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을 두른 아름다운 산하, 금산과 그렇게 작별하고 또 다른 금산을 찾아 충청남도로 간다.
능주의 붉은꽃은 골골마다 금산이라.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이라는 노랫말이 있다. 따사롭고 평화로우며 인정이 철철 넘치는 내 고향 마을의 꽃인 복사꽃, 그 복숭아가 열리는 도화는 봄을 대표하는 꽃이다.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도 향기려니와 그 열매는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천도(天桃)는 천상(天上)에서 열리는 복숭아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복숭아나무를 심어 첫 번째 열리는 열매를 천도라 하고, 부모의 환갑잔치 때 그 천도를 바치는 걸 큰 자랑으로 여겼다. 비단 고을 능주는 그 천도가 열리는 고을이었다.
그 능주가 골골마다 펼쳐놓은 비단 고을 거금도, 고흥 금산은 아름다운 풍광과 풍부한 해산물로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하는 푸른 바다의 보석섬이다. 그 금산을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10월 셋째 주 토요일인 20일에 다녀왔다.
그리고 골골마다 펼쳐진 또 하나의 비단 고을 충남 금산을 찾은 것은 초겨울의 문턱인 11월 첫 일요일이었다.
백제시대에 금산군(錦山郡)은 진내군(進乃郡)또는 진내을군(進乃乙郡)이라 했다. 신라가 삼국을 병합하고 경덕왕때 진예군(進禮郡)이라 했다.
고려초에는 진예현(進禮縣)이라 했고 1305년(고려 충렬왕 31년)에 금주군(錦州郡)으로 승격 지금주사(知錦州事)를 두어 부리현(富利縣), 청거현(淸渠縣), 무풍현(茂豊縣), 진동현(珍同縣)의 5현을 다스렸다.
그후 1390년에 다시 고산현(高山縣)의 속현(屬縣)이 되었고 1393년(조선 태조2년) 에 만인산(萬刃山:胎峰)에 태조의 태(胎)를 모신후 진주군(珍州郡)으로 승격시켜 지진주사(知珍州事)를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1896년 13도 실시에 따라 충청남도 공주부(忠淸湳道 公州府)의 금산군과 진산군이 전라북도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3월 1일 진산군을 병합하여 현재의 금산군(錦山郡)이 되었다.
그후 1963년 1월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금산이란 지명은 효자 김신 때문에 생겨난 지명이라 한다. 고려 원종 때니까 중국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며 살 때다.
김신은 뛰어난 재능과 총명함으로 고려 원종의 신임을 받았다. 그 원종을 따라 원나라에 가게 된 김신은 원의 성종왕에게도 신임을 받아 국정자문을 해주었고 요양성의 참정이라는 벼슬에 이르렀다.
그러다 고국에 돌아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싶다고 청하자 원의 성종은 ‘만리황풍(萬里皇風)’이라는 글을 써주며 귀국을 허락했다. 만리황풍은 만리 밖까지 황제의 은혜가 끼친다는 뜻이니 성종의 사람 봄을 알 수 있는 글이다. 이에 고려의 충렬왕은 그 이듬해(1305년)에 김신의 고향 진예현을 가까이 있는 다섯 고을을 포함하여 금주군으로 승격시켰다.
김신이 ‘금의환향’했다는 뜻으로 ‘금주’라고 한 것이다. ‘금산’이라는 지명은 이때부터이며, 그 첫 번 째 군수가 바로 김신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금산군수를 지금주사라고 하였다.
이 김신이 귀국했을 때 왜구가 쳐들어와 김신의 어머니께서도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산천이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시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김신은 단을 쌓고, 이레 동안 하늘에 기도를 드렸다. 그랬더니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이 녹으면서 한 줄기 길이 나타났다. 그 길을 따라갔더니, 수많은 해골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시신이 불타 버려, 이번엔 어느 것이 어머니의 시신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하늘을 우러러 기도드렸다.
‘하느님! 내 어머니의 시신이 이곳에 있다면 그 뼈가 곧 변색되게 하소서.’
그러자 맑은 하늘에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천둥 벼락이 쳤다. 그리고 흰 뼈가 푸른색을 변하는 게 있었다. 김신은 그 뼈를 거두어 정성껏 장사 지냈다. 김신을 효자라 부르게 된 사연이다.
그 뒤 김신은 왜구 토벌에 나서게 된다. 스스로 자원하여 도원수 김방경 장군의 좌군 병마사가 되어, 왜국 땅 이끼시마를 향하였다. 그런데 풍랑이 크게 일어 배가 위험하게 되었다. 김신은 뱃머리에 서서 하늘에 빌었다.
‘하느님! 오늘 풍랑이 크게 이는 것은 제가 사람을 많이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모든 게 제 잘못이니 이 부하들을 살려 주소서. 그 대신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김신은 곧바로 바닷물에 몸을 던져서 죽었다. 그러자 풍랑이 멎었다.
김신은 그렇게 충효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김신의 시호가 충간((忠簡)이니 바로 그의 충효를 기리는 뜻이다.
또 금산의 인삼에 얽힌 설화가 있다.
지금부터 1,500년 전 백제시대에 강씨네가 진악산 아래 살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이 홀어머니마저 병으로 눕게 되자, 아들인 강 처사는 진악산 관음굴에 가서 날마다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 진악산 신령이 관앙불봉 바위벽에 가면 붉은 열매 세 개가 달린 풀이 있으니 그 풀의 뿌리를 달여서 어머니께 드리면 병이 나을 거라고 했다.
강 처사는 그 붉은 열매 세 개가 달린 풀을 잔뿌리 하나까지도 다치지 않도록 캐어 정성껏 달여 어머니께 드렸다. 과연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
그 뒤 강처사는 그 풀뿌리의 심어 가꾸었는데, 그 풀의 모습이 사람 모습과 비슷해서, 인삼이라고 블렀다. 바로 금산의 인삼은 하늘이 효자에게 내린 선물인 셈이다.
이 강처사가 인삼을 처음 심었던 곳이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개안이 946번지의 밭이라고 한다. ‘개안이’라는 마을 이름은 ‘인삼의 눈을 트게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인삼의 새싹이 돋아오를 무렵에 이곳에서 제물을 차리고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이 밭머리에 ‘개삼터’를 알리는 비석과 비각이 있고 오늘날에도 금산 인삼축제가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또 강처사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 드렸던 관음굴은 진악산에서 가장 높은 관앙불봉(732m) 동쪽 10여m에 있는 천연 동굴로 열댓 명이 한꺼번에 앉을 만큼 넓다고 한다.
개삼터를 알리는 개삼각 앞마당에는 강 처사가 살던 초가삼간이 복원되어 있는데 이 초가집 뒷산 2Km쯤에 깃발이 있어, 관음굴의 위치를 알려준다고 한다.
아무튼 이 비단뫼, 비단 고을 금산은 예전에 한 두어 번 와본 곳이긴 하지만, 큰 길이 새로 나서 흐린 날에 동서남북이 오리무중이다.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무주를 지나 금산 나들목으로 들어섰다.
인삼밭이 펼쳐지는 주변 풍광도 흔히 볼 수 없는 이국적인 것이었지만 금산시내에 들어서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풍겨오는 인삼 향기가 없는 병도 낫게 해줄 듯 좋았다.
마침 일요일 오전이어서 길이 한가했다. 큰 길을 꺾어 들어가니 인삼판매장 등이 보였다. 그곳 가까운 쪽 가로수 길에 차를 세웠다. 곱게 물들어가는 가로수 길은 주차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어딜 가든지 주차공간을 찾느라 머리가 아픈데, 마침 한가한 때에 찾아오니 맘이 편했다.
각종 형태의 인삼은 기본, 팔뚝만한 마 등 여러 약재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상점 거리에서, 무언가 추억에 남을 일이 없을까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다.
그 순간 인삼튀김이 딱 눈에 들어왔다. 배도 출출한 참이어서 입맛이 확 돌았다. 다른 곳을 대충 둘러보고 그 인삼튀김집으로 갔다.
아직 이른 점심시간이어서 그곳도 한가했다.
“인삼 막걸리도 맛있다오.”
주인장이 권했지만, 음주운전을 할 수 없어서 그냥 한 병 비닐봉지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보니 1.8리터짜리 패트병이라 묵직하다. 쌉사라니 풍겨오는 향취 또한 그만이다. 집에 돌아가서 마실 생각을 하니 침이 꿀꺽 넘어간다.
인삼튀김이 나왔다. 생각보다 두툼하고 먹음직스러웠다. 아삭거리고 바삭바삭 맛있었다. 인삼향기가 곁들여나니 중국 임금이 이런 맛을 보았을까? 조선 황제나 맛 볼 진귀한 보약음식이니 보이는 것들이 모두 넉넉하고 평화롭다.
누가 돈 자랑, 차 자랑, 골프 자랑하면 ‘집에 가서 산삼 깍두기에 녹용 막걸리나 마셔야겠다고 우스개말을 했는데, 인삼 튀김도 흔한 음식은 아니다. 살아생전에 한번쯤 맛보는 호사 아니겠는가?
인삼 튀김에 취했는데, 옆자리의 인삼 막걸리에 취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다. 어떤 인삼이 좋다, 안 좋다, 모두들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얘길 들을 만 했다. 그동안 인삼즙이며, 이런 저런 인삼으로 만든 과자 등을 먹어본 경험이 있어서, 인삼이야말로 인간이 접하는 최상의 음식 중 으뜸이라는 말에 기꺼이 동의가 되었다. 하지만 좋다는 건 아는데, 문제는 그 인삼을 살 수 있는 돈 아니겠는가? 필자야 잠시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지만, 이런 고을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향기만 맡아도 배부를 테니 말이다.
비단자락을 펼친 이 고을을 흐르는 강 이름도 금강이니 역시 비단 강이다. 이웃 고을 장수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이 북서쪽으로 휘돌아 올라 무주와 진안을 지나 이 비단고을을 지나간다. 그런데 이 금강은 이 고을에서는 적벽강이라 부른다 한다. 금산군 부리면 수통리에 30여 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붉은색 기암절벽바위가 있어 이를 적벽(赤壁)이라 하고 강물도 ‘적벽강’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 적벽 아래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넉넉하게 펼쳐진 자갈밭이 한 폭의 그림인바 비단 고을이란 이름이 허투루 생긴 게 아니다. 내년 여름에 다시 이곳 비단 고을에 와서 그 적벽강에도 들려 보리라 마음을 달랜다.
그렇게 인삼으로 비단 자락을 펼친 아름다운 고을 금산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인삼 등 약초로 두른 비단 뫼 금산 고을>
<금산 시가지>
<곳곳이 인삼 등 약초 시장이었다>
<각종 약초들>
<모두가 다 질좋은 금산 인삼>
<인삼 막걸리와 튀김집>
<인삼으로 배 부르긴 처음이다>
*많이 춥습니다. 호남가, 호남시 따라 가는 기행은 새 봄까지 쉴 생각입니다. 새 해 정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흥겨운 마음으로 기행을 떠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2012년 기행을 마치며 큰 소리로 외쳐봅니다.
투표 합시다. 세상을 바꿔봅시다. 징글징글한 거짓과 위선 교만과 탐욕의 인간들을 심판하고 살맛나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봅시다.
특히 젊은이들이여! 그대들이 살아갈 세상이니 꼭 투표합시다.
그동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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