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6

운당 2013. 5. 10. 11:09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6

 

풍속은 화순(和順)이요, 인심은 함열(咸悅)이라.

미풍양속(美風良俗)이 넘쳐흐르니 세상은 평화(平和)롭고 하는 일마다 순탄(順坦)하다. 풍성한 인심(人心) 넘쳐흐르니 기쁨도 넘쳐(咸悅) 흐른다.

 

파릇파릇 돋는 새순만 보아도 힘이 솟는 봄이다. 이 생명의 기가 충만한 봄도 세월 따라 가버리는 것이기에, 세상 평화를 위해 거스르지 않고 화합하는 고을 화순에서 잠시나마 봄을 붙들어 맨다.

 

봄이 오면 한번쯤은 광주광역시 남구에 있는 분적산(粉積山)에 오른다. 분적산은 이름 그대로 향기를 쌓아놓은 산이다. 봄 처녀가 치마폭에 담아 온 봄 향기를 실컷 마시고 바를 수 있는 산이다. 이 산 머리에 오르면 눈 아래 육판서가 나올 명당 터인 육판리(六判里) 마을이 보이고, 조금 더 고개를 들면 화순 너릿재가 눈높이다.

 

너릿재!

무등 한 자락이 손을 뻗어 광주와 화순을 나누고 또 다시 잇는 고개가 바로 너릿재다.

 

너릿제를 바라보며 잠시 화순의 역사를 더듬는다.

풍속이 평화롭고 물 흐름처럼 순박한 고을 화순은 약 5만 년 전부터 인류가 살았던 곳이라 한다. 구석기 시대의 타제석기가 주암댐에 수몰된 남면 사수리 대전 마을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또 국보 143호로 지정된 영상강 상류 지석강 구릉지대인 도곡면 대곡리에서 나온 청동기시대의 세형동검 등의 유물은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세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곳 도곡면 효산리 모산마을에서 춘양면 대신리로 넘어가는 보성재(보검재) 양쪽 계곡에 늘어선 500여 기의 남방식 지석묘는 2000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다.

흔히 고인돌이라 부르는 이곳 지석묘는 남방식과 무지석식(개석식)이 있다. 보통 지석묘는 북방식 지석묘와 남방식 지석묘로 구분하는데, 북방식은 시체를 지상에 놓고 앞, 뒤로 얇은 돌판을 세워 그 위에 큰 돌을 얹은 탁자 형태다. 남방식은 시신을 지하에 두고 작은 돌을 고인 뒤에 큰 돌을 덮는 바둑판 형태다. 또 남방식이면서 고임돌이 없이 바로 큰돌을 덮은 형태를 무지석식(개석식)이라 한다.

아무튼 화순의 지석묘는 청동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걸치는 서기전 7~6세기 무문토기시대의 사람살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화순 고인돌>

   <화순 도곡면과 춘양면을 잇는 보검재의 고인돌군>

화순의 지명 변천사를 보면 서기 300년까지를 마한시대라 할 때 이 때 화순, 능주지역에 여래비리국이 있었고, 동복지역에는 벽비리국이 있었다. 백제에 이르러 화순은 잉리아현, 능주는 이능부리현, 죽수부리현, 동복은 두부지현이라 불렀다. 신라가 영토확장을 한 뒤 화순은 여미현, 여빈, 해빈이라 하였고, 능주는 능성현, 동복은 동복현이 되었다.

고려에 이르러 화순은 오성, 산양, 서양, 화순현이라 하였고 능주는 능성현, 동복은 귀성, 옹성, 복천, 나복, 동복현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화순은 화순현, 능주는 능성현으로 있다가 1632(인조 10)에 능성목이 되었으며 동복은 그대로 동복현이었다.

그러다 한말에 이르러 1908년 화순, 능주가 능주군으로, 다시 1913년에는 화순군이라 하였다. 동복은 동복군이라 하였으나 19143월 화순군과 동복군을 합하여 화순군이라 하여 오늘에 이른다. 타제석기, 고인돌과 함께하는 말 그대로 유구한 화순의 역사다.

 

잠시 빠져들었던 화순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분적산을 내려온다. 쉬엄쉬엄 너릿재에 이른다.

너릿재에 터널이 생긴 것은 1971년이다. 그리고 그 뒤 터널을 하나 더 뚫어 2차로가 4차로가 되었고, 지금은 이 4차로 너릿재에 덧붙여 4차로를 더 넓히는 확장 공사가 한창이다. 이 길 넓히기로 이제 광주와 화순은 한 고을이나 다름없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곳 너릿재에 벚꽃나무 가로수를 세운, 구불구불한 옛 길이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찻소리에 시끄럽기만 한 터널 길 위쪽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이따금 지나가는 나그네를 말없이 맞는 고개다.

그 너릿재 들머리에서 문득 동화를 썼던 장래 유망했던 작가 이영란을 생각한다. 들꽃과 차를 좋아하고 풀무치처럼 풋풋한 향기로 주변 사람들과 소통했던 그 분은 이제 고인이 됐다.

한 번 너릿재 옛 길 가보세요. 봄에 꽃 필 때 가면 더 좋아요.”

어떤 모임에서 이영란 작가가 이곳 너릿재 옛길을 알려줬다. 그 뒤 지인들과 어울려 몇 차례 다니며 이 고갯길의 정취에 흠뻑 빠지곤 했다.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이영란 작가의 부음 소식은 고인이 된지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분 가족들과도 인연이 있기에 이 자리를 빌려 삼가 명복을 빈다.

그렇다. 고갯길은 인생사의 길이기도 하다.

인생사가 어찌 순탄하기만 하겠는가? 고해(苦海)의 바다를 항해하는 게 인생사라 했다.

그래서 이 고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신을 믿고 의지하기도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신이 우리의 절박함을 들어주지 않아도 좋다. 왜냐하면 신께서 우리의 기도를 다 들어줄 수 없을 거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그러더라도 타인의 고해에 해()를 덧붙이는 인간만큼은 신께서 데려가야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신께서는 그것도 나 몰라라. 그래서 흰구름 나그네는 신을 믿으면서도 믿지 않는다.

 

예를 들어 쥐나 닭, 또는 딸랑이들 두 명만 어느 날 어느 시에 벼락으로 죽이겠다고 하여 그대로 실천되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신을 믿으라고 미친놈처럼 전도하겠다. 하지만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안 될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신은 있으면서도 없기 때문이다.

또 잠시 의분심(意分心)이 생겼다. 세상이 평화롭게 여겨지지 않아서였지만, 다시 나그네의 본분으로 돌아가 기행기를 잇기로 하겠다.

 

너릿재의 지명 유래는 1757년 제작된 여지도서(與地圖書)’ 도로편에 북거광주계판치거로구리(北距光州界板峙距路九里)의 기록이 있다. 그 뒤 읍지에도 판치(板峙)’ 라는 지명 기록이 있어 이 고개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지'광현(廣峴)'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고갯마루가 널찍하면서 평평하다는 뜻인 '너리재'가 한자로 옮기면서 판치(板峙)가 되었다고도 한다.

 

너릿재는 화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보성, 장흥 등 남쪽 지방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관문이다. 따라서 오랜 세월동안 그들이 만들어 놓은 사연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싶다.

그러니까 이 너릿재 고갯길에 산적들이 살았다. 오고가는 길손이며 장사꾼들의 등짐을 털고 생명을 앗아간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넣는 관(, )에 실려 너릿너릿 내려온다고 해서 너릿재라고도 했다 한다. 그래서 행실이 고약한 사람에게 칼 들고 너릿재나 갈 놈이라고도 했다 한다.

그러면 역사의 굴곡으로 기록에 남아있는 이 너릿재에 얽힌 사연을 더듬어보고자 한다.

 

먼저 동학혁명 때의 순무선봉진등록의 기록에 18941127일 손화중, 최경선부대 광주 입성이란 내용이 있다. 1895329일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환 등 지도자들의 교수형이 집행되었으니 동학혁명의 막바지 무렵이다.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너릿재에서 일본군에 의해 참살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한말 의병활동의 기록이다. 1906년 초겨울인 11월 양회일, 임노복, 임상영, 안찬재 등이 쌍봉 쌍산(雙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다음해인 1907422일 의병군은 능주와 화순을 점령하였고, 이어 동복으로 들어가 광주 공격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도마치(板峙)를 넘으려는 순간,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다. 정세현(鄭世鉉) 등이 전사하였으며, 양회일 등은 체포되었다. 6개월여의 의병활동이 무참히 이곳 너릿재에서 꺾이고 말았던 것이다.

 

화순군 동면 복암리에 위치한 화순탄광은 1905년에 발견돼 광업권을 등록한 후 왜정시대에는 남선탄광()과 종연광업()에서 개발을 했다. 해방이 된 1945년에는 미군정청에서 상공부 직할로 운영했고, 1950년 대한석탄공사가 인수해 화순광업소가 된 곳이다.

이 사건은 미군정청의 상공부에서 관할하던 1946815일의 일이다. 그 날 광주에서 광복절 1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이에 3천여 명의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참여하려 했고, 미군정청은 좌익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최한 불법집회라고 막았다.

우리에게 쌀을 달라’, ‘완전한 독립을 달라고 외치던 화순탄광 노동자들을 미군은 전남대병원 근처에서 화순 너릿재까지 토끼몰이식으로 몰았다. 그날 김판석씨 등 노동자들 수십명이 미군의 총에 사망했고, 수백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미군이 주둔하여 자행한 최초의 민간인 학살이었으며 미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인식하게 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80년이 되었다. 전두환, 노태우 등의 박정희의 악행을 잇는 군부독재 치하의 계엄군에 의해 이곳 너릿재에서 시민군 버스가 총탄세례를 받았다. 그날 18명 중 15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두 명은 너릿재 아래 주남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학살됐다.

 

이봉환 시인이 농부는 싸운다에서 이리 노래했다.

화순 너릿재 걸어넘어/자석놈 송장 안고 오던 육시럴 봄에도/ 참 오지게 칼날 드세웠지라/그놈 몸땡이 간지 수년짼디/봄만 되면~/수도 없이 물결로 살아 오지라

 

흰구름 나그네도 선시(禪詩) 한 수 읊는다.

이승과 저승을 나누고 잇는 고개에서/이승에서 저승을 보고/저승에서 이승을 본다/너릿재가 저승이거든/세상이 이승이거든/그 두 곳 이어/비명에 가신 님들/널판 위라도 좋으니/이 봄에 꽃으로 환생하고/이 봄에 부모내외처자식/보듬어 향기되리라.

 

그렇게 너릿재라는 이름은 부모 자식 이웃의 주검을 널()에 넣어 넘던 서러운 사람들의 피눈물이 배인 판치, 광현, 도마치, 널재 등으로도 불리웠다. 고개를 넘는 양민들이 산적들에 의해 생명과 재물을 뺏기고, 갑오년 농민전쟁 때 농민군들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했으며 한말(韓末) 쌍산의소(雙山義所) 의병들의 한이 서린 곳이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화순탄광 노동자들이 미군에게 척살당하고 사살된 곳이다. 1980년 계엄군에 의해 시민군 버스가 총탄세례를 받은 곳이 바로 이 너릿재인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너릿재는 참으로 평화롭고 아름답다. 벚꽃 가로수와 참나무, 그리고 편백림과 소나무가 잘 어울려 나그네의 머리를 맑게 해준다.

    

<우정 사업본부의 블로그 '우정마을'에 실린 고 김복만 채송원 형제묘를 돌보는 화순 우체국 직원들의 아름다운 모습>

이 너릿재에 특이한 사연을 지닌 묘와 묘비가 있다.

191514일의 일이다. 김복만은 화순우편소(우체국)의 체송원(遞送員, 집배원)이었다. 그날 그는 우편물과 과초금(過超金, 우체국의 현금 보유액이 많을 때 큰 우체국으로 보내는 돈)을 광주 우편소로 이송하게 되었다.

김복만은 자신의 동생과 이경태라는 헌병보조원과 함께 우편소를 나섰다. 마침 그믐날이어서 칠흙같은 밤이었다.

조심조심 너릿재를 넘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괴한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들 세 명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몇 개월의 수사 끝에 범인은 고액의 과초금을 노린 화순주재소(경찰서)의 한 직원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화순우편소는 우편물과 과초금을 지키다 순직한 이들 3명의 비석을 너릿재에 세워 희생을 기렸다. 100년이 다된 지금도 명절 때면 후손이 없는 그들의 묘역을 화순우체국 직원들이 벌초도 하고 추모제도 지낸다고 한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잠시 그들의 묘 앞에서 걸음을 멈춰 참배하고 생각에 잠긴다. 지놈 집 장롱에 수억의 현금을 보관하고 있는 놈들은 칼만 안 들었지 민초들의 고혈을 짜 뱃속을 채우는 날강도가 아니겠는가? 이제 잊을 만도 됐는데 새삼스레 이상득, 최시중이들의 쌍판대기가 떠오른다. ! 침을 뱉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았던 화순군 동면 구암의 화순광업소를 우연찮게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아픈 상처가 있는 화순탄광의 오늘 날의 모습은 어떠할까?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여러 경험상, 초대받지 않은 공공사무실을 직접 찾아간들 알아낼 일은 별로 없고 속만 상한다는 선입견에 방문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래서 인터넷을 통해 화순광업소의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싶었지만, 아무튼 무엇도 확인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화순광업소는 더 이상 생각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보성 쇠실 마을 백범 김구 선생 은거지를 다녀오는 길에 우연찮게 화순광업소 앞을 지나게 되었다.

들릴까 말까? 망설이다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들어갔다.

정문을 지키는 두 분께서 참으로 친절하게 맞이해주고 안내를 해주어 총무과장을 뵙고 간단하나마 화순광업소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우리네 서민들은 과거에 석탄하면 맨 먼저 연탄을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석탄이 우리들의 난방에 절대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 연탄의 원료인 석탄을 캐내는 화순광업소는 1950년 개광하여 현재 연간 25만톤을 생산한다고 한다. 직원은 600여명으로 이중 300여명이 협력업체 직원이라고 했다. 그리고 캐낸 석탄은 지금도 연탄을 만들기도 하는데, 주로 화력발전소의 발전연료로 쓰인다고 했다.

70년대 광산호황기에는 1700여명의 광부가 연 65만톤을 생산하기도 했다는 이곳 화순탄광은 국가는 물론 화순의 경제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류로 대체된 에너지원의 변화로 석탄산업은 사양화 길을 걷고 있어 과거 365개소의 탄광은 화순탄광을 포함 현재 석탄공사 3개소 민영 2개소 등 전국적으로 5개소라고 했다. 또 새롭게 알게 된 것은 화순에 이곳 말고도 이양에 이양광업소, 한천에 호남탄좌가 있다는 사실이다.

광업소측은 번거롭고 어려울지 모르나, 학생들이 눈요기 거리가 있는 장소만 견학을 할 게 아니라, 이런 광업소에 들려 귀한 체험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곳 광업소 맞은 편 산자락에 광산종사자 추모비 공원이 있었다. 산업재해로 숨진 5백여 분의 노고를 기리는 곳인데, 어찌 보면 우리들이 가장 고마워해야할 분들이 이분들이라 생각한다. 그분들께 다시 한 번 머리 숙이며, 끝으로 당일 화순광업소에 대해 친절하게 안내해준 박성남 총무과장과 경비실의 두 분께 감사를 드린다.

    

 <광산 종사자 추모비>

 <화순 광업소 전경>

 <예전의 석탄산업 종사 순직자 추모비>

이제 화순 기행의 마지막 여정인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쌍산의소로 간다.

쌍산의소는 1907년 양회일, 임노복, 임상영, 안찬재 등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이곳에는 무기 및 탄약을 공급하는 무기 제작소와 유황의 저장고인 유황굴, 의병 방어시설인 의병성(義兵城)의 흔적이 남아 있어, 대규모의 의병들이 주둔하여 스스로 화승총(火繩銃)이나 천보총(千步銃) 및 탄환(彈丸) 등의 무기를 만들어가며 일본군에 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기 제작소에는 지금도 축대 위에 철을 녹이는 용광로의 벽체와 쇠부스러기(slag)들이 흩어져 있다. 이곳에서 약 4정도 떨어진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화정동에 있는 철광산의 철광석을 운반하여 무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의병성은 높이 약 80정도이고, 그 내부에는 원형 또는 사각의 낮은 돌담들이 구획을 나누며 늘어선 막사터가 있다. 쌍산의병들의 주거지며 진지였다고 한다.

  

 <쌍산의소>

   <막사터 표지석>

그렇게 쌍산의소는 구한말 의병들이 왜경에 대항하여 전투를 준비하던 창의소(創義所) 터로 당시 호남의병 뿐만 아니라 한말 의병사에 빛나는 유적인바, 의병사 연구에 귀중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이 쌍산의소에서 의병활동을 주도했던 양회일 의병장은 1856년 전남 화순군 능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제주, 호는 행사(杏史), 학포 양팽손 선생의 후손이다.

1906년 음력 10월 양회일 의병장은 가산을 정리하고 쌍봉사 윗마을 증동(甑洞)을 찾았다. 마을 유지인 임노복(林魯福)과 의병의 창의소를 증동 마을에 둘 것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득인(得人), 병기(兵器), 군량(軍糧) 확보가 창의의 필수요소라는 데 합의하고 거사에 들어갔다.

이에 깊은 산골 마을 증동은 의병촌(義兵村)으로 변모하였고, 화순은 물론 보성, 장흥과 전라북도인 정읍, 남원, 구례, 순창 등지에서도 의병에 가담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대장간에서 무기를 제작하고, 마을 뒷산 계당산(桂棠山, 中條山이라고도 부름)에서 훈련에 열중하였다.

한편, 양회일은 일제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장성의 기삼연, 담양의 고광순과도 연계하여 각자 고향을 배경으로, 동시에 창의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양회일 의병의 주요 구성원은 아래와 같다.

부장 신재의(辛在義), 선봉장 이광선(李光善), 중군장 임창모(林昌模), 후군장 노응현(盧應玄), 도포장 유화국(柳化國), 총무 양열묵(梁烈黙), 서기 이병화(李秉華), 참모 임상영(林相永), 호군장 안찬재(安贊在)와 임노복(林魯福), 군의 전신묵(全信黙) 200여 명 규모였다. 여기서 군의(軍醫)까지 두었음을 볼 때 의병의 규모와 위세가 등등하고, 준비가 철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모병(募兵)과 훈련, 군수품 조달을 하며 겨울을 지낸 이들은 1907422일 안찬재의 마을인 활용동(活龍洞, 杜陵洞이라고도 함)을 기병거점으로 삼았다. 능주 군아(郡衙) 공격을 시작으로 화순과 동복, 그리고 광주를 치는 계획이었다. 신재의가 주장한 북상방략이 채택된 것이다. 하지만 중군장 임창모는 능주 화순을 점령한 다음 지리산에 들어가 장기항전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다.

의병은 계획대로 422일 능주와 화순을 점령하여 무기와 군자금을 징발하고, 군아와 우편소, 경무서와 일본인 상가 등을 불태웠다. 그리고 일제의 통신시설인 전주와 전선을 절단하였다. 이어 동복으로 들어가 광주 공격을 준비하였다. 실로 첫 출발이 좋았다.

하지만 이튿날 광주를 치기 위하여 이들이 도마치(板峙, 너릿재)를 넘을 때,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우세한 화력 공격에 의병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정세현(鄭世鉉)이 전사하고, 여기저기서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다른 사람을 죽이지 말고 나를 죽여라. 내가 바로 의병장 양회일이다.”

이에 의병장 양회일이 크게 외쳤다. 그리고 의병들이 후퇴하도록 조치하였다. 하지만 중군장 임창모를 비롯한 5명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양회일 의병장과 함께 체포되었다. 7월에 재판을 받아 양회일과 임창모는 15, 안찬재, 유태경, 신태환, 이윤선 등은 10년형을 선고받고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에 모두 특사로 풀려났다.

이듬 해 1908년 쌍산의병들은 재차 의거하였다. 강진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양회일 의병장은 다시 체포되었다. 장흥헌병대에 구금되어 7일 동안 단식투쟁을 하다가 1908722일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일제 헌병에게 다음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내가 비록 죽는다 해도 천하의 의사(義士)들을 너희가 모조리 죽일 수 있겠느냐?”

독립군의 후예는 비참하게 살고, 친일파 사기꾼들은 떵떵 거리고 사는 더러운 세상에서 그나마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주어졌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텅 빈 쌍산의소 터에서 나그네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초점 없는 눈을 하늘에 둔다.

    

 <양회일 순의 기념비>

 <의병의 노래, 친일매국노들의 코를 꿰어 이곳에 참배시켜야 하거늘...>

세상이 평화롭고 순리가 사람살이의 근본이 되는 세상을 화순(和順)에서나마 희망하고 꿈꾸는 게 죄짓는 것만 같다.

더욱이 요 근자에 화순의 자치세력 판도가 시끄러웠다. 고을 수령들이 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불미스럽게 자리를 떴다. 하지만 비온 뒤 땅이 굳어진다고 했다. 세상의 평화와 순조로운 삶을 이끌어갈 화순 고을 아닌가? 만연산 아래 아름답고 평화로운 화순 고을이 되리라 흰구름 나그네는 믿고 또 믿는다.

그리 기원하며 진실과 정의가 사라져버린 매국노, 독재자, 그리고 그들 자식들이 판치는 더러운 세상에서, 또 다시 희망을 찾아 인심 좋은 고을 함열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