이 된다.
천태산 꼭대기 바위 벼랑에 도선국사의 철마방아 흔적이 있다. 당나라 일행선사가 우리나라 명산의 영기를 모두 끊어버렸다. 이에 도선이 천태산 봉우리에 철마방아를 얹었다. 매일 철마방아를 찧으니 당나라 큰 인물이 한 명씩 죽었다. 이에 일행선사가 명산의 영기를 다시 이었고, 도선국사도 철마방아를 없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어쨌든 통쾌하고 어깨를 으쓱 편다.
개천산 중턱에 커다란 돌거북 한 마리가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도선국사가 창건한 개천사 뒤쪽 300여 미터 즈음인데, 마치 살아 꿈틀거리는 듯싶다. 이 거북이 산에 오르면 국태민안의 새 세상이 된다고 한다. 그게 두려웠던지 일제강점기에 왜인이 거북이의 목과 발을 잘라버렸다. 다행히 2000년도 들머리에 잘라낸 머리와 발을 일부 찾아 복원해놓았다.
스님들이 먹을 밥을 지으면 쌀뜨물이 20여 리 떨어진 춘양면의 지석천까지 흘러내렸다는 개천사의 천불전(千佛殿)은 6·25 때 불에 타 연기로 스러졌다. 이제 다시 복원되어 이웃 고을 운주사의 천탑과 함께 천불천탑의 옛 이름을 잇고 있다.
이곳 개천산과 천태산 비자나무 숲은 11만8800㎡로 1982년 전남도기념물 제65호였다가 2007년 8월 9일 천연기념물 제483호가 되었다. 300여 그루의 300년 넘은 비자나무와 5백 살이 되어가는 비자나무 한 그루는 바라보기만 해도 경이롭다.
더하여 여기 울울창창한 대나무는 기묘사화로 낙향한 학포 양팽손의 화제였다. 그의 먹으로 그린 4점의 대나무 첫 그림이 ‘천태연간’(天台鍊簡)이니, 곧게 뻗은 대나무는 갈고 닦아 하늘의 별이 되고자 하는 선비의 절개이자 희망이었다. 또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의 ‘절죽’(折竹), 희망의 새봄을 품은 죽순의 ‘신죽’(新竹), 바람이 흔들어도 굴하지 않고 허리 곧추세우는 ‘풍죽’(風竹)이 비자나무와 함께 늘푸른 짙푸름으로 하늘을 열고 떠받치고 있다.
5백 살이 되어가는 이곳 비자나무를 만나기 위해 개천사 대웅전 앞을 지나 천태산으로 오르는 대숲에서 학포를 만나고 그 정신을 되새긴다.
학포(學圃)는 포은 정몽주를 따른다는 것이며, 학문의 밭을 일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학포 양팽손(1487~1545)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이자 서화가이다. 1510년 27살에 조광조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했다. 1519년 기묘사화에 조광조는 능주에서 사약을 받았고, 다섯 살 아래 양팽손이 그의 주검을 고향 마을 중조산에 잠시 거뒀다.
그 뒤 양팽손은 학포당을 짓고 은거하며 그림을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산수도가 대표작이고, 묵죽도는 그의 3남인 양응정이 가지고 있다가 정유재란 때 왜병에게 약턀 당했다. 일본 히로시마현 대원사에 있는데, 1597년 후손들이 사진으로 촬영해 왔다.
어느 날 마음이 답답하고 외롭다면 개천과 천태의 산으로 가자. 외롭고 답답한 학포를 달래준 울창한 대나무와 부드러우나 비늘줄기의 잎끝이 따끔하게 느껴지는 비자나무 숲을 거닐며 5백 살을 바라보는 비자나무도 만나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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