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7
풍속은 화순(和順)이요, 인심은 함열(咸悅)이라.
흔히들 ‘인심은 천심이다’고 한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고도 한다.
장흥 고을에 전해오는 옛 얘기가 있다. 어떤 부자가 쌀독을 집 앞에 내놓고, ‘누구든 가져가시오.’하고 대문에 글을 써 붙였다. 그런데 그 쌀독은 손바닥을 펴면 들어가도 손바닥을 쥐면 나오지 않는 독이었다. 그러니 결국은 쌀을 가져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명박이 때에 걸핏하면 ‘일자리 창출’을 부르짖었다. 4대강을 포함, 허울 좋은 외교 여행, 또 무슨 거창한 이름의 국제행사 등 무슨 일만 저지르려면 일자리 창출을 내세웠다. 일자리 창출뿐인가? 경제유발 효과 몇 십, 몇 백조 등에 이르면 사기꾼의 세치 혓바닥이 얼마나 간교한지, 치가 떨릴 정도였다. 바로 손바닥을 쥐면 나오지 않는 그 독과 같이 간교하면서 더하여 분통까지 터지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더 답답한 것은 그 오살 놈의 독을 몽둥이로 탁 깨트려야 하는데, 힘 있는 놈, 가진 자들은 다 쥐새끼와 한통속이고, 또 그들은 그렇더라도 없는 놈, 못난 놈들도 다 낙수효과의 허상을 믿고 두루뭉술 동조하고 가담하니, 그 시대를 종결짓지 못했다. 그런 결과로 오히려 그 쥐새끼 같이 간교한 놈의 뒤를, 화투짝 똥광 속 그림인 달구똥구녁이 잇게 된 것이다.
이솝 얘기의 개구리들처럼 우매하여 황새를 임금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라, 다 자기들 사리사욕 채우기, 비리, 부정 감추기, 권력과 특정집단 세력 영구 유지 술수, 또 그들에게 빌붙어 혹시나? 단물! 하는 거지근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윤창중 엉덩이, 육사 성폭행 사건 등이 줄을 잇는 것도, 이 시대가 만든 악의 산출이요, 표출이다. 따라서 법과 처벌만으로는 막을 수 없는 근원적 처방이 필요한 사태다.
인심 좋았다는 함열을 찾으며 혹시라도 그 인심의 흔적을 볼 수 있었음 하는 소망을 하였다.
호남가에 나오는 ‘인심은 함열(咸悅)이다’라는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다 함께 기쁘다는 함열이란 명칭에 어떤 의미와 역사가 있는 건 당연하다고 여겨서다.
만경강과, 고마내라고 불렀던 금강이 황해로 들어가면서 너를 들판을 펼친 곳이 익산 땅이다.
그곳 익산의 지평선 들녘을 적시는 내와 내 사이의 노른자 땅이 또 고마나라 부른 함라이면서 함열이라 한다. 한반도 물산의 중심지였고, 따라서 고대국가의 세력이 존재한 땅이었다.
고대에는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큰물을 ‘내’ 라고 불렀고 내로 흘러드는 작은내를 ‘실내(시내)’라고 불렀다. 그 내를 경계로 부족 집단이 모여서 수렵, 채집, 농경, 목축을 하며 살았고 이 규모를 내를 경계로 하는 집단 ‘나’라고 불렀다. 이 나 집단이 연합하여 세력이 커지면 그것을 ‘나나’(나라) 라고 불렀다.
금강의 고마내나, 함라의 옛 이름이 고마나인 것은 그 때문인 것이다.
아무튼 함열은 백제 때 감물아현(甘勿阿縣), 신라 경덕왕(景德王)때 임피군(臨陂郡)의 함열(咸悅), 고려초 전주에 속했고, 조선 태종(太宗 9년, 1409년)때 이웃 용안(龍安)과 합하여 안열현(安悅縣)이었다. 7년 뒤 다시 함열현, 고종 32년(1895년)에 현을 군으로 개칭, 1914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익산군에 병합되어 함열면(咸悅面)이 되었다.
또 ‘함열’의 별호가 ‘함라’라고 한다. 고마나, 감물아, 함나로 불렸던 함라가 오늘날의 함열읍인 것이다. 일테면 함라는 함열의 원조 이름이다.
2013년 6월 1일 함열에 이르러 딱 세 가지만 보려고 맘먹었다.
하나는 함열 고을 과거의 인심인 세 부잣집이다.
또 하나는 허균이다.
마지막으로 함열의 현재의 인심이다.
가는 김에 여산에 들렸다. 물어물어 여산의 주산인 천호산에서 잠시 몸과 맘의 독을 씻었다.
이어 함열에 이르렀는데, 만나야할 세 부잣집은 함라에 있다고 하였다. 함열이 읍소재지이지만, 과거의 역사는 함라와 함께 하는 고을인 것이다.
다시 네비에 의존하여 함라에 도착했다. 큰길가에서 바로 그 세 부잣집으로 들어가는 고샅을 만났다.
조 부잣집에 들렸다. 줄에 묶인 누렁개 한마리가 컹컹 짖으며 집을 지키는 그 우람한 99칸 만석군 부잣집은 인적이 없어 고즈넉했다. 감나무 아래 우물은 축구공이 빠져 혼자 놀고 있었는데, 이제 음용수는 아닌 듯 했다. 아녀자들이 물을 길며 수선스러웠을 우물가 풍경을 그림처럼 잠시 그려볼 뿐이었다.
이어 깨끗하게 청소가 된 돌담길을 걸어 또 다른 만석군인 김 부잣집에 들렸다. 그 집은 대문이 굳게 닫혀있고, 사저이므로 출입을 금한다는 표딱지만 볼 수 있었다.
또 한 분 부잣집인 이 만석군 집은 무슨 교당으로 쓰인다고 하고, 또 어디쯤인지, 알 수 없어 하릴 없이 골목만 배회하였다. 그러다 길을 벗어나니 너른 마당이 나왔다.
명창 임방울이 ‘호남가(湖南歌)’에서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인데’ 라고 했다. 실제로 임방울은 이곳 조해영 만석군집에 머무르며 춘궁기에 찾아오는 걸인과 식객들을 대하는 그 후한 인심을 직접 보았다 한다.
또 당시 신문에 ‘빈한한 동포 위하야 집중되는 각층의 동정, 백 삼십 여명에 2개월 간 배식가, 익산 함열리의 3씨(조해영, 김안균, 이배원)’라는 보도가 있었다 한다.
하지만, 이제 그 만석군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가시고, 나그네는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지 못하고, 길을 몰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대다가, 너른 마당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저만큼 무슨 푯말이 있어, 가보니 함라관아터였다. 바로 허균을 만나게 된 것이다.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은 이곳 함라에서 조선시대 최초의 음식 품평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썼다.
29세에 장원급제하여 황해도 도지사가 되지만 한양 기생을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파직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 그 때가 광해군 3년(1611년 1월)이었고 그의 나이 43세였다. 당시 이곳 함열 현감은 한회일(인조비 인열왕후의 오빠)이었는데, 그와 친분이 있었기에 허균은 이곳 객사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했다 한다. 그는 1613년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시(詩)·사(辭)·부(賦)·문(文) 등 자신의 옛 글을 정리하여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64권을 저술했다. 지금은 26권만이 전해지는 그 ‘장독을 덮을 정도의 하찮은 책’에 ‘도문대작(屠門大嚼)’이 실려 있다. ‘도문대작’이란 뜻은 고기를 먹을 형편이 못 되어 ‘푸줏간의 문이나 바라보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달랜다.’ 말이다. 유배된 처지로 음식을 부러워하는 자신을 가리킨 말이라 여겨지며, 또 그것이 우리 조상들의 소중한 식문화를 알 수 있는 기록을 남긴 셈이다.
알다시피 허균은 혁명론자다. 지금 허균이 홍길동전을 다시 쓴다면 길동은 율도국을 어디에 세울까?
그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 실린 호민론(豪民論)을 들여다본다.
‘지금은 고려와는 다르다. 고려 때에는 백성에게 세금을 매겨도 한도가 있었다. 논밭을 제외하고는 산이나 강에서 나는 산물은 백성과 함께 나누었고 상인과 장인들도 먹고살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세금이 들어올 것을 헤아려서 쓸 것을 정하여 나라에 비축이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갑자기 전쟁이나 국상(國喪)이 나도 세금을 더 걷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려 말기에 가서는 오히려 나라의 곤궁을 걱정하게 되었다.’
‘조선은 그렇지 않다. 몇 안 되는 가난한 백성을 가지고 중국과 똑같이 예법을 차려서 귀신을 섬기고 조상을 모신다. 백성의 세금이 국가로 들어오는 것은 겨우 2할이고 나머지는 간사한 무리에게 낭자하게 흩어진다. 또 저축이 없으니 일이 생기면 일 년에 두 번도 세금을 거두는데, 수령은 이때를 빙자하여 빗자루로 쓸듯 싹싹 거두어간다.’
‘백성의 원성은 고려 말보다 높은데도 윗사람들이 편하게 앉아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에 호민이 없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몽둥이를 들고 일어나면 저 원망하는 백성이 낫과 가래를 들고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천하가 변란에 휩싸이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이 두려운 작금의 형세를 분명하게 알아서 지금까지의 잘못을 고친다면 그나마 괜찮을 것이다.’
허균은 그러면서 호민 혁명을 바란다.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은 물불이나 맹수보다도 두려워할 만한데 윗자리에 있는 자가 업신여기며 길들이고 심하게 다루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성공을 함께 즐기면서 일상에 얽매여서 순순히 법을 받들고 윗사람에게 부림을 받는 자는 항민(恒民)이다. 항민은 두려워할 것조차 없다. 가렴주구에 가죽이 벗겨지고 뼛골이 부서지는데도 번 것은 모두 갖다 바친다. 끝없는 요구에 괴로워하고 한숨 쉬며 윗사람을 헐뜯는 자는 원민(怨民)이니 원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백정이나 장사치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몰래 이심을 품고는 천하를 엿보아 시절이 어지러워지면 자신이 바란 것을 이루려는 자는 호민(豪民)이니, 저 호민이야말로 크게 두려워할 만한 존재이다.’
‘호민이 나라의 분열을 엿보고 시절의 어지러움을 틈타서 밭도랑 가운데서 한번 치고 일어나면 저 원민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모여서 모의하지 않고도 한목소리를 낸다. 그러면 저 항민도 역시 살 구멍을 찾아서 몽둥이와 낫을 들고 따라 나서 무도한 임금을 죽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위의 글은 조선의 임금에게 말하는 글이지만, 현재 한국의 위정자들도 뒷짐을 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한국의 위정자들은 실실 비웃음의 미소를 흘릴 것이다.
왜냐? 한국에는 허균의 말처럼 호민(豪民)이 없기 때문이다. 항민(恒民)과 원민(怨民)은 있다. 그러나 호민이 없다. 군주제도 아니고, 식민지도 아니고, 독재도 아닌데도 52%의 백성은 무조건 쥐나 닭이다. 우리가 남이가다. 내 재산, 내 집, 내 새끼뿐이다.
호민이 없으니, 백년하청이다. 그게 거지근성인지, 식민지 생활을 그리워함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다음 번에는 윤창중이가 쥐든 닭이든 엉덩이 움켜쥐고 국해의원이 되고 대똥도 되는 그런 나라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능지처참이 되어 시신조차 없이 묻힌 허균의 무덤을 찾아, 어떠하면 호민이 몽둥이를 들 수 있는지를 묻고 싶다. 손바닥을 움켜쥐면 손을 뺄 수 없는 독으로 사기치고 장난치는 놈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릴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해야겠다.
그렇게 허균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함열의 현재의 인심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인심을 찾는단 말인가?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막막하고 답답할 뿐이다. 한국사회에서 웬 인심이라? 부질없는 허망한 꿈을 꾸는 것만 같아 그만 포기하고 만다.
인심 좋은, 모두가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함열이다.
그래서 그냥 길가를 스치며 만나는 평범한 함열 사람들의 평화로운 얼굴이 함열의 인심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살아갈 넉넉한 함열 들녘의 풍광을 또 함열의 인심이라 여기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나그네도 평화롭다. 다음 고을인 이초(異草)가 무성한 무주(茂朱)와 서기(瑞氣)어린 영광(靈光)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만석군 조해영 가옥>
<주인은 어디 가고 견공이 나그네를 맞는다?>
<우물가의 아낙네들은 어딜 또 갔을까?
<만석군 거리>
<돌담 고샅길>
<김 부잣집 행랑채>
<함라에 있는 함열현 관아터 표지판>
<함열현 관아터. 허균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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