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헌종 임금
<옛날 화순의 음식점에 자랑스레 걸린 사진. 옛 적벽의 아름다운 풍광>
헌종은 순조 27년인 1827년 7월 18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조선 제 24대 왕으로 15년의 재위를 거쳐 1849에 승하하였다.
이름은 환(奐), 자는 문응(文應), 호는 원헌(元軒)이다. 일찍 운명한 익종의 아들로 어머니는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 신정왕후(神貞王后)이며 순조에게는 손자가 된다.
1830년(순조 30)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1834년 순조가 승하하자, 8세의 어린 나이로 경희궁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순조의 비(妃)인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36년 헌종 2년에 남응중(南膺中)의 모반사건이 있었다. 충청도로 내려가 있던 남응중은 남경중, 남공언 등과 모의하여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도총집, 남경중을 좌총집으로 하여 청주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방 이속의 고변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남응중 등은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30세가 된 김병연은 평안도 땅으로 온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과 글 솜씨가 서서히 세상에 알려진다. 평안도 일대를 돌며 묘향산과 홍경래의 고향 용강과 첫 봉기지인 가산 다복동에도 들린다.
1837년 헌종 재위 3년이 되는 3월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딸을 왕비(孝顯王后)로 맞았으나 1843년에 죽자 이듬해 10월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을 계비(明憲王后)로 맞았다.
31세가 된 김병연은 평양에서도 한동안 기거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에서는 또 변고가 있었다. 32살이 된 김병연의 아내 장수 황씨가 사망한 것이다. 10살인 학균과 8살인 익균은 그야말로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다.
1838년 헌종 4년 친정인 충청도 결성현으로 내려간 김병연의 어머니는 끝내 영월로 돌아오지 않았다. 김병연의 나이 32살, 아들이 가문을 일으키는 걸 보지 못하고 피맺힌 한을 품은 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기록에 따르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김병연이 어머니의 고향 마을에 2차례 들렸다고 한다. 그러나 직접 찾아뵙지는 않고 먼발치에서 나무하는 아이들에게 안부만 묻고 떠났다 한다.
1839년 순조 때의 천주교 탄압정책을 이어받아서 주교 앵베르(imbert, l. j. m.), 신부 모방(maubant, p. p.)과 샤스탕(chastan, j. h.)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를 학살한 기해박해가 있었고, 천주교인을 적발하기 위하여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계속 실시하였다.
1841년 대왕대비의 철렴(撤簾)으로 비로소 친정(親政)의 길이 열렸다. 이를 계기로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의 아버지 조만영을 비롯하여 새로 등장한 외척 풍양 조씨 일문의 세력이 우세해졌다. 헌종의 장인인 조만영은 순조 때부터 정권을 전횡해 온 안동김씨를 물리치고 한동안 세도를 잡았다. 그는 어영대장,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헌종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세도를 5, 6년 동안 확립했다. 그러나 권불십년이란 말처럼 풍양 조씨 일문 자체 내의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김씨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 해에 강원도 영월 김병연의 집에 또 한 번의 액운이 덮쳤으니, 학균이 14살로 사망을 한 것이다. 35살이 된 김병연은 평양 쪽에 있었을 때인데, 이제 집에는 12살짜리 익균만 홀로 남아 기구한 운명의 등불 앞에 흔들리고 있었다.
해가 바뀔 무렵 김병연은 황해도 쪽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삿갓이 머물렀던 집>
<사랑방>
<초분지에 텁텁한 막걸리 한 잔 올리고>
1844년 헌종 10년에는 이원덕(李遠德), 민진용(閔晉鏞) 등의 모반사건이 있었다. 이원덕, 민진용 등의 역모는 안동 김씨의 세도가 풍양 조씨 일문으로 넘어가는 권력의 공백기에 일어났는데, 이는 당시 왕조의 위엄과 권위가 어느 정도 실추되었나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의원(醫員) 출신인 민진용은 그의 뛰어난 의술로 이원덕, 박순수, 박시응 등을 포섭해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한다. 그들은 특히 하급 무관들을 동지로 규합한 뒤 자신들의 계획을 관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 주모자는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은언군의 손자 원경은 사사(賜死)된다.
1845년 헌종 11년, 영국 군함 사마랑 호가 제주도와 서해안을 불법 측량하고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자, 조정은 청나라를 통해 광동에 있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김병연은 39세가 되었다. 그동안 4, 5년간 구월산 등 황해도 일대를 돌다가 개성을 거쳐 오랜만에 상경하여 우전 정현덕 집에서 잠시 기거하며 녹차 황오 등을 만나 교류하였다. 과거에 응시하기 위함이었다고도 하고, 이때 정현덕이 왕께 김병연의 죄를 면해줄 것을 간청 하였다고도 한다. 김삿갓의 재능과 문명이 조정에까지 알려진 것이다.
1846년 헌종 12년 이 해 6월 프랑스 제독 세실이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들어와 왕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해서 한때 조정을 긴장 상태에 몰아넣기도 했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체포되어, 사교를 퍼뜨리고 국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7월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듬해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에 답신을 보내는데 이것이 우리나라가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 문서가 되었다.
이 해에 헌종의 장인인 조만영의 죽음으로 다시 세도는 안동 김씨 일문으로 넘어갔다.
김병연은 몰론 모르는 일이지만 이 해에 영월 집에 오랜만에 경사가 있었다. 17살이 된 익균이 자기보다 8살이 많은 25살의 반남박씨와 혼례를 치른 것이다.
40세가 된 김병연도 세상에 널리 알려져 천부적 재질을 타고난 천재시인으로 유명해졌다.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북쪽 지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1848 헌종 14년부터는 많은 이양선(異樣船)의 출몰과 그 행패로 인하여 민심이 소연하였다. 이양선들은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은 크게 동요하는 등 국내외적인 위기의 시기였다. 이때부터 조선은 이양선을 앞세운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호 개방 요구를 맞게 되는 등 본격적인 외세 대응기로 들어서게 된다.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나 주변 정세에 어두웠던 조정에서는 이양선의 출몰이나 위협에 별다른 방책을 세우지 못하고 각각 권력의 장악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1849년 헌종이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23세로 후사 없이 죽었다. 재위기간에 열성지장(列聖誌狀), 동국사략, 문원보불,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삼조보감(三朝寶鑑) 등을 찬수하게 하고, 각도에 제언(堤堰)을 수축하게 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글씨를 잘 썼고 그의 어진(御眞)인 수용(晬容) 1본이 선원전(璿源殿)에 봉안되었으며, 능은 경기도 양주 건원릉(健元陵) 서쪽 경릉(景陵)이다.
헌종 대에는 세도정치의 여파로 과거제도 및 국가재정의 기본이 되는 삼정(三政)인 전정·군정·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했고, 17, 8세기부터 시작된 사회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로 농민층의 분해가 이루어졌다. 농민들은 도시나 광산으로 흘러들어가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 빈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농층과 부상인들이 생겨나면서 천민에서 양민으로, 양민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이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 조짐으로 나타났다. 또한 재위 15년 중 9년에 걸쳐 수재(水災)가 발생하여 민생고가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수재와 전염병의 창궐로 민생이 악화되었으며, 가중되는 삼정의 문란으로 살던 곳을 버리고 유랑하는 유민들이 급격히 불어났다.
<새롭게 단장한 종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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