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시인 김삿갓

흰구름이거나 꽃잎이거나 4-4

운당 2012. 10. 30. 21:21

3)철종 임금

 

조선 제25대 왕 철종은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다.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과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사이의 셋째 아들로 1831년 경행방(慶幸坊)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1849부터 1863까지 재위 14년이다.

1844년 헌종 10년에 형인 회평군(懷平君) ()은 옥사하고, 원범은 가족과 함께 교동(喬桐)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강화(江華)로 옮겨져 아무런 교육도 받지 못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그는 순조비(純祖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부름을 받고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궁궐로 들어갔다. 6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에는 나이가 어리고 농경을 하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43세가 된 김병연은 함경남도 흥원군의 함관령을 넘어 동해안을 타고 남하하였다.

1850년 철종 1년이다. 44세가 된 김병연은 강원도와 인접한 함경남도 안변군에서 군수 조운경과 옛 정을 나누며 기생 홍련을 만난다. 이어 회양군 등을 돌며 1년여를 머문다.

1851년 철종 2년 철종이 김조순(金祖淳)7촌 조카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哲仁王后)로 맞아들인 뒤로는 국구(國舅)가 된 김문근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계속되었다.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다.

45세가 된 김병연은 북쪽 지방에서 차츰 남하하여 경기도 일대를 돌고 있었다. 용인 등지에서 과체시 및 시를 많이 지었다.

1852년부터 재위 3년째인 철종은 친정을 하였는데, 이듬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전(宣惠廳錢)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詞譯院蔘包稅) 6만 냥을 진대(賑貸)하게 하였고, 또 그해 여름에 한재가 심하자, 재곡이 없어 구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묵(貪墨)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김병연은 2년째 경기도 지방에 있는 중이다.

1853년 철종 4년이다. 이 해에 47세의 김병연은 경기지방을 거쳐 비로소 남쪽으로 내려온다. 어머니의 고향 결성현(홍성)을 다시 지나 금산, 익산으로 해서 경상도 김천, 안동 쪽에도 그의 발걸음이 찍히게 되었다.

1854년 철종 재위 5년째이다. 김병연은 48, 영월에 있는 익균이 25세이다. 그의 아버지가 금강산으로 떠나던 해의 꼭 그만한 나이가 된 것이다. 그 익균이가 아버지를 찾아 경상도 안동까지 왔다. 두 부자의 해후는 어떠하였을까? 김병연은 너무나 자신을 닮은 익균의 모습을 보고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기골이 장대하고 이목구비가 수려한 두 부자의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1855년이다. 안동에서 익균이 잠자는 걸 보고 줄행랑을 쳤던 김병연은 어느새 강원도 평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곧바로 뒤쫓아 온 익균과 그곳 평강에서 재회를 했다. 김병연은 다시 익균에게 심부름을 보내고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아마 금강산으로 다시 들어갔으리라고 추정한다.

1856년 봄에 철종은 화재를 입은 약 1,000호의 여주의 민가에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내려주어 구활하게 하였고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냥을 지급하였다. 이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000, 단목 2,000, 호초(胡椒)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구호에 적극성을 보였다.

그러나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이 때문에 삼정(三政)이라 일컫는 전정, 군정, 환곡(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횡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 해 김병연의 나이는 50세다. 이제 그의 이름은 조선 팔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강원도로 올라간 김병연은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충청도 부여에서 영광 장성을 거쳐 전라도 일대와 제주도까지 다녀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1858년 철종 9년이고 김병연의 나이 52세 때다. 전라도 장성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세 번째로 익균이 아버지를 찾아온다.

이 해 늦가을, 아들과 함께 2, 3일여 북상하던 김병연은 전북 익산지방에 이르러 다시 아들을 속이고 행적을 감추고 만다. 곧바로 다시 남하하여 마침내 김병연은 그의 마지막 발걸음을 멈추게 한 동복에 이르렀을 거로 추정한다.

1859년은 철종 재위 10년이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한 철종은 점차 나이가 들고 친정의 경험도 쌓이면서 관리들의 부정을 공격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53세의 김병연은 화순 동복을 떠난다.

186054살이 된 김병연이 지리산 유람을 다니며 지리산 자락 어느 곳에서 서당 훈장을 지냈으리라고 추정을 한다.

1861년에 철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도감의 마보군(馬步軍)과 별기군(別技軍)의 군사를 이용하여 궁궐의 숙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봉건적인 통치기강이 무너지고 삼정(三政)인 전정, 군정, 환곡(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지고 도탄에 빠졌다.

1862년 봄 철종 재위 13년째이다. 벼슬아치들의 수탈과 학정, 계속되는 천재로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마침내 무능한 정부에 반기를 들고 218일 진주 단성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그 뒤 진주민란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곳곳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년에 일어난 난리라 하여 임술민란이라고도 하고, 삼정의 문란으로 일어난 난리라 하여 삼정의 난이라고도 한다.진주민란의 직접적인 발생 계기는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였다. 백낙신이 민란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수탈한 돈만도 약 5만 냥에 달했는데 쌀로 환산하면 약 15천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당시 진주목에서는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포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것을 모두 농민들의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결세가 무려 28천석에, 축난 환곡만 해도 24천석이나 되어 농민 부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중되었다.

이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봉기하여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진주성으로 쳐들어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진주성을 장악한 농민군은 백낙신의 죄를 묻는 한편, 악질적인 아전 몇 명을 죽이고 원한을 샀던 토호의 집을 불태웠다. 6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23개 면을 휩쓸었고, 120여 호의 집이 파괴되고 재물 손실이 10만 냥을 넘었다.이렇게 단성을 시작으로 진주에서 폭발한 이 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5도와 경기도 광주에서 무려 37차에 걸쳐 일어났다.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악정에 대항하여 민중봉기에 참가했다.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민란의 경위도 대개 이 진주민란과 비슷했다.

농민 봉기는 보통 2일에서 7일간 계속되었으며, 민란이 3월에서 5월 사이 춘궁기에 집중되어 일어난 것으로 보아 농민들의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봉기한 농민들은 한결같이 관리들의 횡포와 경제적 수탈을 막고 삼정의 폐해를 거두어줄 것을 요구하였다.그들은 관아를 습격, 수탈의 원흉인 관리와 아전들을 처단하는가 하면 장부를 불태우고 창고를 탈취하였다.

또한 관리와 결탁해 농민을 못 살게 굴던 양반과 토호의 집을 때려 부수고 곡식과 재화를 탈취하는가 하면 죄수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임술민란의 피해 상황을 보면 지방 이속으로서 살해된 자가 15명 이상, 부상자는 수백 명에 달하고 불타거나 파괴된 가옥이 약 1천 호, 피해 액수는 100만 냥을 넘었다.

철종은 봉기발생지역의 수령과 관속을 처벌하여 흐트러진 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농민의 요구조건을 일부 수렴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다.

이에 철종은 농민봉기가 잠시 가라앉은 5월 이후에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 별기구를 설치했다.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三政救弊)를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료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수습에도 진력하였다.

이때 마련된 삼정이정책은 주로 삼정운영의 개선에 초점을 두었으며, 법정 세액 이외의 각종 부가세를 일체 혁파하고 도결(都結 : 조선 말기에, 아전이 공전(公錢)이나 군포(軍布)를 축내고 그것을 메우기 위하여 결세(結稅)를 정액 이상으로 받던 일)이나 방결(防結 : 조선 시대에, 고을 아전이 백성에게 논밭의 세금을 덜어 주고 기한 전에 돈을 받아 아전끼리 돌려쓰기도 하고 사사로이 쓰기도 하던 일)을 폐지했다. 또 환곡(還穀 : 조선 시대에, 사창(社倉)에 저장하였다가, 춘궁기인 봄에 백성에게 꾸어 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받아들이던 곡식이다. 그런데 아전들이 백성들에게 강제로 곡식을 꾸어 쓰게 하고 배의 이자를 붙여 받아내었다. 그것도 쌀이 아닌 볏짚이나 콩을 섞어 주고 쌀로 받아내었으니 관이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한 셈이다)의 경우 토지세로 전환시키는 등 조세개혁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를 벗어나 제대로 정치를 펴나갈 수 없었고 지배층의 이해관계가 얽혀 구체적인 후속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가운데 삼정이정책은 시행되지 못했다.

또 한편 당시 사회의 혼란을 종교적으로 구제하려는 동학(東學)이 창시되어 사상운동을 전개, 새로운 세력으로 확대되자 이를 탄압하였다. 교주 최제우(崔濟愚)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를 씌워 체포한 뒤 처형했다.

김병연의 나이도 56세가 되었다. 겨울이 되자, 김병연은 지리산에서 화순 동복으로 옮겨왔다.

1863128일 철종은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철종의 어진(御眞)인 수용(晬容) 4본이 천한전(天漢殿)에 봉안되었으며,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 하나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하였을 뿐 후사가 없었다.

철종보다 앞서 329, 온 산야에 철쭉꽃이 붉게 핀 늦봄 날 김병연은 화순 동복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구암마을 동쪽 산기슭, 객사주검을 묻어주는 똥묏똥이라는 곳에 쓸쓸히 몸을 뉘었다.

1865년 철종은 47일 경기도 고양의 희릉(禧陵) 오른편 언덕에 예장되고, 능호를 예릉(睿陵)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文顯武成獻仁英孝)이다.

1866년 고종 재위 2년째이고 김병연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었다. 익균의 나이도 어느덧 37세가 되었다. 세 번이나 그의 곁에서 홀연히 사라진 무정한 아버지지만, 물어물어 다시 화순 동복을 찾았다. 아버지의 주검을 수습하여 강원도 영월군 마대산 자락 노루목에 안장하였다.

 

<영월의 난고 김삿갓 문학관> 

 <김삿갓 시비와 상>

  <영월의 삿갓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