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4

운당 2013. 4. 18. 07:27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4

 

나무나무 임실(任實)이요, 가지가지 옥과(玉果)로다

그렇다. 꽃이 벌 나비와 사랑을 이루고 열매(玉果)되니 나무나무 임실(任實)이라, 생의 환희 이보다 무얼 더 바라랴?

 

각색화초 무장한 무장고을을 둘러보고 이제 그 각색화초와 더불어 온갖 나무들이 튼실하게 열매를 맺는 임실을 찾아간다.

2013년 봄이 무르익어가는 4월 중순인데, 이곳 임실은 아직 봄이 깊이 스미지 않았다. 때 아닌 늦은 꽃샘추위 때문인지, 아직 벚꽃은 만개에 이르지 않았으나 오히려 무르익어가는 그 모습이 청초하고 더 아름다웠다.

 

먼저 임실 땅 오수를 둘러본다. 오수는 오수의견(獒樹義犬)’으로 유명한 고을이다.

예전에 국도를 지나면서 보면 오수의견동상이 길가에서 보였는데, 이제 큰 길이 나버려서, 옛 기억만으로는 그 곳이 가늠이 안 되었다.

작은 면 소재지에서 길을 잃으랴? 무작정 오수면 소재지로 들어가니, 깨끗하고 정겨움이 넘치는 곳이다. 이런 마을에서 살았으면. 그렇게 첫 인상이 좋다.

택시 기사께 물어 오수 의견비가 있는 원동산(園東山)’을 찾아갔다. 오수농협건물을 돌아 골목에 들어서니 의견비 동산이 지나가는 봄과 함께 나그네를 맞이한다.

먼저 의견비 표지판을 읽는다.

의견비(義犬碑) 전라북도 민속자료 1,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이 비는 주인을 위해 죽은 개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최자(1188~1260)의 보한집에 나온다. 지사면 영천리에 살던 김개인(金蓋仁)이 술에 취해서 잠이 들었는데 때마침 들에 불이나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개가 주인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몸에 개울물을 적셔 불을 끄다가 지쳐 죽었다. 뒤늦게 잠에서 깬 김개인은 개의 지극한 마음을 잊지 못하여 개를 묻고 지팡이를 꽂아두었는데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큰 나무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오수(獒樹)라 부르고 마을 이름도 오수로 바꾸었으며 개를 위해 비석까지 세워주었다고 한다. 지금의 비는 1955년에 다시 만든 것이다.’

 

개만도 못한 인간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이다. 하물며 쥐새끼나 달구새끼가 거들먹거리며 우릴 지배하는 세상이다.

지금은 TV를 아예 보질 않지만, 지난해의 기억에 의하면 일요일 어떤 개그 프로에서 있는 것들이 더해라는 대사를 들은 적이 있다.

살기 힘들고 어려워, 먹고 살기 위해서 갖은 짓을 다하는 건 이해가 된다. 그런데 먹고 살만한 인간들이, 더욱이 낫살이나 퍼먹은 인간들이 자기 재물 지키기 위해 쥐새끼, 달구새끼 발가락, 똥구녁을 빠는 세상에서 이 오수의 의견비(義犬碑)’는 낙원에서나 볼 수 있는 기념비라 여겨진다.

다음 지나는 길에는 꼭 들려 의견비에 막걸리라도 한 잔 붓고 마셔야겠다. 음주운전을 해선 안 되니 시간도 충분히 두어, 이 의로운 고을 오수의 정기도 받았음 싶다.

봄비 흩뿌리고 간 맑은 물 흐르는 오수천변 가로수에 물기 오르고 벚꽃이 피었다. 벚꽃 그늘 맑은 물 속 버들치며 붕어, 미꾸라지도 새 봄을 맞으리라. 오수를 떠나는 나그네의 마음이 참으로 평화롭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비가 흩뿌린다. 잠든 뿌리를 일깨우는 봄비이니, 생명의 젖줄이다.

하지만, 환경오염으로 비를 맞으면 머리칼이 빠진다니, 세월따라 낭만도 흘러간 옛 노래다.

지난번 일요일에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TV에서 전국노래자랑이 방영되고 있었다. 밥을 잘 먹다가 송해를 보니 구역질이 치밀었다. 나름대로 노년을 잘 보낸다고 좋게 생각했는데, 이제 그 인간도 내겐 구역질을 나오게 하는 쓰레기가 되었다. 다 인생무상이요, 화무십일홍이다. 흘러간 유행가 일 소절일 뿐이다.

    

 <원동산 공원>

 <의견비각>

 <원동산의 의견상>

 <원동산에 있는 송덕비, 개와 인간의 아름다운 공존>

 <의견비 공원에 있는 의견상>

차창을 구르는 빗방울이 어느덧 멎었다. 임실읍으로 들어섰다. 사선문(四仙門)이 맞아준다.

이 봄날에 웬 횡재랴? 들뜬 마음으로 4 선녀를 만나러 간다. 비온 뒤 무지개 뜨면 선녀가 하강하거나 천상으로 오른다지만, 무지개도 보기 힘든 세상이 됐다. 허나 무지개가 대수랴? 선녀가 사는 고을, 나무나무 튼실한 열매를 맺는 고을 임실 아닌가? 어엿하게 사선문을 열어 나그네를 맞이하니, 임실은 그렇게 선녀가 사는 고을이다.

그렇다. 선녀를 만나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고을, 임실이 곧 천국이요, 극락이니, 지상낙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말 풍광이 아름답다. 선녀가 하강할만한 산자수려한 곳이다. 가벼운 걸음으로 운서정(雲棲亭)에 올라 산과 들과 구비쳐 흐르는 섬진강을 내려다본다. 산과 들과 물이 선녀요, 이 아름다운 정자와 이 정자에 깃든 역사가 또 선녀이니 4 선녀와 함께 이 봄날의 흥취를 즐긴다.

운서정(雲棲亭), 그러니까 구름이 사는 집이다. 가히 나그네의 집이라 할 수 있다. 운당(雲堂), 구름집이란 호를 갖고 있는 나그네로서는 가히 물 만난 고기 격이다.

왜 이제야 이 4 선녀의 고을, 튼실한 열매를 맺는 임실을 찾았는고 싶다. 하지만 지금 시작하면 늦지 않았다 했다. 뒤늦게나마 임실 땅을 밟게 해준 천지신명께 감사 드릴뿐이다. 더하여 임실 고을을 지키고 살아온 이곳 민초들께도 엎드려 큰 인사를 올린다.

 

정면 5, 측면 4칸의 팔작 기와지붕의 이 운서정은 이곳 부호인 김해김씨 김승희가 1928년부터 아버지 김양근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쌀 300석으로 6년간에 걸쳐 지은 정자라 한다. 운서정(雲棲亭),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가정문(嘉貞門)으로 이루어져서 조선시대 본래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데, 수려한 풍광과 어울려 건축미 역시 빼어났다.

운서정(雲棲亭)’과 솟을대문인 가정문(嘉貞門)’의 편액 글씨는 심농(心農) 조기석(趙沂錫)이 썼다고 한다. 솟을 대문의 모습은 벌교 현부자집 대문과 비슷한 양식이었다.

어쨌거나 가진 자들이 기생과 더불어 술 마시고 춤추며 풍류를 즐기기도 했겠지만, 1905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 지역의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세상을 한탄한 망국의 한()이 서린 곳이라고도 하니 김승희의 효심이 빛을 본 셈이다. 또 이곳 운서정 바로 위에 백제 무왕 때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미산성과 각산성이 있으니,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경계를 이뤘던 이곳에서 영토전쟁이 끊이지 않았으리라.

 

운서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사선대(四仙臺)에는 아담한 호수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선녀들의 전설이 서린 곳이라 한다. 2천여 전 진안 마이산(馬耳山)의 두 신선과 임실 운수산(雲水山)의 두 신선이 관촌 오원강(烏院江) 기슭에서 놀면서 병풍처럼 아름다운 주위의 풍경에 취하여 대에 오르기도 하고 바위 위를 거닐기도 하였다 한다. 어느 날 까마귀 떼까지 날아와 함께 어울리고 있을 때 홀연히 네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네 신선과 함께 사라졌다 한다. 그 후로 이 곳을 사선대라 했고 또 까마귀가 놀았던 강이라 하여 오원천, 오원강이라 불렀다 한다.

 

운서정의 아름다운 풍광속에 4 선녀와 노닐다 나오는 길에 박달나무와 산개나리 군락을 본다. 박달나무는 우리 민족의 시원과 관련된 나무이고, 산개나리는 귀한 봄 손님이다. 산길에 노오란 개나리꽃이 또 선녀다. 오늘은 선녀와 만나는 날이고, 선녀와 노는 날이니 입이 귀에 걸린다.

  

 <사선문>

 <사선대>

 <운서정>

 <가정문>

 <가정문에서 운서정을 보다>

 <운서정에서 바라본 풍광>

   <산개나리 군락>

점심은 메기탕이다. 이곳 섬진강 자연산 메기거니 하며 허기를 채우고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옥정호(玉井湖)를 향한다.

과거의 국도나 지방도가 아니고 새로 난 길이어서 네비게이션이 없으면 가던 길을 빙빙 돌 판이다. 눈 감고 문고리 잡는 격으로 네비가 가르쳐준대로 운전을 한다. 만개한 벚나무 가로수에 꽃구름 위를 달리는 기분이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니, 낯익은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옥정호 붕어섬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젠가 한 번 문우들과 찾았던 정자다.

언제 비가 왔냐 싶게 햇살이 화창하다.

잠시 정자에 올라 옥정호 푸른물과 붕어섬의 잘 다듬어진 밭고랑을 동화속 이야기처럼 더듬어본 뒤, 다시 나그네가 된다.

계속 벚꽃길이 이어진다. 소나무숲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이다. 그 유혹에 져 다시 차에서 내린다.

효자운암이선생조삼대(孝子雲巖李先生釣蔘臺)’라는 효자비와 그의 호를 딴 운암정(雲巖亭)’이 있는 곳이다.

조선 숙종 때 효자 운암 이흥발이 있었다. 이 조삼대(釣蔘臺)란 명칭은 운암이 중병에 걸린 홀어머니를 위해 강에서 낚시를 하는데 하루는 물고기 대신 산삼을 낚아 병을 치유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비문을 읽고 길을 건너 호수를 바라보러 가는데 젊은 남녀가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흔쾌히 석 장이나 찍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효자가 있는가? 스스로 반성하며 그곳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가게에서 천원짜리 얼음보숭이로 갈증을 달랬다.

 

나그네는 다시 가지가지 옥과(玉果)가 열리는 옥과를 향해 길을 밟는다.

 

<옥정호>

<효자 운암의 조삼대 비>

<잉어(鯉魚) 대신 산삼(山蔘)이 낚인 조삼대 풍광>

<효자 운암 이흥발을 기리는 운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