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3
남원의 봄에 각색(各色)화초(花草) 무성(茂盛)하니 무장(茂長) 고을 아름답다
남원 땅 봄나들이를 마친 나그네는 이제 온갖 예쁜 꽃이 무성하게 피어나 향기를 품은 터 무장 고을을 찾아든다.
먼저 이 작은 고을 무장이 왜 호남가에 나오는 큰 고을들과 당당하게 이름을 겨루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본다.
먼저 무장면의 유래를 살폈는데, 자세한 기록은 없고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필 수 있었다.
무장(茂長)은 백제 때 송미지현과 상노현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현에 나뉘어져 있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송미지현은 무송현으로 상노현은 장사현으로 개칭되었다. 조선 태종 17년(1417)에 무송과 장사 두 현을 통폐합 양현의 첫 글자를 따서 지금의 무장현이 되었다. 1895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동학 농민혁명으로 인해 무장군이란 이름을 잃고 전주에 소속 되었다. 고종황제 32년(1914)에 1동(1東), 2동(2東)이었던 명칭을 다시 옛 이름 무장군으로 되찾았고, 1935년에 석곡면의 일부를 편입 무장면이 되었다.
무장현 당시의 영역은 현의 중심지에서 동쪽은 고창현 경계까지 14리(5.6Km), 서쪽은 바닷가까지 29리(11.6Km), 남쪽은 영광군 경계까지 23리(9.2Km), 북쪽은 고창현 경계까지 16리(6,4Km)였고, 서울까지는 6백 53리(272Km)였다.
이 무장에 가기 전에 고창군 성송면 양실 마을에 사는 향토사학가 김영호 씨를 만나 길 안내를 받았다.
그 덕분에 그곳 성송면의 역시 동학농민혁명의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손화중 장군의 거소와 도소를 둘러볼 수 있었다.
“이곳 성송면은 예전에는 무장현 양복촌이었지요. 고려 때는 무송현 소속이었고요.”
손화중에 대해서는 나중에 한 번 더 얘기할 기회가 있을 거여서 여기서는 간단히 기술하고 넘어갈 생각이다.
동학교 지도자이고 농민혁명 당시 전봉준의 최대 조력자였던 손화중은 정읍 입암 사람이라 했다. 그가 이곳 무장현 양복촌(현 성송면 양실 마을)으로 들어온 것은 이곳이 당시 법성포쪽에서 서울로 가는 큰길이 지나는 곳이기 때문이라 했다. 더하여 이곳에는 청송역(靑松驛)과 큰 시장이 있어서 각처의 장사꾼들이 들고 나는 곳이라 여러 지역과의 연락 연결이 편리한 곳이었다.
지금은 모두가 논밭이나 잡초 우거진 비탈로 변했지만, 지금의 큰길가에 8칸 겹집의 큰 객주가 있을 정도로 북적이는 시장터라고 했다. 먼저 시장터였다는 청송 마을을 둘러봤다. 8칸 집 객주는 지금 비닐하우스가 세워져 있었고, 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청송 마을로 들어서면 대장간, 마구간 터가 좌우로 있다.
종이와 지필묵을 팔았다는 지전거리, 백정들이 잡은 고기를 내다 팔았다는 육전, 왼쪽으로 보이는 산 아래 쪽에 유기그릇을 직접 굽고 파는 유기전이 있었다 했다. 또 주막도 한 군데 더 있었는데 지금은 논밭이 됐지만 그 일대가 다 시장이었다고 한다.
또 7대째 그곳에서 살고 있다는 김영호 씨의 말에 따르면 당시 청송역 인근 논들의 이름이 갓집 논(대갓집 받들기 위한 논), 방망이논(나졸들 방망이 만드는 비용) 서당논(훈장 식량 제공) 버선논(나졸들 버선 비용) 짚세기논(나졸들 짚세기 비용) 등인데, 이를 보면 당시 관아의 아전들이 얼마나 백성들을 괴롭히고 수탈하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아무튼 손화중은 그곳 양실 마을의 솥공장 옆에 3칸 짜리 움막(방, 부엌, 신당)을 짓고, 공장 일꾼들과 머슴들을 상대로 글을 가르치고 동학교리를 설파했다고 한다.
수탈과 학정에 시달리고, 양반의 위세에 주눅이 들어 살던 촌민, 머슴들은 모두가 다 평등한 세상, 모두가 다 똑 같은 인간이라는 말에 홀딱 빠져들었다고 했다. 손화중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났다. 호남 지역 최대의 교세가 되었다.
후일 전봉준이 손화중의 협조를 얻고서야 동학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또 손화중이 이곳 무장에서 농민들과 머슴들의 신망과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존경을 받은 하나의 사건이 있다고 전해진다. 바로 ‘선운사 도솔암 마애석불 비기 탈취 사건(禪雲寺磨崖石佛秘記奪取事件)’이다.
조선 후기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해이해지면서 농업, 산업, 수공업, 신분 제도 등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더욱이 조선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심이 흉흉했다. 이는 오래전의 예언으로, 조선 왕조는 5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는 민중들의 바람에 부응하여 새로운 사상이 도래하였다. 곧 동학사상으로, 특히 고창 지역은 손화중에 의해동학사상이 팽배해 갔다.
선운사 도솔암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마애석불이 있었다. 바로 선운사 도솔암 왼편 칠송대라 불리는 암벽에 양각되어 있는 미륵 좌상으로 머리 위 암벽에 사각형 구멍이 10개 이상 있다. 전설에 따르면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은 백제 위덕왕이 검단선사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을 새기고, 그 위 암벽 꼭대기에 동불암(東佛庵)이란 공중누각을 지었다고 한다. 따라서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을 ‘동불암 마애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마애불 가슴 한가운데에는 배꼽과 같은 돌출부가 있다. 여기에 비기가 들어 있는데, 이 비기를 꺼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또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하는데, 비결과 함께 벼락살도 들어 있으므로 거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 했다..
1820년 전라감사 이서구가 도솔암 마애불의 배꼽에서 서기가 뻗치는 것을 보고 뚜껑을 열어보니 책이 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벼락이 치는 바람에 ‘이서구가 열어 본다’는 대목만 얼핏 보고 다시 넣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뒤로 여러 사람들이 열어 보고자 하였으나 벽력이 무서워서 열지 못하였다. 그런데 무장 지역에서 최대 동학 조직을 가지고 있는 손화중이 동학교도들과 함께 이 비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당시 황현의 ‘오하기문’과, 김재홍(金在洪)의 ‘영상일기’에 의하면 1892년 8월 전라도 무장현에 오늘 날의 지명수배와 같은 큰 지목(指目)이 일어났다. 현의 동학 우두머리는 물론이요, 동학당이라면 무조건 잡아들여 무장 감옥에 가두었다. 선운사 용문암 석불 배꼽에 있는 비결을 훔친 것은 강도 행위이며 역적모의라는 것이다. 관헌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동학당 영수 강경중(姜敬重), 오지영(吳知泳), 고영숙(高永叔) 등 세 사람을 주모자로 몰아 사형을 선고하고 옥에 가두었다.
그러자 각지의 동학교도들 수천 명이 이들을 구하기 위해 무장을 에워싸고 관아를 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무장현감은 도망가고 죄수는 탈옥하였다.
이 일로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은 점차 심해졌지만, 오히려 동학교도의 수가 점차 늘어갔다. 무장, 고창, 영광, 흥덕, 고부, 부안, 정읍, 태인, 전주, 금구 등 각 고을의 관속(官屬)은 물론 동학에 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더욱이 이 비결을 당시(1892년) 무장에서 포교하던 손화중이 꺼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손화중의 접(接)에만 수만 명의 새로운 교도가 몰려들었다 한다.
이 일은 손화중포(孫化中包)에서 비결을 이용하여 교세를 확장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도 있다. 동학 농민혁명과 직접적인 관련 사실에 대한 근거는 없지만 당시에 이 일이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사실이다.
아무튼 이 일로 동학 농민혁명 당시 손화중포가 동학 교단의 최대 세력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의 조직에 이상과 힘을 실었고, 손화중은 전봉준과 함께 대중적인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다. 일세의 풍운아 손화중의 거소는 아무런 흔적도 없고, 무심한 대나무가 농민군의 죽창을 그리워하는 듯 죽세(竹勢)를 이어가고 있었다.
손화중의 도소였다는 이웃 괴치 마을의 최 부잣집 사랑채도 마찬가지였다. 집도 비었고, 사랑채도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2012년 초가을 뭉게구름만 파아란 하늘 높이 솟구쳐 보는 눈만 아팠다.
당시 그 번창했던 청송역은 동학혁명 이후 삼례역으로 통폐합 되었고, 시장 역시 폐쇄 되어 대산면으로 옮겨졌다. 동학농민혁명 터는 그저 풀 한포기 돌멩이 하나 없이 깡그리 흔적을 없애 버린 것이다.
김영호 씨의 후일담인데 당시 손화중이 관군에 잡혀 취조를 받으며 이곳 무장의 양실 거소는 숨기고 도소였던 괴치만 알려줬다고 한다. 피해를 줄이고 거소에서 입은 은혜 때문에 한 곳은 숨겼던 것이라 했다.
손화중의 체포 일화에 이런 사연도 전한다.
1894년 11월 전봉준의 공주패전 후 손화중은 나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더욱이 태인 전투를 최후로 대세가 재기불능에 이르렀고 11월 27일 광주 진격을 마지막으로 12월 1일(양력 12월 27일) 마침내 농민군은 해산되었다.
쫒기는 처지가 된 그는 몸을 피해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高敞郡富安面鞍峴里) 이모씨(李某氏)의 제실(祭室)로 들어갔다. 하지만 12월 11일(1895, 양력 1월 6일) 제실직(祭室直)이인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관군에 잡혀 전주감영(全州監營)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숨겨진 비화 한 토막이 있다.
죽음을 같이 맹세했던 전봉준, 김개남이 이미 관군에 잡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손화중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조용히 이봉우를 불렀다.
‘네가 나를 고발하여 후상을 받아라. 그동안 너에게 진 은혜를 갚겠다.’
그 결과 이봉우는 후상을 받고 평안남도 증산(甑山)군수를 제수 받았다.
손화중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1895년 3월 30일 새벽녘 전봉준의 뒤를 따라, 김개남 등 동지들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그 때 나이 35세였다.
또 양실 마을 농민군에 얽힌 일화 한토막이 있다. 무장현의 농민군 토벌 작전 때 김상경 대장이 김영호 씨의 고조부였는데, 이분이 나주 목사를 통해 임금께 상소를 올려 수많은 농민군을 살렸다 한다.
양실 마을 뒤쪽으로 서해안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당시 그곳에 작두를 내놓고 혁명에 가담한 농민들의 목을 베기 위해 끌어냈다고 한다.
마침내 형이 집행 되는 날이다.
‘농민이 있어야 농사를 짓고, 농사를 지어야 세금을 거두어 나라가 산다’는 상소문을 임금께 올리고 애타게 하회를 기다리던 김상경 대장이 마침내 나주목사로부터 답서를 건네받은 것도 바로 그 날이었다 한다.
직접 나주목까지 가서 문서를 받아든 김 대장이 쏜살같이 말을 타고 달려왔으나 아쉽게도 한 명을 처형한 뒤였다,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방면 되어 더 이상의 농민들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양실 마을의 이야기다. 힘없는 동학농민들을 외세의 힘까지 빌려 무지막지하게 학살한 조선 벼슬아치들의 야만성, 인혁당 재판 다음 날 아침 가족의 면회도 시켜주지 않은 채 사형을 집행한 박정희 군사독재의 뿌리가 먼 곳에 있지 않은 것이다. 민초들이 깨어나지 않는 한 동학농민혁명 학살과 인혁당 사법살인의 역사는 되풀이고 반복일 뿐이다.
<무장현의 청옥역 시장입구 8칸 주막집이 있던 자리. 비닐하우스가 주막집을 대신한다.>
<청옥역 시장 거리. 동학혁명 이후 이 시장은 폐쇄되었다.>
<청옥역 시장 유적지를 지나 손화중 유적지 가는 길>
<손화중 거소. 솥공장이 있던 자리. 이곳에서 민초들을 깨우쳤다.>
이어서 무장 관아와 읍성을 둘러보러 갔다.
무장성은 사적 제 346호(1991년 2월 26일 지정)로 성내리에 있었다. 남문인 진무루가 정문으로 둘레는 약 1.4km, 넓이 43,847평이라 한다.
성내에는 진무루, 동헌, 객사 등 옛 건물이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보수공사 중이어서 유구들이 산재해 있었다. 그 동안 토성으로 알았는데 보수공사 때에 성곽 일부를 흙과 돌을 섞어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여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만여 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 4개월 동안에 축조하였다 한다.
먼저 돌성곽으로 잘 단장된 진무루를 둘러보고, 면사무소로 이용되었다는 선조14년(1581)에 건립된 객사(客舍)쪽으로 갔는데, 현재도 보수중이어서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송사지관(松沙之館)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다. 객사에는 외대문, 중문, 좌우 익랑도 있었으나 소실되었다고 했다.
조선조 때 고창군에는 고창현과 무장현, 그리고 흥덕현이 있었다. 직선거리로 50여키로의 거리에 현이 3개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지도를 보면 무장현과 흥덕현, 고창현이 삼각형을 이루는데 고창읍성이 그 삼각형의 꼭지점의 위치라 할 수 있다. 서해를 통해 노략질을 하는 왜구들을 막기 위해 그러한 배치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는데, 무엇보다도 물산이 풍부하여 사람이 많이 모여 살았던 때문이리라. 각색 화초 무성한 무장이란 이름이 왜 생겼을 것인가에 답이 있다는 생각이다.
송사지관을 나와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송덕비 쪽으로 갔다. 정말 훌륭한 지방관들이었을까? 그 중에 눈에 띠는 송덕비가 둘 있었다. 하나는 돌이 아닌 쇠로 만든 송덕비였다. 쇠공덕비는 두 개였는데 한 개는 일제가 전쟁 때 뽑아다가 포탄을 만들었다고 했다.
또 다른 하나는 밑받침돌 거북이 머리가 옆으로 삐뚤어진 송덕비다. 송덕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이의 머리가 바르게 앞을 봐야 하는데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정을 베푼 목민관도 아닌데 송덕비를 세우라하니 장난을 친 거라 했다. 민초들이 억지 춘향 노릇을 하며, 말은 못하고 요샛말로 두 손가락으로 쿡 아래쪽에 엿을 먹인 거였다.
어쨌거나 저승에 가서라도 훌륭한 목민관이 무엇인지 잊지 않길 바라며 마지막으로 내아를 향했다. 예전에 내아 앞뜰이 초등학교였다고 한다. 앞으로 잘 복원하고 다듬어 무성한 무장면민의 역사의 배움터요, 쉼터가 되었음 한다.
<무장면 소재지>
<무장읍성>
<무장읍성>
<무장읍성 객사>
<송덕비>
<거북 고개 삐튼 송덕비>
<고개 바른 송덕비>
이어서 구수네로 향했다. 동학혁명의 본격적인 깃발을 내건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인 무장기포지가 바로 그곳 구수네라고 했다. 많은 내가 모여 큰 내가 되는 곳이라 하여 구수네라고 했다는데 현재는 공음면에 속하고 냇물은 법성포 쪽으로 흘러가 서해로 합류한다고 했다.
냇가 옆 너른 터가 동학농민군의 훈련장이었고, 이곳에서 고부로 진격했다. 작게는 탐관오리 조병갑이가 없는 꼬리 빠뜨리고 도망을 치게 만든, 크게는 동학혁명의 들불을 전국적으로 번지게 한, 애민과 만민평등의 사상을 도도히 흐르게 한 역사의 현장이다.
동학혁명 기념탑에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3인의 이름으로 된 포고문이 새겨져 있었다.
다음은 기념탑에 새겨진 포고문의 내용이다.
동학농민혁명포고문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가장 큰 인륜이다. 인군(人君)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아들이 효도한 후에야 나라가 무강의 역(域)에 미쳐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상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상하고 자애하며 정신이 밝아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니 현명하고 방정한 신하가 있어서 그 총명을 보좌한다면 요순의 덕화와 문경의 다스림을 가히 바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지금 신하된 자들은 보국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갓 녹위만 도적질하여 총명을 가리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충성되이 간하는 말을 요언이라 이르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라 하여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탐학하는 관리가 많도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변하여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아가 몸을 보존할 계책이 없다. 학정은 날로 심하고 원성은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義理)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명분은 무너지고 말았다. 관자가 말하길 사유(四維)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만다고 했는데 오늘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공경부터 방백수령까지 모두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자신을 살찌우는 것과 가문을 빛내는 데에만 급급하여 사람 선발하는 문을 돈벌이로 볼 뿐이며 응시의 장소를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만들었다. 허다한 돈과 뇌물은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배만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과 더러운 일만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니 8도는 어육이 되고 만인은 도탄에 빠졌다. 수재(守宰)의 탐학에 어이 백성이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도 망하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밖으로는 향제(鄕第)를 설치하여 오로지 제 몸만을 위하고 부질없이 국록만을 도적질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토지를 부쳐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사니 어찌 국가의 존망을 앉아서 보기만 하겠는가. 8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서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경동(輕動)하지 말고 각자 그 생업에 편안히 하여 함께 태평세월을 빌고 임금의 덕화(德化)를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이겠노라.
1894년 3월 20일 호남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포고문 기념탑 옆 작은 정원을 만들고 소나무 세 구루가 심어져 있었다. 동학혁명 유족과 후예들이 심은 지역갈등과 조국의 번영을 염원하는 화합과 대동의 나무였다.
마을 앞 동각에는 그 마을 출신인 듯 싶은 한 농민군의 기념비가 있었다. 그 마을에 살면서 수천 농민군들의 끼니를 책임졌을 것이다. 구슬땀 흘리며 잰 걸음으로 이것저것 수발을 들었을 그 농민군의 건실한 모습이 잠시 눈에 그려졌다.
착각은 자유라고 했다. 그 사람의 땀방울인 듯, 그 농민군의 심정이 되어 이마에 땀을 훔치다가 살며시 웃었다.
그렇게 구수내 동학농민혁명 발상지를 뒤로 했다.
종일 발품을 팔았더니 목이 컬컬하다. 인근 ‘대서 할머니 동동주’가 맛있다고 했다. 텁텁한 그 대서 할머니 막걸리에 갓 담은 김치가닥을 곁들이니 천하가 다 내 것이라.
높은 놈이고 하대 받는 민초건 간에 먹어야 산다. 그렇다고 하루 열 끼를 먹을 순 없지만 먹어야 산다는 것 그게 또 진리이다.
<동학발상지 구수네>
<기념탑>
<화합의 소나무 세그루>
<구수네 마을에 살았다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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