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시인 김삿갓

흰구름이거나 꽃잎이거나 5-1

운당 2012. 11. 8. 20:34

(2) 김삿갓과 조선의 삶

 

1) 홍경래와 김삿갓

 

1836년 헌종 2년 김삿갓이 30세 때다. 방랑생활이 길어지면서 김삿갓의 문명도 세상에 조금씩 알려지던 때이다.

홍경래가 봉기를 일으킨 곳 평안도 가산군 다복동에 삿갓을 쓴 남루한 옷차림의 건장한 나그네가 찾아왔다.

그는 봉기군이 거병한 마을을 살펴보더니, 갑자기 땅을 치며 한바탕 통곡을 하였다.

사람들이 놀라 모여들자, ‘난 김익순의 손자, 병연이요.’ 하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김삿갓은 자신의 운명의 끈이 되어버린 홍경래를 원망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두들 그의 넓은 도량과 인품에 감탄하였다고 하는데, 아마 그가 자신의 신분과 본명을 가르쳐 준 것은 방랑 이후 그 때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홍경래의 민중봉기와 김삿갓과의 운명적 만남은 그렇게 그 시대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는 끈으로 엮어져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일이라는 가정 하에 홍경래라는 인물이 없었더라면, 그가 봉기를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삿갓 선생을 만나는 행운을 맛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삿갓 선생의 개인적 불행을 행운이라고 말하기엔 좀 그런 점도 있지만, 그 당시에 김삿갓보다 더 비극적인 운명을 살고 간 사람이 어디 한 둘이랴?

기근이 들어 죽은 자식의 몸을 삶아 먹었다는 기록 앞에 서면 벌린 입을 어찌 다물 수 있을 것인가?

지배층의 수탈과 폭정 앞에 농민들은 삽과 괭이를 던지고, 남자는 도적이 되고 아녀자와 어린애는 거지가 되었다. 역병과 기근으로 죽는 자 10만 여명이었다는 순조 때의 기록 앞에서도 우리는 당시의 민초들의 비참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비참하고 암울했던 시대상을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김삿갓의 시를 읽고 삶을 살피며 방랑과 걸인의 시인이고 조소와 조롱의 시를 썼다라고 말하기 전에, 그의 삶과 시를 당시의 시대상에 비추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넘지 않은 자 없다지 않은가? 굶어보지 않은 자가 어찌 그 배고픔의 고통을 알랴?

그 시대의 눈으로 그 시대의 시를 들여다보자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잠시 홍경래 봉기가 일어난 1811년으로 돌아가 본다.

 

<이 같은 쥐 무리들의 횡포와 탐학으로 조선도 부패했고 삿갓 선생은 방랑했다. 현재 감옥에 있는 쥐 무리 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