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구름이거나 꽃잎이거나 4-1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오래 묵혔다 이어갑니다.
미흡하거나 작위적인 부분이 있으면 해량하세요.
<삿갓 선생이 보았던 적벽의 모습. 오늘은 적벽의 사진을 올립니다>
1807년은 순조 통치 7년째로 삿갓 선생 김병연이 음력 3월 13일에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해이다.
1811년 순조 재위 10년이 넘어지면서 김병연에게도 마침내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몇 차례의 과거에 낙방을 하면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평안도 용강(龍岡)땅 출신, 피 끓는 젊은 혁명가 홍경래가 32살부터 42살까지 10수년의 준비 끝에 반란을 일으켜 평안도 일대를 점령한 뒤 관군과 대결하였으니, 바로 홍경래 민중봉기다.
1811년 12월 18일에 일어난 반란은 이듬해인 1812년 4월 19일에 정주성(定州城)이 함락됨으로써 4개월여 만에 평정되었다.
조직적인 대규모의 민중반란이 보여주듯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갈수록 궁핍해졌고, 사회의 불안은 극도로 가중되었다. 마치 왕권에 도전이라도 하듯 임금이 사는 코앞인 한양도성은 물론 각처에 도적과 거지 떼가 들끓었다.
바로 그 때에 삿갓 선생의 조부인 김익순이 평안도 선천부사로 있었고, 당시 5살의 어린 아이였던 김병연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기구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집안은 멸족이 되어 조부인 김익순은 반역죄로 처형되었고, 조모는 광주관아의 노비로 전락이 되었다. 부모는 경기도 여주와 이천으로 각각 따로 피신을 하였고, 병하, 병연 형제는 외거노비(당시에 주인집에 기거하는 솔거노비와 필요시에 주인집에 기거하는 외거노비가 있었다.) 김성수의 집인 황해도 곡산으로 보내져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해 2월에 곡산에서는 곡산부민폭동(谷山府民暴動)이 있었다. 곡산의 감관(監官 : 궁가(宮家)나 관아에서 돈이나 곡식 따위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리)과 색리(色吏 : 감영(監營)이나 군아(郡衙)에서 전곡(錢穀)의 출납과 관리를 맡아보던 아전)들이 백성들과 짜고 관아 창고의 쌀을 훔쳐 팔았다. 이 사실을 안 곡산부사 박종신(朴宗臣)이 이들을 옥에 가두었다.
이에 평소에 박종신의 탐학을 미워하던 박대성(朴大成) 등 곡산부민 수백 명이 폭동을 일으켜 부사를 몰아내고 죄수와 감색(監色)들을 석방시켰다. 이후 폭동은 진압되고 박종신은 울산으로 귀양, 박대성 등 주모자 37명은 효수형에 처해졌다.
그렇게 곡산은 지역적으로도 왕조와 탐관오리에 대한 불만이 많은 곳이어서 김성수는 병하, 병연 형제를 안심하고 데려갈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옛날 적벽>
1813년 제주도의 토호 양제해(梁濟海)가 반란을 일으켰다. 김병연이 7살이 되고 집안은 멸족에서 폐족으로 되어 북한강가 가평으로 모였다. 3남인 병호가 태어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집안을 다시 일으키겠다는 집념으로 버티던 김병연의 부친 김안근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814년 병연이 8살 때 3남 병호가 죽었다. 병연의 집안은 남한강가 여주로 이거를 하였다.
1815년 순조 재위 15년인 을해년이다. 이 해에도 조선 팔도에 피바람이 불었으니 경상, 충청, 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 죽인 을해박해(乙亥迫害)가 그것이다. 경기도 용인의 이응길(李應吉)이 민란을 일으켰다. 9살이 된 김병연의 집안은 남한강가 여주에서 강원도 영월 삼옥리로 이주 하였다. 여주에서 뗏목으로 250리에 이르는 곳이다.
1817년에는 유칠재(柳七在), 홍찬모(洪燦謨) 등의 흉서사건(凶書事件)이 있었다.
1819년에는 액예(掖隷 : 대전별감이나 무예별감. 경아전(京衙前)이라고도 함)와 원예(院隷 : 승정원의 별감)의 작당 모반운동(謀叛運動)이 있었다.
1821년에는 서부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1826년에는 청주에서 괘서사건(掛書事件)이 일어났다. 조선조 후기에 들면서 세도정치로 인해 정치기강과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기근, 수해, 전염병 등의 천재지변과 민중봉기로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그에 따른 불만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민중들이 궁궐, 주요 관청, 한양의 4대문, 전국 각지의 주요 시장 등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에 벽보를 붙여 지배층의 비리를 공격하거나 체제를 비방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를 괘서라고 하는데, 이는 정치투쟁의 성격을 지닌 일종의 민중들의 대자보 투쟁이다. 더욱이 나아가서는 불만의 표출로 그치지 않고 저항세력이 되어 지배층의 눈으로 보면 체제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숙종 때 정체불명의 일단의 무리들이 남대문과 대간의 집에 벽보를 붙여 ‘우리들이 모두 죽지 않는 한 끝내는 너희들 배에 반드시 칼을 꽂으리라’는 섬뜩한 말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사건이 일어나 조정 안팎이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그들은 직접 행동에 나섰다. 서울을 중심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밀조직들이 양반들을 공격하여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빼앗는 일이 적지 않게 벌어졌다.
그들은 스스로를 ‘검계(劍契)와 살주계(殺主契)’ 라고 칭했다. 이름부터가 무시무시하고 심상치 않은 비밀결사 조직 ‘검계’는 자신들의 문제를 검, 즉 무기를 이용해 일거에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담겨 있고 ‘살주계’는 글자 그대로 자신들의 상전을 죽이려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행동강령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살주계의 강령 몇몇 조항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양반을 죽일 것’, ‘양반의 부녀자를 겁탈할 것’, ‘양반의 재화를 탈취할 것’ 등으로 그 이름만큼이나 직설적이고 위협적이다. 지배층에서 보면 이 강령의 내용이야말로 체제에 도전하고 사회기강을 무너뜨리는 반국가적이며 반인륜적인 도전으로 공포와 질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이로 보아 지배층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검계나 살주계의 조직원들은 최하층의 신분인 노비들이 주축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순조실록에 검계에 대해 눈길을 끄는 사간 이동식의 상소문이 있다. 검계의 행패가 심각함을 예로 들어 법의 기강을 엄히 하자는 것이다.
‘문무백관이 게으르고 법강이 해이해졌으며, 검계의 이름이 나오기에 이르러 풍속이 허물어지고 세도가 무너짐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일종의 무뢰한들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당을 이루고, 소를 팔아서 검을 차고 다니며 하늘을 두렵게 여기지 않고, 돈을 추렴하여 개와 돼지를 잡지 않는 날이 없으며, 약탈하는 것을 가계로 삼고, 남을 모욕하는 것을 장기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문에 횡행하여 재상을 꾸짖어 욕보이고 깊은 규방에 도입하여 부녀자를 때리는 등 예의를 끊어버리고 기강을 어지럽힘이 여지가 없습니다.’
엄격했던 유교의 가르침과 조선의 신분제도는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예전 적벽>
한편 20세가 된 김병연은 한 살 위인 장수 황씨와 결혼을 하였다. 다시 영월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산속 의풍면 와석리 어둔이로 이거하였다.
1827년에도 충청·전라도의 천주교인들을 검거해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한편 순조는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풍양 조씨(豊壤趙氏)일문을 중용하면서 안동김씨 세도를 견제하였다. 한 걸음 나아가 세자 익종(世子 翼宗)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까지 하도록 했으나, 풍양 조 씨의 세도정치로 변질되었으며 그나마 1830년 세자가 일찍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
1827년은 마침내 21세의 김병연에게 다가온 두 번째 운명의 해였으니, 그 해 봄 영월관아에서 실시하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고 그의 아내가 임신을 하였다.
1828년 순조 28년 무자년(戊子年)의 새 해가 밝았다. 22세가 된 김병연은 정월에 태어 난 장남에게 답답한 세상을 훨훨 날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는지, 빛나는 깃 학(翯), 고를 균(均)의 학균이라고 이름을 짓는다. 그러나 장남의 출생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영월 백일장의 쓰라린 한을 가슴에 품고 상경하였다. 안응수의 사랑방 문객이 되어 천부적인 빼어난 글 솜씨로 과거시험 응시와 벼슬길을 모색한다.
마침 그해는 무자년(戊子年)으로 자(子)가 들어있는 식년(式年)이어서 3년마다 치르는 식년시(式年試)가 있는 해였다. 김병연은 한양에서의 과거 치르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정치질서와 사회기강은 물론 과거제도는 문란할 대로 문란해져 김병연은 극도의 실망감과 좌절에 휩싸인다.
1830년 순조 30년 24세가 된 김병연은 한양에서의 청운의 꿈을 접고 연초에 귀가를 한다. 김병연의 쓸쓸한 귀가에 실망한 어머니께서 친정인 충청도 결성현(지금의 홍성군)으로 가신다. 불운이 겹치는지 병약하던 형 병하가 슬하에 손도 없이 사망을 한다. 병연은 장남 학균을 형 앞으로 입양하여 혼자 몸이 된 형수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러는 중에도 둘째 익균이 태어난다. 김병연은 역시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길 염원했는지 날개 익(翼)자를 이름으로 했다.
<적벽 전경>
1831년 봄이다. 고달프고 어지러운 세상은 아랑곳없이 만물이 생동하고 새 생명의 싹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25살의 나이를 맞은 김병연은 잠시 금강산에 다녀올 생각을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게 평생에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못할 방랑길이 될 줄이야. 그건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집을 나선 뒤 홀로된 형수 창원 황씨가 2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집에는 김병연의 아내인 장수 황씨와 4살 학균, 2살 익균만 남았다. 하지만 김병연은 그 사실을 모른 체 금강산을 휘돌고 있었다.
1834년 순조의 재위 34년째의 해이다. 그 34년 동안 조선은 유례없는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을 당했으며 19년에 걸쳐 수재(水災)가 있었다. 그렇게 크고 작은 천재지변이 잇달아 발생하여 민란, 농민봉기와 더불어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경제는 파탄이 나는 등 백성들의 삶은 황폐하고 궁핍했다.
고구마와 감자 등 구황작물을 적극 보급했으나, 도적들이 떼를 이루고 단(團)을 만들었다. 돌아다니며 빌어먹는 거지 도적 떼들은 자신들을 유단(流團), 떠돌이 광대와 재인들은 채단(彩團)이라고 칭했다.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도적 떼가 되어 지방은 물론 한양인근의 관청을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였는데 장교와 관리들도 감히 체포하지 못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왕은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 사부수권(四部手圈), 대학유의(大學類義), 서운관지(書雲觀志), 정조어정홍재전서(正祖御定弘齋全書), 동문휘고(同文彙考) 등을 간행하게 하고,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는 등의 치적이 있었다. 순조는 1834년 11월 45세로 생을 마감하고 경기도 광주에 묻혔으니 인릉(仁陵)이 그의 또 하나의 묘호(墓號)이며 능호(陵號)이다.
순조가 승하한 해에 김병연의 나이는 28세가 되었고 걸식 유랑을 시작한지 4년여가 되었다. 그는 생의 무상함을 가슴에 품고 젊은 혈기를 발걸음에 삭이며 금강산을 돌아 동해안을 타고 북녘 산하를 밟고 있었다. 그의 발길은 강원도 통천을 지나, 함경도 함흥, 홍원, 단천에 이른 뒤 길주 명천까지 이어졌다.
<가까이 본 적벽>
<적벽의 삿갓 사공>
<예전 적벽>
<오늘의 적벽 강. 무등산이 저만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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