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홍경래 1811년 12월, 그리고 다음 해 4월
1811년 겨울이 왔다. 농민들이 한해 농사를 거둔 12월 20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속전속결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기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이틀 앞당겨 18일에 봉기하였으니, 우리가 이야기하는 홍경래 난이다.
홍경래의 난은 한마디로 조선왕조와 세도 정권을 부정하는 무장민중봉기였다.
조선 사회는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급격한 변화의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광범위하게 진행된 토지 겸병(兼倂)과 농사법의 발달은 농민층의 분해를 가속화 시켰다.
순조의 장인인 안동 김씨 김조순이 주도하는 세도 정권의 일당 전제로 삼정은 문란해져 농토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 도적, 걸인이 되거나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반면에 일부 농민들은 농업 기술과 상업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여 부농이나 지주가 되는 등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일어났다.노비제도가 붕괴 되어가고, 상민보다 양반의 숫자가 더 많아지는 기현상이 벌어지면서 신분 질서가 급격하게 와해되어가던 당시에 이렇게 성장한 부농들은 지방의 유지로 활동하면서 사회 변혁의 변수로 등장하였다.
또한 상업에서도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들이 등장하여 대상인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홍경래의 난에서도 지도층 가운데는 이렇게 성장한 부농층과 대상인이 다수 끼어 있었다.그들은 세도 정권에 의한 과거 제도와 국가 기강의 문란, 삼정을 통한 관리들의 횡포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몰락한 양반과 지식인 등이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새로 등장한 부농과 사상인들의 물력과 조직력 등이 결합하여 10여 년 간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사하였으니 일거에 수많은 백성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홍경래는 본디 양반 출신으로 평안도 용강 출신이다. 그는 과거에 수차례 떨어지면서 그것이 서북인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 대우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기고 과거를 포기했다.
분노와 좌절, 그리고 사회변혁을 꿈꾸며 당대의 제도적 모순에 눈을 뜬 그는 평안도 가산에서 서자 출신 지식인 우군칙과 만나게 된다.
현실에 대한 두 사람의 불만은 곧 굳건한 동지애로 뭉치게 하였고 체제 변혁의 의지로 바뀌어 봉기를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그들은 우선 평안도 내의 부농층에게 접근하여 그들과 제휴하였고 자금 마련을 위해 상인들과도 자주 접촉하였다.
사상인들은 평소에 중앙 정부에 불만이 많은 계층이었다. 그들은 또 가산 다복동의 부호 이희저를 포섭하여 봉기를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풍수적으로도 천혜의 요새인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또 봉기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운산 촛대봉에 광산을 열어 유민층을 흡수하여 군대로 삼는다. 이 밖에도 당시 세도 정권에 대하여 불만이 깊었던 재상 출신의 김재찬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김사용, 김창시 등 평안도 일대의 지역 실력자 및 지방 관속들, 그리고 유랑 지식인과 유민 계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포섭하여 봉기 세력으로 조직했다.“나는 지금부터 평서대원수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세상을 만들 거다. 모두들 힘차게 진군하라!”
“와, 와와와!”
홍경래의 우렁찬 목소리가 12월의 차가운 삭풍을 뚫고 산을 울리고 들판을 흔들었다. 울긋불긋 기치와 창검을 높이 흔들며 봉기군의 사기와 의욕도 높았다. 그들의 힘찬 함성도 산기슭에 부딪쳐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1811년 12월 18일 그들은 마침내 출병을 단행했다.그들이 출병에 앞서 내건 격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서북인에 대한 차별 철폐였다.
둘째, 안동 김 씨의 세도 정권을 타도하자였다.
셋째, 신인 정씨가 출현했으니 그를 참 임금으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첫째 격문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과거에 등용될 수 없었던 홍경래의 한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두 번째는 세도정치의 폐해로 절망에 빠진 백성들의 한을 달래며, 봉기에의 당위성과 명분, 적극적인 참가를 독려하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는 왕조를 뒤엎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왕권은 추락할 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 구겨진 왕권의 쇠락과 새로운 민중세력의 잉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홍경래는 봉기군을 둘로 나눴다.
봉기 당일 가산을 무혈입성하여 항복하지 않는 군수 정시(鄭蓍)의 목을 배 기세를 올리며 이어 박천을 함락시키고 남진군은 서울로 남진하였다. 북진군은 곽산, 정주, 선천 등을 불과 며칠 사이에 모두 석권하며 파죽지세로 관군을 몰아붙였다.
거병한 지 열흘 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그렇게 가산에 이어 박천, 곽산,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등 청천강 이북의 8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때에 김병연의 조부인 김익순은 선천부사 겸 방어사였다.
홍경래 난 이전에 김익순은 함경도 함흥 중군이었다. 중군은 그 지역 군사의 제 2인자였다. 그 김익순이 평안도 선천부사 겸 방어사로 옮긴 것은 평안도의 형세가 심상치 않은 탓이었다. 방어사 역시 요직으로 그 지역의 군사책임자였다.
그가 홍경래 난 3개월 전에 그렇게 중요한 임무를 맡고 요직에 등용된 것은 당시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도정치의 중심인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었고, 김익순은 그와 같은 항렬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당시 정권의 최전선에 김익순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홍경래가 거병한지 며칠 만에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봉기군에게 선천군은 함락 되고, 외성인 검산산성에 진을 치고 버티던 김익순은 허망하게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러면 봉기군이 그토록 삽시간에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그것은 십여 년의 철저한 준비 끝에 각 지역에서 얽히고 설키며 뿌리를 내린 내응 세력들이 적극 호응해 준 결과였다.
내응 세력은 각 지역의 좌수, 별감, 풍헌 등 관리와 별장, 천총, 별무사 등 무장들이었다. 이들은 그 지역에 기반을 둔 부농이거나 사상인들로 돈을 주고 신분 상승을 이룬 계층들이었다. 그들이 움직이니 농민들이나, 유랑 지식인, 유민층 등 불만세력의 포섭은 한층 손쉽게 이루어졌다.
나이 어린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정권을 농단하는 세도 정치로 백성들의 고통은 가중되고, 그걸 견디지 못한 민중봉기로 사회는 더욱 불안해지는 악순환이 계속 되고 있었다. 더하여 가뭄과 수해, 역병이 겹치는데 부패한 관리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출세만을 염두에 두고 백성들의 고충은 나 몰라라 하였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를 쇄락의 길로 선 왕조였다.
그러나 전 국민의 6, 7할이 양반이었다는 기록을 보더라도, 아직은 지배계층의 힘이 더 우세했다. 왕조는 곧 정신을 차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이윽고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타락한 정부였고 나태한 관군이었지만, 단기간에 긁어모으다시피 한 봉기군은 정규 훈련을 받은 관군의 싸움 상대가 못되었다. 전투는 개인의 실력으로 치르는 힘겨루기가 아니었다. 훈련된 집단이 조직적으로 싸우는 거고 그 싸움에 임하는 정교한 작전이 있어야 했다.
그저 함성만 지르고 달려드는 작전은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부나비였다. 그렇게 봉기군은 오합지졸의 처지가 되어 버렸다.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박천, 송림, 곽산 전투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연이어 패배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후퇴를 거듭하여 속수무책으로 정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봉기군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세력이 약화된 것은 무엇보다도 봉기군 자체의 취약성 때문이었다.
붕기군의 주류를 이루는 대다수는 농토를 잃고 급여를 받는 임금 노동자가 된 농민과 유민들이었다. 그리고 지도층은 몰락 양반층이거나 신흥부호와 상인들이었다.
명분이 있고 승리를 거듭할 때는 몰랐지만, 관군에게 밀리면서는 이들의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봉기군의 대다수를 이루는 주류층과, 봉기 지도층인 부호, 상인, 지식인층이 가지고 있는 이해관계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소농, 빈민층은 삼정의 문란을 혁파하고 다시 정착 농민으로서 안정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이 바람이었다. 하지만 지도부는 단순한 제도 개혁 차원이 아닌 정권 전복을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당시 세도 정권의 횡포에 대해 일어선다는 공동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표가 각기 달랐기에 폭발적인 힘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이다. 낮은 수준의 이해와 욕구를 원하는 하층민의 자발적인 유도를 얻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일단 정주성에 들어간 뒤, 봉기군은 새롭게 재편성을 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의 소극적 참여자나 돈 받고 고용된 군사들로 이루어진 봉기군이 아니었다. 새로운 세력의 자발적인 참여로 봉기군은 적극적이고 사나운 군대로 변모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소극적이던 봉기군이 강인한 군대로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을까?그것은 관군의 상식을 벗어난 잔혹한 초토화 전술에 기인했다.
정주성 일대의 양민이나 농민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반란군으로 여겨졌다. 그들은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의 대상이 되어 관군에게 도륙되었다.
그렇게 관군의 횡포와 무자비한 살육을 피해 정주성으로 들어온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적극적인 반군 세력이 되었다.
봉기군 지휘부도 부자들의 재산에 대한 징발을 단행하여 농민 각자에게 평등한 분배를 제공했다. 그 때문에 지휘부에 대한 농민들의 신뢰도 더욱 튼튼하게 형성되었다.
비자발적 참여자로 이루어진 봉기군의 사기가 낮아지고 하나 둘 정주성을 빠져나갈 때, 이렇게 주변 농민들이 새롭게 합세하여 정주성의 봉기군은 순식간에 자발적 농민 봉기군으로 전환되었다.
이때부터 홍경래의 봉기군의 목표는 명확해진다. 왕조에 대한 불만 세력의 정권 전복 기도에서, 자발적 농민 항쟁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그렇게 뚜렷한 목표로 결속된 농민 봉기군의 사기는 악다구니로 변했다. 보급로가 끊기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를 악물고 생사를 초월했다.
봉기군은 군비나 숫자에서 몇 배나 우세한 관군을 맞아 4개월간이나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전투는 어디까지나 전투였다. 장기간의 전투로 이어지면서 전략물자의 우세로 판가름이 났다.
정주성은 결국 관군의 화약 매설로 1812년 4월 19일 폭파되고 홍경래는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때 사로잡힌 수는 2983명이고, 그 중 10세 이하 남아 224명, 여자 842명을 제외한 장정 1917명은 4월 23일 모두 효수되었다.
이로써 10수년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홍경래 등은 천추의 한을 품은 체 햇살에 스러지듯 마지막 전투에서, 형장에서 한 방울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리하여 그 해 1월초부터 시작된 정주성 전투는 3개월 15일로 마감되고 말았다.
그러나 홍경래의 봉기가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조선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체제를 표방함으로써 큰 타격을 가하였다. 결과론적으로는 조선왕조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가 죽은 뒤에도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홍경래의 난에서는 소극적 입장을 취했던 소농, 빈민층들이 철종 조에 일어나는 임술년 진주민란에서는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 날 홍경래 난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시각, 그리고 봉기에 대한 평가는 시기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1950년 이전에는 당쟁사적 관점에서 파악하였다. 서북인의 푸대접에 대한 반발이라든가 홍경래 일파의 정권 탈취 기도로 평가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는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생긴 향촌 부호, 경영형 부농, 서민 지주, 사상인, 몰락 양반 및 지식인 등의 지도층이 임금 노동자와 빈농을 동원하여 일으킨 반봉건 농민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오늘 날의 사회현상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금의 현실은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시장경제가 사회의 모든 현상을 주도하고 있다. 그에 힘입어 과거에 무소불위의 권력과 부를 누리던 양반계급처럼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자본의 힘은 공룡이나 문어발처럼 사회전반을 장악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빈민층이 두꺼워지고, 조선조 말엽처럼 사회의 양극화는 극심해지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도 있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처럼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으면 당시의 사회현상이 되풀이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것인가?
당시의 세도 정치가 오늘 날 정당 정치와 어떻게 다른지? 왕조시대에 오직 신분상승과 입신양명, 가문의 영광 유지를 위해 전 백성의 70% 가까운 양반세력의 젊은이들이 매달렸던 과거시험에 대한 광풍과 오늘 날의 일류학교, 각종 고시에 매달리는 고시광풍과 뭐가 다른지? 당시의 매관매직과 오늘 날 취직, 승진의 낙하산 인사, 거액기부금 취업, 특정 지역, 인물에 대한 줄서기, 학연, 혈연, 지연의 인사 등이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시 형태와 내용은 다를지라도 홍경래 시대로 되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풍자와 조소, 비판, 해학, 그러나 그건 패망의 길을 걷는 조선의 얼굴이었다.
김삿갓의 참 모습은 인간의 원초적 서정이었다.
홍성담의 그림도 수용 못하는 사회는 패망의 길을 걷는 사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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