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는 꽃치고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다. 하지만 지는 꽃이 아름다움의 칭송을 얻기는 힘들다. 백공작이라는 백목련도 질 때의 모습은 별로이다. 화무십일홍의 비유가 괜스레 생겼을까?
그럼에도 봄날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의 정취는 아련한 그리움이다. 또 동백꽃은 어떠한가? 이른 봄 눈 위에 떨어져서도 시들지 않은 모습의 붉은 꽃은 핏빛 사랑이다.
또 있다. 우리나라에 고려 말 무렵에 들어온 배롱꽃은 떨어져서 더 아름답다. 베롱꽃의 백일홍이란 이름은 백일동안 핀다고 해서 얻은 이름인데, 꽃이 다 질 때쯤 벼가 여물어 쌀밥나무라고도 한다. 또 살살 문지르면 바람이 없어도 가지가 흔들려서 간지럼나무라고도 하니, 파양화(怕痒花), 파양수(怕癢樹)란 이름이 그것이다. 후자탈(猴刺脫)은 나무껍질이 매끈해 원숭이도 미끄러진다 하여 얻은 이름이고 또 만당홍이라고도 한다. 그렇게 매끈하고 깨끗한 수피 덕분에 청렴결백한 선비의 모습과 비슷하여 정자나 사당, 향교, 절집, 무덤가에 심었다.
이 배롱꽃의 한자는 자미화이다. 당나라 현종이 이 배롱꽃을 좋아하였다. 궁궐의 중서성, 상서성, 문하성에 배롱을 심고 자신이 업무를 보던 중서성을 ‘자미성’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색 백일홍을 자미(紫薇), 흰꽃을 백미(白薇) 또는 은미(銀薇), 붉은색을 홍미(紅薇), 비취색을 취미(翠薇)라 했다. 이중 취미와 은미를 본다면 한 해 배롱꽃을 다 봤다 할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인 강희안은 ‘비단같이 아름답고 노을처럼 고운 홍미가 뜰을 비추며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한다’고 했다. 성삼문은 ‘어제저녁 한 송이 지고(昨夕一花衰), 오늘 아침 한 송이 피어(今朝一花開), 서로 일백일을 바라보니(相看一百日), 내 너를 대하며 술잔을 들고 싶다(對爾好衡盃)’고 했다. 백일홍의 꽃잎과 꽃받침이 모두 여섯 장씩이니, 사육신의 숫자와 같음이 또 경이롭다. 신말주의 10대손으로 조선 후기 학자인 신경준은 순원화혜잡설(淳園花卉雜設)에서 ‘오늘 하나의 꽃이 피고 내일 하나의 꽃이 피며 먼저 핀 꽃이 지려 할 때 그 뒤의 꽃이 이어서 피어난다. 많고 많은 꽃잎을 가지고 하루하루의 공을 나누었으니 어찌 쉽게 다함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렇게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뜨거운 여름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꽃이 배롱꽃이다.
이 배롱꾳이 아름다운 곳이 여러 곳이다. 그중 먼저 가볼 곳이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513번지의 명옥헌이다.
오희도(1583-1623)는 1602년 사마시, 1623년(인조1) 알성문과에 합격하여 어전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검열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이곳 명옥헌은 그 오희도의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집을 짓고, 명옥헌이라 했다. 이곳 장계정은 오이정의 호와 같다.
명옥헌의 배롱꽃은 장계정 앞의 연못과 어울려 더 아름답다. 나무에 피어있을 때는 물 위의 그림자이고 떨어져 물 위에 있을 때는 나무의 그림자이니, 명옥헌 배롱꽃은 나무에 있거나 물 위에 있거나 모습이 하나이다. 삶도 죽음도 아름다운 모습이니, 이 세상에 그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또 어디 있겠는가?
명옥헌 배롱꽃을 보지 않고 배롱꽃을 봤다고 하면 웃음거리이다. 뜨거운 여름, 불볕더위를 잊을 수 있는 꽃이 또 붉은꽃 배롱꽃이니 이열치열은 이런 때 쓰는 말이다. 2021년 8월 염천, 명옥헌에서는 만개한 배롱꽃말고도 청아한 연꽃을 덤으로 볼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는 또 이런 때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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