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8

운당 2013. 6. 13. 09:05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8

<오래 전 겨울, 덕유산. 한 장의 사진에 담긴 추억> 

 

이초(異草)는 무주(茂朱)하고, 서기(瑞氣)는 영광(靈光)이라.

 

온갖 아름다운 꽃들, 이초(異草)가 피어 온 세상이 풍성하며 무주(茂朱)하니 선경(仙境)이 여기다. 서기(瑞氣)는 상서롭고 신령스런 빛이라, 온 누리 밝히는 영광(靈光)이로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무주구천동 계곡으로 들어섰더란다.”

우리들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침을 꼴깍 삼키며, 아버지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 우리들의 초총초롱한 눈을 바라보며 얘길 하시는 아버지는 행복하셨으리라 믿는다.

나도 내 아이들에게 무주구천동의 박문수 얘길 들려줬다. 날 바라보는 내 아이들의 눈도 초롱초롱 거렸다. 얘길 듣는 모습이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이제 내 아이들이, 앞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무주구천동의 박문수 얘길 들려줄지 어쩔지는 잘 모르겠다. 또 내 손주인 그 아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침까지 꼴깍 삼키며 들을 지도 잘 모르겠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입말 얘기가 무슨 흥미가 있고, 그런 얘길 나눌 시간이나 있을지, 그런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무주하면 구천동이 생각나고, 어릴 적 듣던 아버지의 암행어사 박문수 얘기가 떠오른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 이 세상 제일 훌륭한 인물이 박문수였고, 존경했다. 전쟁놀이 하면 나는 암행어사 박문수다하며 나무칼을 휘둘렀던 추억도 새롭다.

추억은 아름답고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박문수 이야기로 먼저 만났던 무주는 이 흰구름 나그네의 행복한 추억에 닿아있는 고장이다.

성인이 되어서 그 무주 땅을 처음 밟았다. 어릴 적 추억 속의 그 아련한 산골 마을에 마침내 들린 것이다.

 

구천동 계곡물에서 탁족을 했다. 크고 작은 바위를 돌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며 흐르는 물 속에 아버지의 얘기, 나의 얘기, 그리고 나의 손주들이 들을 얘기들이 함께 흐르고 있었다.

상상 속의 그 무주가 현실에서도 변함없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신선이 다스리는 고을, 선녀가 사는 고을, 아름다운 꽃들이 무성하게 피어나는 무주가 맞았다.

 

무주군은 남북으로 뻗은 소백산맥을 사이에 두고 삼한시대 때 동편은 변진, 서편은 마한에 속했다 한다. 그러니까 변진의 무풍은 신라의 무산현이고, 마한의 주계는 백제의 적천현이었던 것이다. 신라 영토 확장 이후에는 무산무풍으로, ‘적천단천으로 개칭했고 고려 건국으로 무풍은 그대로 단천주계가 되었다.

조선 태종 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옛 신라의 무풍과 백제의 주계를 합병,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편제하며 두 고을 이름의 첫 자를 따 무주라 하고 오늘에 이른다 한다.

 

무주하면 연상되는 구천동의 노래, ‘박지연이 부르는 넘어가네 넘어가네 소머리고개/ 무주라 구천동을 버리고 가네/ 산포도 머루 다래 익어갈때면/ 그림같은 두메골에 살자던 님이/ 나만 두고 떠나가네/ 무주구천동 무주구천동하고 넘어가는 그 곡조도 흥겹지만,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구천동의 지명 유래도 재미있다.

구천동 입구는 무주읍에서 40여리(16Km) 거리의 나제통문(羅濟通門)에서 남쪽 방향 덕유산을 향해 구절양장(九折羊腸), 갈지()자로 이어지는 70여리(28Km) 골짜기다. 북한의 삼수갑산과 구천동계곡은 심산유곡의 대명사로 굽이굽이 펼쳐지는 맑은 계곡물은 울창한 숲을 만나 노래하고, 기암을 만나 옥구슬이 되니 바로 선경이다.

이 구천동은 암행어사 박문수의 설화로, 구씨와 천씨 성을 가진 두 집안의 거주지라고 해서 구천동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천동의 는 성씨 구()가 아니고 아홉 ()’다 구()는 아홉 외에 크다, 길다의 뜻도 있는바, 구천동의 는 후자의 뜻이라 여겨진다.

또 기이한 바위들이 9천 개가 널려 있어서 구천동이라 하고, 예전에 절이 많아 성불자(成佛子) 9천명이 다녀갔다 해서 구천동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숙종 때 소론의 거두인 윤명제는 덕유산 구천동은 14개의 사찰이 있는 불교의 소국이라 했다. 조선 명종 때 광주목사 갈천 임훈의 등덕유산 향적봉기는 불공을 이룬 9천명이 머문 둔소(屯所)라는 뜻에서 구천둔(九千屯)이라고 적었다. 당시 이웃 고을 금산의 한 여인이 수도차 구천둔(九千屯)에 입산한 남편이 약속한 3년이 되어도 안 돌아와 찾아 헤맸으나 계곡이 깊어 찾지 못했다. 이때부터 지명이 구천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실로 인간의 삶 속에서 이뤄지고 불려진 지명인 것이다.

 

이 무주를 둘러보며 그 빛나는 명경의 자연을 칭송하기에 필자의 필력이 부족함을 새삼 느꼈다. 필설로는 다 할 수 없는 그런 선경이요, 피안의 세계였다.

그러니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다 선인이요, 귀인들이리라.

하지만 인간 세상에 살면서 소설 책 한 권 이상 쓰지 않는 이 누가 있겠는가? 저 산골짝 초가집에서 외딴 섬 오두막까지 인간이 사는 곳이라면 다 구구절절 그 정과 연이 얽혀 얘기가 된다.

그래서 오늘 이 신선과 귀인이 사는, 아름다운 이초가 무성한 산수 고을 무주에서 몸과 맘의 오욕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얘기 속에나 빠져볼까 한다.

 

어사 박문수는 어느 날 과수댁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 아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사정을 묻자, ‘부친 생전에 건너 마을 좌수의 딸과 혼인을 하기로 약조했는데, 부친 작고 후 좌수는 그 일을 없던 일로 하고 다른 곳으로 혼례를 치르는데 바로 그날이 내일이라는 것이다고 하는 것이다.

박문수는 혼례준비를 시키라는 서찰에 마패를 도장으로 찍어 총각을 고을 원님에게 심부름을 보내고 다음 날, 그 좌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신랑 차림으로 등장한 그 총각과 좌수 딸을 맺어줬는데, 문제는 날벼락을 맞은 또 다른 신랑이다. 마침 과수댁에 딸이 있었다. 이에 박문수는 그 딸의 혼수도 장만하여 혼례를 올려주니, 모든 남녀가 다 화통했다는 얘기다.

 

지금 서울 밖의 처녀로 나이가 20, 30이 넘도록 시집 못간 자가 매우 많아 원망이 가슴에 맺혀 화기(火氣)로 손상할 것입니다.’

영조실록(1730. 12. 24)’의 기록에 남아있듯 어사 박문수는 나이가 차도록 결혼을 못한 처녀들의 혼인 문제까지 처리한 명 어사였다.

어사 박문수가 무주구천동에서 해결한 또 다른 얘기가 있다.

 

박문수가 삼남어사(三南御史)가 되어 충청도, 경상도를 거쳐 전라도 덕유산에 이르렀다. 험한 산길에서 등불이 켜진 집을 찾으니, 두 부자가 다투고 있었다. 아버지가 칼을 들고 젊은 아들에게 이 놈 죽어라하고 아들은 다만 죽겠습니다하는 것이다.

노인은 서당 훈장 유안거고 그 아들은 유득주였다. 이곳은 유씨 말고는 구씨와 천씨만 살아 구천동이라 하는데, 바로 이웃에 천운서와 그의 아들 천동수가 산다고 했다. 그런데 천동수의 처가 행실이 좋지 못했다.

이를 구실로 천동수는 자기 처와 유득주가 통간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그 보복으로 유안거의 부인은 천운서가, 유득주의 부인은 천동수가 차지하여 내일 강제 혼례를 치른다고 했다. 그래서 유안거 가족은 살아 욕을 당하기 전에 온 가족이 죽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에 박문수는 무주 관아에 출두해 땅 재주 잘하는 광대 네 명을 뽑은 뒤 자신을 포함하여 오방신장(五方神將)의 군복을 입고 구천동으로 달려갔다.

마침내 천운서 부자의 폐륜적인 혼례가 치러지기 직전, 그 옥황상제의 명을 받았다는 오방신장이 들이닥쳤다. 누런 두건과 누런 옷, 누런 털이 달린 도끼를 한 손에 든 신장이 대문을 발로 차며 들어왔다. 그러더니 용을 그린 푸른 깃발을 든 푸른옷 신장, 흰 호랑이 깃발을 든 흰옷 신장, 붉은 봉황을 그린 깃발을 든 붉은옷 신장, 검은 거북을 그린 검은옷 신장을 차례로 부르니, 그들이 동서남북 방향에서 담을 훌쩍 날아 넘어왔다. 곧 천운서 부자를 포박하여 끌고 가더니 죽여 버렸다.

10년 후 박문수가 다시 삼남어사(三南御史)로 구천동을 찾으니, 예전에 없던 커다란 기와집이 한 채 있고, 유안거가 살고 있었다. 유안거는 박문수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10년 전 천가 부자가 옥황상제에게 잡혀간 뒤 주민들이 저 집은 곧 하늘이 아는 집이다라며, 이 집을 지어주고 해마다 곡식을 갖다 바쳐 이렇게 잘 산다 하였다. 유안거 또한 주민들의 자제를 더욱 정성껏 가르치고 있었다.

조선조 명종 이후 350여년간 600여명의 암행어사 중 가장 지혜롭고 결단력이 뛰어난 어사 박문수는 이토록 구씨, 천씨들의 집성촌인 구천동에서 몰락한 선비 유씨 가족이 따돌림을 받지 않도록 일을 해결했다. 곤경에 처한 백성을 살피고, 간사하고 탐욕스런 무리들을 처단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어사 박문수! 그가 오늘에 있다면 부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라고 했던 강만수도 쥐와 달구도 그 몸뚱이가 모가지를 지탱치 못할 것이다. 참으로 아쉽다.

 

이왕 명 어사 박문수 얘기가 나왔으니 이 고을의 훌륭한 인물 얘기를 더 해보겠다.

흰구름 나그네가 생각하는 훌륭한 인물은 이기와 이타가 46정도의 인물로, 눈물과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돈 잘 모으고, 굴리고, 숨기는 재벌, 권력욕에 찌든 군인, 혀가 잘 발달한 정치가는 절대 아니다. 호남대, 영남, 종교인 대 비 종교인, 가진 자와 없는 자, 남과 북, 48%52%를 갈라놓고 이익을 취하고 즐기는 그런 인간종자도 절대 아니다.

물론 위의 자들을 폄하하거나 질시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자들은 눈물보다 비웃음이, 사랑보다 눈치계산이 더 앞선다고 여겨서다.

 

무주(茂朱)! 고을, 신기하고 아름다운 이초가 무성한 산수간인 무주에 어찌 훌륭한 인물이 없을 소냐?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인물이 많이 나옴은 역사의 순리요, 증명이다.

그게 철학이고, 풍수며, 자연의 법칙이다. 앞으로 우리에게 눈물과 사랑을 알게 해줄 훌륭한 인물이 나올 곳이 바로 무주구나! 생각하고 믿으며, 무주군청 홈피에 있는 무주의 인물 몇 분을 발췌해 옮긴다. 지면 관계상 내용을 줄이니,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무주군청 홈피에 들리시길 바란다.

 

최북(崔北, 1712~1786?)의 초명(初名)은 최식(崔埴)이고 자()는 성기(聖器) 또는 유용(有用)인데, 후에 이름을 북(), ()는 칠칠(七七)이라 했다. 주요작품은 수각산수도, 한강조어도, 공산무인도가 있다. 또 호를 성재(星齋), 기암(箕庵), 기재(其齋)라고 하였고 호생(毫生)이라 했는데, 붓털로 살아간다는 뜻이라 한다. 그의 자 칠칠(七七)은 이름인 ()’자를 두 자로 파자(破字)한 거다.

또 그는 주객(酒客) 화가(畵家)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하루에 5, 6되의 술을 마셨다 한다. 또한, 한쪽 눈이 멀어서 항상 반쪽 안경을 쓰고 꽃과 풀, 새 깃과 짐승 털, 괴석과 고목 등을 부드럽게 흘려 쓰는 초서(草書)와 같이 거침없이 그렸다.

사람들은 그를 최산수(崔山水)라 부르기도 했는데 그의 나이가 49세 때 서울에서 세상을 떴다 한다.

 

문학평론의 선구자 김환태(金煥泰 19091944)1930년대 후반기 명평론가로 활약하여 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그는 한국비평문학의 효시, 순수비평의 기수라 불리며 예술성을 앞세워 독자적 비평세계를 확립한 분이다.

창작이 비평에 우선한다며, 작품은 첫 인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인상주의 비평을 내세워 문학의 독립성과 순수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눌인(訥人) 김환태는 무주면사무소 직원이었던 김종원(金鍾元)과 부인 고씨 사이에 태어나 8살에 무주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3살에 졸업했다.

26세에 대학을 나와 여의전(女醫專)에서 강의를 하며 집필에 전념할 때 평론가 이헌구(李軒求)와 친분을 나누었다.

다방면의 작품을 발표하며 필명을 날리던 28(1936)에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했고, 이 해에 1개월여 동대문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도산 안창호(安昌浩)와의 친분관계로 추정된다.

또 이 해 6월 당시 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등의 발행인 용아(龍兒) 박용철(朴龍喆)의 누이동생 박봉자(朴鳳子)와 결혼하였다.

이후 폐를 앓게 되고 4312월 고향인 무주로 돌아와 요양하던 중 광복을 1년 앞둔 194452636세로 짧은 생을 마쳤다.

그의 무덤은 무주읍 당산리 모수골 만리재에 있다. 1986년에 세워진 김환태 문학비가 국립공원 덕유산 입구(나제통문 무주쪽)에 있다.

 

이어 한말 항일 신명선(申明善) 의병장이다.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 당하자, 군인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의병대를 조직하였다. 무주 출신 신명선(申明善)은 덕유산을 거점으로 동지를 규합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었다.

19071130일경 금산군에 사는 음대보와 김내삼의 집에 들어가 금 23냥을 모금하고, 그 해 겨울 김동신 의병대, 이석용 의병대와 연합하여 진안과 임실, 순창 등지에서 왜군과 격전을 벌였다.

1908년 덕유산으로 돌아온 그는 정월 초 무주 적상면 배골 모퉁이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퇴하였다. 이어 정월 대보름날 부남면 고창곡 옥녀봉 골짜기에서 일본군 43명을 사살하고 총기 50자루를 노획하였다.

1908410일 문태서와 함께 장수를 습격하여 학교, 군청, 일인(日人)가옥 13동을 불태웠고 동월 13일에는 안성에서 진안수비대와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토벌대의 추격을 받아 무주의 칠연계곡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의병 100여명이 옥쇄했고, 신명선의 시신조차 수습치 못했다.

이 때 그의 나이 30세 전후였으며, 연설에 능하고 체구는 건장했다고 한다. 신명선의 순국 후 그의 아우가 의병을 이끌고 활약했는데, 19084월 말에 장수읍을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남겼다.

 

강무경(姜武景, 1878~1909)1878년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서 태어났다. 키는 6(, 180Cm)이 넘었고 몸무게가 140(, 84Kg)이 넘는 장사였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이 머지않았음을 예감하고 비분강개하면서 국권회복의 뜻을 키웠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불가항력이라 판단하고 필묵상(筆墨商)을 하면서 뜻에 맞는 사람을 찾아 삼남(三南)을 돌아 다녔다.

전남 함평에 이르러 심남일(沈南一)을 알게 되었고, 결의형제를 맺고 함께 김율의진(金聿義陳)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1907년 김율이 사망하자, 심남일이 대장 강무경은 선봉장이 되었다.

1908년 전라남도 강진면과 영암(靈巖), 장흥(長興), 함평(咸平), 보성(寶城), 전라북도 남원(南原)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십 차례 교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09년에는 작전과 전술을 바꾸어 낮에는 산 속에서 전투준비를 하고 남평(南平), 영암, 보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야습하여 전공을 세웠다.

그 후 전남북지역 의병간의 연합전선을 구축하던 중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 황제의 조칙으로, 1909721일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에서 자진 해산하였다.

의병 해산 후 강무경은 심남일과 함께 능주에 잠행하여 전투지였던 풍치의 바위굴 안에서 신병을 치료하다, 826일 적병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92일 광주로 이송, 1215일 대구 감옥소로 이감되었다. 이곳에서 교수형으로 32세에 순국하였다.

 

이초가 무성한 무주를 떠나며 생각한다.

이제 최북(崔北), 김환태(金煥泰), 신명선(申明善), 강무경(姜武景) 등 무주의 선인들처럼 조국과 민족, 나와 함께 내 후손이 살아갈 이 땅과 자연을 지키려 목숨을 바칠 사람이 또 있을 것인가?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의 항문을 막아버리면 어떻겠느냐? 흘러야 하는 강물도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시멘트를 바르고 막고, 파헤쳐버린다. 이런 파렴치하고 몰염치한 이명박과 그의 추종자들이 득시글거리는 게 현실이다.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위의 일을 포함하여 29만원 밖에 없다는 전두환이 해외골프를 다니고, 경찰호위를 받으며, 그의 일족 재산이 수천억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도 그리 배우고 그 비법을 익힐 것이다. 돈과 권력만이 삶의 과정이요, 목표다. 무엇이든, 누구든 짓밟고 물리쳐야 내가 산다. 세상은 경쟁의 승자만이 남는 전쟁터가 될 것이다.

그렇게 승자, 강한 자가 독식하는 세상이다.

 

이초(異草)가 무성(茂盛) 무주(茂朱)! 선경(仙境) 서기(瑞氣)도 어리는 법이다. 제발 세상이, 세상 사람이 무주와 같아졌으면 한다. 그런 소박한 한 가닥 바람을 안고, 서기 어린 영광(靈光)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