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선의 군제
여기서 잠시 조선의 군사력에 대해서 알아보자.
국가의 흥망이 바람 앞에 등불이었던 임진과 정묘 양 왜란을 겪은 뒤에도, 각처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민란이나 농민봉기, 홍경래 난과 같은 대규모의 반란이 계속되었던 시대에 조선 정부는 어떤 대책과 방어를 했을까?
그 일을 맡았을 조선의 군사력 상황을 알기 위해서라도 조선의 군사 편제가 어떠했는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조선 전기의 군사조달과 편제를 살펴보자.
조선 전기에 군사조달은 16세부터 60세까지의 정남(丁男 : 양인장정)이 모두 군대에 가야 하는 의무모병제였다. 이를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라 했다.
그러나 실제 모든 양인 농민들이 군대에 간 것은 아니다. 농민 3명을 기준으로 한 명만 가까운 지방 군대나 멀리 서울까지 올라가서 궁궐과 그 주변을 지키는 일을 했고 나머지 2명은 군대 간 사람에게 1년에 2필의 옷감을 주어 체류비용을 보태야 했다.
여기서 실제 군대 가는 사람을 정군이라 하고, 비용을 보태주는 사람을 보인(봉족)이라 하였는데 이와 같은 조선 전기 군역 제도를 보법이라 한다.
양인 외에 노비는 원래 군대에 안가도 되지만 필요할 때는 특별한 군대(잡색군)에 넣기도 하였다.
평소엔 전혀 군역의 의무가 없는 양인(良人)이 아닌 사람들을 훈련시켜서 실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기 고향 마을을 지키게 하는 오늘 날의 향토 예비군이 있었는데 이를 잡색군(특별한 군복이 없이 다양한 색상의 옷을 입어서 붙여진 듯)이라 했다.
군사조직은 의흥위(중위),용양위(좌위),호분위(우위),충좌위(전위),충무위(후위) 등 5위와 의무병인 영진군 외에 특별한 군대가 있었다.
특수군은 왕실, 공신, 고관의 자제로 편성된 고급군인, 갑사는 무술시험으로 선발된 정예부대이며 직업군인이었다. 정병은 각 도에서 번상된 농민군사인데 이들은 의무군이었다.
그러다 조선후기에는 도성에 5군영(중앙군)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속오군을 두었다.
임진왜란은 종래의 국지전(局地戰)과는 달리 전면전, 총력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조총(鳥銃)이라는 신무기와 새로운 전술이 등장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포수(砲手)를 양성해야 했고, 전국에 걸친 군사조직도 재건이 필요했다.
5군영을 살펴보면 훈련도감은 왜란 중 설치하였고 3수병(포수, 사수, 살수)을 훈련시켰는데 이른바 전문 직업 군인의 양성이었다.
어영청은 이괄의 난 이후 설치하였고 효종 때 북벌운동 추진의 핵심 군영이었다.
총융청 역시 이괄의 난 이후 설치, 수원, 광주, 양주, 장단, 남양의 군진을 관장하고 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하였다.
수어청은 남한산성 일대를 방비하였다.
금위영은 궁성의 수비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지방군으로 속오군(束伍軍)을 두었다. 임진왜란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명장(明將)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 나타난 속오법(束伍法)과 삼수기법(三手技法)에 따라 양반, 중인, 양인(良人), 공사천인(公私賤人)으로 조직하였다.
속오군은 그 속오법에 따라 편성한 군대를 말하는데 처음에는 속오지군, 속오군병, 속오군졸, 편오군, 초군 등으로 호칭되다가 1597년경 속오군으로 명칭이 통일되었다.
그 속오군의 편제인 속오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營), 사(司), 초(哨), 기(旗), 대(隊), 오(伍) 등으로 이어지는 종적인 조직이었다.
영(營)을 분군 편제상 영장(營將) 통솔하의 최상의 단위 부대로 삼았고, 영에는 5개 사(司)를 두고, 1사에는 5개 초(哨), 1초는 3기(旗), 1기는 3대(隊), 1대는 화병(火兵) 1명과 합쳐 11명의 병사로 조직되며, 사에는 파총(把摠), 초에는 초관(哨官), 기에는 기총(旗摠), 대에는 대총(隊摠)을 각각 지휘관으로 두었다. 따라서 한 개의 병영에는 영장 1명과 파총 5명, 초관 25명, 기총 75명, 대총 225명 및 2,475명의 병사로 편성된 셈이다.
이 구성과 조직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보이는데 18세기의 1초는 정원이 123명으로서, 전국의 속오군의 총 수는 21만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속오군제가 시행되면서 각 지방의 주민은 대부분 속오군에 편성되었다. 이들은 병농일치제에 따라 평상시에는 농사와 무예훈련을 하다가, 유사시에는 소집되어 국가 방어에 동원되는 체제였다. 하지만 물질적 급여는 없었고, 다만 부분적으로 보인의 지급이 이루어졌다.
정묘호란 직후인 1627년(인조 5)에 속오군의 조직과 훈련을 위하여 전담영장제(全擔營將制)가 실시되었다.
이때 전담영장은 겨울철 농한기에 속오군을 소집하여 진법훈련과 포술·검술 등 무예훈련을 실시하고, 매년 1회씩 도 전체의 병력을 소집하여 진법훈련을 시행하였다.
영장은 무관 출신이 임명되었으며, 군사훈련만 전담한 관리였다.
이러한 전담영장제가 실시되면서 그 이전까지 지방의 수령이 장악한 행정권과 군사권이 일부 분리되었다. 즉, 수령은 속오군을 비롯한 병력의 소집과 동원만을 담당하고, 군사훈련은 영장이 전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방 수령의 반발과 유능한 무신의 부족, 재정 문제 등으로 효종 이후 전담영장제가 폐지되고 지방 수령이 병력의 관리·조직·훈련을 모두 맡는 겸영장제(兼營將制)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전담영장제가 폐지되면서 그 이전부터 이미 소홀하게 시행된 속오군의 훈련은 유명무실해졌다. 속오군은 소집기간 동안 훈련경비를 자기 스스로 조달하였기 때문에, 각 지방에서는 민폐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소집훈련을 전폐하다시피 하였다.
또한 영조 중엽부터는 속오군의 구성에 점차 양인은 제외되고 천인으로 채워져, 마침내 속대전에 속오군을 천예군(賤隸軍)으로 기록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등 중앙의 군영과 지방의 감영(監營), 병영(兵營), 수영(水營) 등에서 다투어 군보(軍保)를 확보하려 하면서 이미 속오군에 편제된 사람을 그 군액으로 채웠기 때문에, 속오군은 2중의 부담을 지는 경우도 많았다.
백성들은 점차 중앙과 지방의 직업군인을 양성하는 재정부담층으로 인식되어 양인은 20말(斗), 천인은 15말을 내면 그 군역을 면제하는 수미법(收米法)이 적용되었다. 그 결과 이인좌의 난과 홍경래의 난과 같은 민란이 일어났을 때 지방에서는 동원 가능한 병력이 없어 조기 진압을 하지 못하였으며, 의병을 모집하고 중앙군을 현지에 파견하여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속오군 제는 후일 급료를 받고 복무하는 군제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의무병제와 병농일치제에서 모병제, 직업군인, 상비군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막말한 이인제의 고 노무현 대통령 분향>
<담양 죽녹원을 찾은 노무현 전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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