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5

운당 2013. 4. 26. 07:45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5

 

나무나무 임실(任實)이요, 가지가지 옥과(玉果)로다. 가지가지마다 구슬 같은 과일이니 향기로운 보석이로다. 인간사 인연도 이리 아름다운 결실이면 오죽 좋으랴.

 

나무나무 임실이요 가지가지 옥과로다.

호남가를 들어보면 나무나무 임~실이요에서 임과 실 사이의 박자가 9이다. 제일 길게 부르는 대목인 것이다. , 그렇게 길게 공들여 결실을 맺은 과일이니 구슬 같은 옥과가 아니겠는가? 향기로운 과일이며 아름다운 보석이다.

 

그 향기로운 과일이며 아름다운 보석인 옥과를 보러간다.

 

옥과(玉果)가 무엇이겠는가?

나무라면 열매고, 사람이라면 자식 아니겠는가?

구슬 같은 열매, 보석 같은 자식을 원하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의 한 평생 가장 큰 보람은 자식을 얻어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잘 가르치고 건강하게 살도록 앞날을 열어줌이라 믿는다.

60세에 이순(耳順)이라 했다. 귀가 순해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입, 그러니까 입까지 순해지는 90, 구순(口順)의 경지는 아직 멀었다. 그 나이까지 살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무튼 입이 순해지기까지는 세월도 많이 남았다.

 

옥과(玉果) 기행에 나서며 먼저 친지신명께 고한다.

하여 쥐와 달구새끼, 그들의 추종자 징그러운 딸랑이들은 빼고 모두들 옥과(玉果)같은 자식 얻어 대대손손 잘 살게 복을 주십사, 기어이 욕 한 자루도 함께 뱉으며 나선다. 그러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늘님께서 쥐와 달구, 그들 발가락 똥구녘 빠는 잘난 인간들은 살기 좋은 천국이나 극락으로 빨리 데려가 주셔도 좋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들 못난 민초들이야, 감히 천국이나 극락 갈 노잣돈도 없으니 그냥 이승의 개똥밭에서 제 수명대로 살게 해주시고 말이다. 하긴 이런 말에 눈 하나 깜짝할 종자들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전차로 참으로 옳고 그름이 없는 더러운 세상이기도 하다.

 

이번 옥과 기행은 다른 때보다 나그네에게 큰 복이 있었다.

평소 존경하는 벗, 해강(解江) 김성백, 자연(自然) 안창순 선생이 함께 해서다. 이 두 분은 평생을 교육계에 헌신하고, 덕을 쌓은 분이다. 지역사회에서도 지도자로 헌신하고 이웃들께 존경받는 분들이다. 고단한 나그네로서 모처럼 두 분과 함께 나그네 길을 했으니, 머리글에 기록을 남기고 기행기를 적는다.

 

곡성의 숨은 선비 구례도 하려니와.

호남가 기행에 곡성은 맨 뒤쪽에서 노래를 부른다. 한 군단위에 고을 이름이 2, 3, 4(고창군으로 고창, 고부, 흥덕, 무장)까지 거론되기도 하는데, 곡성도 곡성과 옥과, 그렇게 2곳이다.

한 지역에 이름 나오는 고을이 많음은 사람 살기에 좋은 고을이란 말 아니겠는가? 따라서 숨은 선비가 있는 곡성 고을은 다음에 기행기를 올리겠거니와 오늘 가는 곳은 곡성군 옥과읍이다.

 

개구리 울음 소릴 부적으로 잠재웠다는 전설이 이곳 옥과에 있다. 이 전설은 장흥 천관산 아래 계향동(현재 관산읍 방촌리 계춘동) 위백규 선생의 생가 서실 앞의 연못 옥련정에도 있는 전설이다. 장흥 기행에서 언급했기에 이 기행길 읽어본 독자는 되돌아 기억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호남 3대 천재로 불리우는 존재 위백규 선생은 개구리 울음 소릴 잠재운 전설을 이곳 옥과 현감 재임 시절에도 남겨 놓았다.

개구리 울음소리? 길게 얘길 할 필요가 없다. 민초들의 원성이 곧 개구리 울음 소리 아니겠는가?

흔히들 시끄러운 개구리 소리를 악머구리 끓듯 한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여기서 개구리 울음소리는 탐학한 사또에 대한 민초들의 원성이었을 게다. 그러니 여기서 악머구리 끓듯 하는 개구리 울음 소리를 잠재웠다는 것은 위백규 현감의 선정으로 인해 민초들의 원성이 없었다는 또 다른 표현이라 여겨진다.

 

이곳 옥과에 천광호(天光湖)란 인공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옥과 우체국 건물 뒤쪽 길을 따라 이제는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천광호를 찾아갔다.

하늘 천()자 모양을 딴 이 호수는 조선 성종(成宗) 때 현감 방옥정(房玉精)이 노주선(鷺洲仙)이란 기생과 뱃놀이를 즐기려고 팠다고 한다.

현감이 기생과 뱃놀이를 즐기려고 팠다는 일화에는 조금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러더라도 그 천광호가 온전히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지금은 조선 선조 때 시인 백호 임제(1549~1587)가 쓴 천광호라는 석비만 남아있어, 당시의 호수를 그려보기가 쉽지 않다.

일설로 고려 헌종 때 구주(龜州)대첩의 명장 강감찬(姜邯贊 948~1031) 장군이 이곳에서 쉬다가 악머구리 끓듯 하는 개구리 울음 소리를 부적으로 잠재웠다고도 한다. 옥과에 현감이 있게 된 게 1400년대여서 연대 차이가 있으나, 이로 미루어 볼 때 고려 때에도 작게나마 연못이 있었다는 생각이고, 방옥정 현감이 그 연못을 뱃놀이를 즐길 정도로 넓혔지 않나 추측만 할 뿐이다. 또 노주선이란 기생이 고려 때에도 있었던 것으로 봐서 이곳 옥과현의 명기들은 노주선이란 이름을 즐겨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다시 천광호의 옛 모습을 찾도록 복원하면 어쩔까 하는 생각이다. 뱃놀이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속죄를 위함이다. 우리 인간이 개발이나,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많은 자연을 훼손했는지,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깝다. 쓰잘데기 없이 사()대강에 돈을 쏟아 붓을 것이 아니라, 옛 것을 새롭게 되새기는 일에 쓰였음, 그나마 욕을 줄이기라도 할 것이다.

그런 심정으로 맘속에 옛 천광호의 아름다운 풍취를 상상하며 천광호 석비와 그 터에 세워진 만취정(晩翠亭)을 둘러본다. 이 만취정은 현재 노인회에서 사용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이 만취정 뒤에 옥과현의 정청(政廳)인 동헌(東軒)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 만취정 옆으로 옥산사(玉山祠)가 있다. 옥산사는 임진왜란 의병장 유팽로 선생을 모신 사당이다. 유팽로 선생은 그의 생가 합강 마을에서 이야기 하겠기에 여기서는 언급만으로 넘어가겠다.

또 이 옥산사 옆에 자그마한 성황당(城隍堂)이 있었다. 이중으로 자물쇠가 잠겨있어서 안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는데, 이곳에 남녀 목조신상(木造神像)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이 성황당은 고려 신종(1197~1204) 때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한 학자로 한림학사를 지낸 조통 장군과 그를 사모한 아왕공주(我王公主)를 모신 곳이다.

이들에 얽힌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아왕공주(我王公主)는 고려의 왕녀로, 본명이 공심(公心)이었다. 공주는 이름난 대장부 조통을 연모했다. 하여 사랑을 고백했고, 사랑은 깊어갔다. 마침내 부왕의 허락을 얻어 결혼을 하자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조통은 처자가 있었다.

고민 끝에 조통은 공주와 헤어지기로 결심했다. 때마침 북변(北邊)이 어지러웠다. 조통은 왕에게 자원하여 북변을 정벌하는 장군으로 개경을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조통은 적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군사를 잃었고, 자신도 왼손이 잘리는 부상을 입었다. 조통은 군직을 사퇴한 뒤 불구의 몸을 이끌고 곡성군 입면 약천리로 낙향하였다.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며 숨어 살다가 부상이 악화되어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공주는 조통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렸으나, 그의 행방마저도 알 길이 없게 되자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은 날로 깊어갔고 끝내 미치고 말았다.

부왕은 공주를 영험한 산신령이 있는 남산으로 보냈다. 공주는 남산에서 기도와 가무로 산신을 지성껏 섬겼으며, 효험이 있어 완쾌할 수 있었다.

공주는 이곳에서 득도한 무속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남산을 떠나기로 했다. 공주는 부왕이 친필로 써 준 이 도()를 받으라는 글귀를 말머리에 붙이고, 말이 가는 대로 몸을 맡겼다.

공주를 태운 말은 전주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옥과 고을에 이르러서는 더 나아가지 않고 주저앉았다. 그러자 공주는 이곳에 정주하라는 신의 뜻이라 생각하고 옥과를 종신의 땅으로 삼았다 한다. 명기 노주선의 집인 노주각에 살면서 남도 각지에 무속을 전하고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공주는 우연히 이곳 옥과가 조통의 고향임을 알았다.

하지만 조통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공주는 정인 조통의 묘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면서 무()의 전수에 힘쓰다가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공주의 죽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부왕은 그녀의 슬픈 넋을 애도하며 조통과의 사후 결혼으로 위로를 했다. 또 두 사람의 목상(木像)을 옥과의 수호신으로 하여 성황사에 모시라 했고, 제사를 받들 제답(祭畓) 100여 두락까지 내렸다는 것이다.

현재의 목상은 약 5백 년 전에 다시 새긴 것으로 보이며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 2호로 지정이 되었다. 남상은 서있고, 여상은 더 정교하고 아름다운데 편히 앉아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조 장군님! 정말 잘 못 하시었소. 당시 두 사람의 아내를 맞이하는 게 큰 흉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오. 지금 이 나그네가 두 분이 계신 곳을 들여다 볼 수도 없지만, 보지도 않을 테니 그곳에서 뜨겁고 가없는 사랑 천년만년 누리며 행복하시오.”

호기심이 일었지만, 볼 수도 없고 해서 조통 장군께 같은 남자로서 한 마디 하고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이어 모처럼 향교를 찾았으나, 꼿꼿한 유생들의 반듯한 가르침 하나 얻지 못하고 굳게 닫힌 명륜당과 대성전 건물만 하릴없이 바라보다 나왔다. 봄볕에 만물은 소생하고 방창하건만, 정처 없는 나그네 걸음에 역시 향교는 너무 높은 곳이었다.

  

 <만취정>

 <천광호, 임제 선생 글씨>

 <옥산사>

 <성황당>

   <옥과 향교>

마지막 걸음으로 임진왜란 의병장 유팽로 선생 생가 마을을 찾았다.

먼저 곡성읍에서 점심을 먹었다. 옛날 반찬에 돼지고기 숭덩숭덩 썰어서 끓인 김치찌개에 금세 행복해진 뒤 옥과천과 섬진강이 합쳐지는 마을 합강리(合江里)를 향했다.

가는 길이 천혜절경이다. 섬진강이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거야 익히 알지만, 자칫 운전대를 놓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강변 풍광이 아름다웠다.

오살놈들! 이렇게 아름다운 강들을 개발한다고 시멘트를 쳐 발라 버리다니. 자연이 죽으면 그 자연에 기대어 사는 생명도 죽는다는 걸 왜 모를까? 하긴 쥐나 닭 종자들이 알 거라고 기대하는 게 어리석은 일이지.”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점잖지 못하게 욕이 나온다. 아무튼 이 섬진강만은 개발이나 보호를 핑계로 더 이상 개발하지 않았음 한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가 가장 현명한 보호이고 개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입으로는 욕을 했지만, 눈과 마음은 4월의 햇살 아래 만화방창이다.

잠시 청계동 계곡에 차를 세운다. 이 청계동 계곡은 청계(靑溪) 양대박(梁大樸1544~1592) 의병장의 유적지다.

장군은 조선 중종 39(1544)에 남원 양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곳 청계동에 들어와 정자(亭子), 내외사(內外舍), 노가(奴家) 등 총 25동의 건물을 짓고 청계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일종의 둔전병(屯田兵) 조직과 같아서 임진왜란이 일자, 그들이 바로 의병이 되었으니 실로 혜안이 남다른 우국지사였다.

불의에는 엄하였으나 너그럽고 호탕한 성품으로 오룡마(烏龍馬)라는 준마를 타고 가보인 검을 휘두르며 무예를 익혔다 하는데, 상상만 해도 늠름한 대장부의 기개가 넘쳐흐른다.

청계(淸溪)라는 말은 맑고 깨끗한 시내를 뜻하지만, 민속적으로는 못된 잡귀의 하나로 사람에게 씌워서 몹시 앓게 하는 악귀이기도 하다. 바로 청계라고 우쭐대는 쥐박이를 일컬음이다.

불의를 처단하는 청계(淸溪) 양대박 장군이 이런 싸가지 없는 청계악귀를 그냥 두는 거 보면 이승과 저승이 다르긴 다른 모양이다.

아무튼 이 분 양대박 장군은 다음 곡성 기행에서 좀 더 가까이 만나 뵈올 터이니, 오늘은 옥과의 유팽로 의병장을 먼저 만난다.

    

<청계 계곡 들머리>

월파(月坡) 유팽로(柳彭老 1564-1592) 장군과 청계 양대박 장군은 고경명 장군 휘하에서 좌우부장을 맡았던 분들이다. 옥과 합강리와 청계동은 섬진강의 흐름을 따라 위아래 동네였고, 두 분은 이종 사촌간이었다 하니 손발이 척척 맞아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리라.

유팽로 장군의 자()는 군수(君壽) 호는 월파(月坡). 조선 명종19(1564) 224일 옥과면 합강리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은 충주판관(忠州判官)과 순창군수(淳昌郡守)였던 유경안(柳景顔), 모친은 남원 윤씨다. 효성(孝誠)이 극진하고 영특하여 6세 때(1569) 부모님에 대한 효행시를 지었다 한다. 선조12(1578) 사마시 급제, 22(158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 學諭)로 제수되었다.

부모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시묘살이 중 곧 선조의 부름을 받고 선조25년 임진년(1592)29세로 홍문관 박사(博士)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임진왜란 발발 7일만인 420일 전북 순창에서 500여명의 의병을 모아 기병하였다. 전라도의병 진동장군 유모(全羅道義兵 鎭東將軍 柳某)라고 쓴 대청기(大靑旗)를 높이 들었다. 진동은 처음으로 일으킴을 뜻하며 청색은 동쪽을 뜻하니, 곧 동쪽의 왜적을 섬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511일 임실군 갈담역 전투에서 의병 최초의 첫 승리를 하는 등, 각처의 의병들에게 구국의 열정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위대한 역사의 분수령으로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 뒤 고경명, 양대박 장군과 함께 담양 추성관에서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며 혈맹을 맺고, 속내의에 이름을 기록하여 죽음으로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의병 6000명을 이끌고 1592611일 담양을 출발했다. 624일 전주에 도착하여 왜군의 북상을 막기 위한 전투를 준비한다.

마침내 78, 장군은 금산성 전투에 선봉장이 되어 출전하였다가 이틀 뒤, 순절하였으니 나이 29세였다.

돌이켜보면 81일간의 짧은 의병활동으로 인해, 장군의 위대한 업적과 정신은 그동안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다. 친일매국의 무리가 아직도 대세를 점하고 있는 현실에서 무얼 기대할까? 역사 앞에 깨어나야 한다는 당위성만 대답 없는 메아리로 외칠 뿐이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유팽로 장군은 최초의 의병장이었다 한다. 장군의 출생지인 합강리에 들어서면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이란 기념비가 자랑스럽게 나그네를 맞이한다.

기록을 살피면 1592413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제 118,700명이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마침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도 의령(宜寧)에 낙향에 있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장군이 9일 뒤인 22일 의병 천여 명을 모집하여 왜적 토벌에 나섰다.

유팽노 장군의 기병일(起兵日)1592420일이고, 곽재우 장군이 기병한 날이 422일이어서 유팽로 장군이 더 앞선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도록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졌고, 속수무책으로 국방이 허술했던 게 논의의 초점이지, 누가 먼저 기병했느냐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글을 읽었던 선비로서 나라를 위해 분연히 칼을 들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그 용기와 정신이 만고에 귀감이 될 뿐이다.

우스개소리기도 하지만,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인지 안 일어날 것인지를 아는 것은 쥐와 달구 등 딸랑이들이 미국으로 몰래 도망가느냐, 안 가느냐를 살피면 된다고 한다.

그 잡 것들이 우리들 알게 갈랍디까? 통일도 도둑처럼 온다는 놈들이니 도망도 도적놈처럼 몰래 가겠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이 나라의 땅과 사람을 지키는 것은 몰래 도망도 못가는 짠한 사람들의 몫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유팽로 장군 같은 지식인 선비가 목숨을 내놓고 기병했다는 것은 하늘님과 같은 의로움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유팽로 장군과 얽힌 일화가 있다.

충청도 공주에 양산인이란 처사가 살았다. 이집에 검은말이 있는데 발이 5개에다 성미까지 사나워 애를 태운다고 했다. 장군이 고향 옥과로 낙향하던 도중 이 소식을 듣고 공주에 들렸다. 유팽로 장군을 보자, 말은 거짓말처럼 순해졌고 지시에 따랐다. 이에 그 오족의 말을 인계 받아 오족의 가운데 발 한 개를 절단하고 타고 왔다고 한다. 이 말을 오리마(烏悧馬)라 불렀다 했는데, 오족마(五足馬)이기도 해서 그렇게 불렀지 않나 싶다.

아무튼 이 말은 빠르고 용맹하기도 했지만, 영특하고 충성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유팽로 장군이 출정한 뒤, 부인 원주김씨는 후원에 단을 쌓고 남편이 전투에서 이기고 돌아오기를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나와 보니 오리마가 입에 무엇을 물고 있었다.

충청도 금산 싸움에서 유팽로 장군이 전사하였다. 그러자 오리마가 장군의 머리를 물고 삼백리 밤길을 달려 합강리까지 온 것이다. 그 뒤 오리마는 마구간에 들어가 9일이나 여물을 먹지 않고 울다 죽었다 한다. 지금 합강리 마을 앞 들녘에 있는 의마총이 바로 그 오리마의 무덤이다.

 

또한 합강리 마을 뒤 양지바른 언덕에 부인의 열행(烈行)을 기린 유월파 정려각(柳月坡 旌閭閣, 전남 문화재자료 25)은 유팽로 장군의 호를 붙인 정려각으로 충신(忠臣), 열부(烈婦), 충마(忠馬)를 기렸다 하여 삼강려(三綱閭)라고도 부른다 한다.

장군의 유문집으로 월파집이 있는데, 이 월파집은 31책으로 1권은 시와 상소문, 격문이 있고, 2권은 설()과 잡저(雜著), 3권은 일기라고 한다.

 

유팽로 장군의 탄생지인 합강리 마을을 둘러본 날은 참으로 날씨가 화창했다. 이런 날 훌륭하고 귀감이 되는 선열들을 만나 뵈워서 행복한 날이었다.

그리고 또 끝으로 기어이 한마디 덧붙인다. 이런 곳은 누구보다도 민초들의 고혈을 빨고, 기름을 짜 집안 장롱에 수십억씩 숨겨놓고 호의호식하는 무리들이 와서 참배해야 한다. 코에 밧줄을 꿰어 끌고 와서 진정한 애국 애민 정신을 배우게 해야 한다.

말해놓고 보니 참으로 부질없는 말을 했구나 싶다. 텁텁한 막걸리나 한 잔 마시고 말건데. 후회를 하며 이제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이라. 나그네는 이 세상 평화를 위해 거스르지 않고 화합하는 고을 화순을 찾아간다.

    

 <합강 마을>

 <고샅 벽화>

 <정열각>

 <6세 작시>

 <의마총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