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기행
2015년 새 봄이다. 지난 몇 해, ‘호남가 호남시를 따라서’ 다니던 나그네 길을 마치고 이제 세월기행을 다닐 생각이다. 우리 민초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면 어디든 갈 생각이다. 그 첫 나그네 길로 진도 팽목항을 찾았다.
1. 팽목항
2015년 3월 6일, 우수 경칩에 대동강물이 풀린다는 경칩 날이다. 꽃샘추위도 주춤, 민족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나라, 남에도 북에도 봄이 왔다.
진도 팽목항으로 가는 길이다. 산내들이 다가오고 사라지고 이어진다. 구비, 구비 모롱이를 돌고, 강과 들을 가로지르며 언덕을 넘는다.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가는 길에 월출산방에서 도자기를 굽고, 야생차를 덖는 강승원 화백을 잠시 만났다.
자유인들이 언제 억매여 살았던가? 자유인들의 영혼은 수구독재와 부조리, 짓누르고 억압하는 관행과 맞서 싸우며 삶터에서의 내쫓김과 배고픔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유인 강승원 화백은 이제 진정으로 자유인이 되어 수십 년의 세월을 몸담았던 직장을 이번에는 스스로 걸어 나왔다. 지난 1989년 5월 독재권력에 의해 강제로 해직의 아픔을 겪었던 그에게 이번 자유의지에 의한 해직(?)은 어떤 상념일까?
말수가 적은 그에게 답은 들을 수 없지만 그는 그렇게 정든 직장을 떠나며 그동안 틈틈이 만든 테라코타 수십 점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또한 월출산방의 생활을 담은 수상집을 출간하였다.
‘언제나 건강하시게.’
‘돌아가는 길에 산방에 들려 차 마시고 가세요.’
그렇게 온 가득 얼굴에 해맑은 웃음을 웃는 그와 헤어지며 ‘입맞춤’이라는 테라코타 한 점을 차에 싣고 다시 팽목을 향했다.
동행은 서예가 월강 박승재 선생이다. 고향에서 교장으로 정년을 한 월강 역시 이제 자유인으로 제 2의 인생을 엮어가고 있다.
“웅크렸던 추운 겨울 가고 새 봄이네.”
“월강과 함께 새 봄 첫 나들이, 참 좋으이.”
“그 첫 나들이가 팽목항이어서 뜻도 깊으이.”
묵은 지처럼 곰삭은 죽마고우들의 대화는 부드럽지만 마음은 허허롭다.
그래서인지 문득 춘래불사춘의 고사가 스친다. 봄은 왔건만, 새 해가 열렸지만 아직도 지난 해 2014년 4월에 멎어 있을 팽목항!
그곳의 봄은 봄이 아니다.
이명박근혜 등 떨거지 무리들의 탐욕과 후안무치함으로 인해 그곳의 봄은 춥고 어둡고 슬프다. 치욕이며 원통함이다. 그리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피눈물의 별리고 가슴을 찢는 처절한 그리움이다.
295명의 사망자와 9명의 실종자 등 304분의 희생자와 그의 가족들, 아직도 차가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아홉 분의 영혼은 이 나라의 현대사를 2014년 4월 16일의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역사다.
가족들의 눈물은 피눈물이요, 그들과 아픔을 같이하는 우리들의 한숨은 천지의 암흑이다.
2015년 3월 5일, 바다에 봄이 와있다. 점점이 떠 있는 섬에도 봄 햇살이 다사롭다.
하지만 오는 길에 잠시 마주쳤던 팽목에서 안산까지 삼보일배를 하며 가는 유가족의 모습이 떠오르자, 바다도 섬도 금세 흐릿해진다. 몸이 떨리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분향소에 들려 분향하고 제방으로 간다. 월강이 사온 진도 술 울금 막걸리에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잠시 고개 숙여 눈물을 감춘다.
“좋은 곳으로 가시오.”
막걸리를 바다에 붓고, 음복을 한다. 빈속이라 그런지 쩌르르 취기가 돈다.
“그대들을 잊지 않으리. 어떻게든 결코 가만있지 않으리.”
가만있으라는 말을 믿고 어두운 바다에 갇혀 다시는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하는 수많은 생명들에게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결코 가볍지 않은 추를 마음에 매달고 새 봄 앞에 무심한 팽목을 떠난다.
돌아오는 길가, 남도 석성에서 첫 매화를 보고, 진도 읍에서 추어탕에 황칠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는다. 무작정 찾았지만 별미 맛집이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 했던가? 가까이 있는 소전 미술관도 들린다.
봄나들이 길, 애써 한가로워하나 마음은 둥둥 뜬구름이다. 피 끓는 두견새 울음에 진달래가 핀다 했던가? 나직이 노래 한 곡 핏빛으로 남긴다.
팽목
팽목은 항구 이름이 아니다.
채 피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단원고 학생들과 희생자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팽목은 다정한 친구
사랑스런 자식, 언니 오빠의 이름이다
너와 나, 우리의 이름이다.
결코 먼 이름이 아니다.
팽목은 바다에도 뭍에도 꽂는 깃발이다
그림이고 시이며 한 편의 산문이다.
조각이며 음악이다.
세월을 나누는 기록이며 역사다
그러면서 증오와 치욕
분노와 원한
그것을 이기는 힘이다.
불새들이 날개를 펴 날고
산천은 심장을 꺼내어 불에 태운다.
잊지 말라
가만있지 말라
(2015년 3월 5일)
<이제 더 이상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미안합니다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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