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시인 김삿갓

흰구름이거나 꽃잎이거나 5-6

운당 2012. 11. 25. 07:10

6) 조선의 지식인 과객

 

과객(科客)은 과거를 보러 오거나 보고 돌아가는 선비를 일컬었다.

그러나 과객(過客)은 말 그대로 지나가는 나그네이다.

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과거를 보러 오거나 보고 돌아가는 선비, 나라의 명이나 관청의 심부름으로 타지에 다녀오는 사람, 개인적인 일로 이웃 고을을 오가는 사람, 산천경개를 유람하는 여행객, 살길을 잃고 유랑을 하는 유민이나 거지, 일정한 일이 없이 떠돌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여기 저기 왕래하며 장사를 하는 사람, 떠돌이 예인이나 장인 등 모두가 다 과객이라 할 수 있다.

우리말로 길가는 나그네라고 표현하면 다 포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김삿갓처럼 정처 없이 방랑하며 남의 집 신세를 지는 지식인 나그네에 한해서 과객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들은 지배계급 상층에서 분화되어 나온 계층이다.

또 그들은 대부분 중앙정계와 어떤 줄도 잇지 못한 채 몰락의 길을 걸으며 농사지을 토지도 갖지 못하고 자신의 지식을 이용, 유랑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잠깐씩 머무를 때는 과객(過客)으로, 오래 머무를 때는 훈장을 하였다.

그들 지식인, 시골 훈장, 자유농민들 가운데 일부는 농민군의 지도자가 되어 현실 개혁을 기도하기도 했다. 이들의 사회적 발언은 비판적이되 시나 글 속에서는 익명의 을 쓰고 나타났다.

그리고 한 마디로 말해서 과객은 바로 문사(文士)거지인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과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을 마련하는 재주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인심이 흉흉할 때나, 풍년가를 부르는 태평성대거나 지나가는 과객들은 그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조 시대에 우리나라에도 과객제도(過客制度)가 형성 되어 있었다.

막부시대의 일본이 칼 한 자루를 들고 산천을 두루 돌아보는 사무라이 과객제도(過客制度)였다면, 우리나라는 붓 한 자루를 들고 천하를 두루 돌았는 선비 과객제도(過客制度)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들 과객들은 허기가 지고 잠자리가 필요할 때 마을을 만나면 먼저 쓸만한 집부터 살폈다. 이왕이면 큼직한 솟을 대문이 좋겠다. 양반집이 아니면 부잣집이 우선 공략 대상이었다.

그들은 대뜸 문간 앞에서 이리 오너라!’하고 크게 외치며 들어선다. 주인이 없더라도 상관없다. 조금 있으면 간단한 주안상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윽고 주인이 오면 수인사를 하고 불꽃 튀는 탐색전이 벌어진다. 이 경우, 주인이 과객의 실력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어야 올바른 대접을 받고 며칠, 몇 달이라도 그 집에 머무르면서 아이들의 독선생(獨先生) 노릇도 하고 촌중(村中)의 고로(古老)들과 수작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정도에 이르려면 과객(過客)은 국조 고사(國朝故事)에서부터 풍수지리(風水地理), 야담(野談), 시작(作詩), 풍월(風月) 등 문인 취미로부터 장기, 바둑 등의 잡기에 이르기까지 무불통지(無不通之)하여야 제대로 대우를 받게 된다.

천민 창자(唱者)들도 시조, 판소리 등이 능하면 이런 과객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조선조에는 그러한 유명한 과객이 몇 사람 있었다.

세조 때의 생육신인 김시습(金時習)이 일생을 방랑객으로 지냈고 선조시대의 이토정(李土亭), 봉건 체제에 반항했던 허균(許筠)도 강원도, 경기도 등을 방랑하다가 사형을 당하였다. 임제(林悌) 임백호(林白湖) 시인도 내 노라 하는 문객(門客)이요, 쟁쟁한 과객(過客)이었다.

여기서 잠깐, 김삿갓의 능청스럽고 무르익은 과객솜씨를 살펴보겠다. 마침 그날은 운이 좋았다. 일곱 아들을 둔 다복한 노인의 환갑연(還甲宴)이었던 것이다. 그런 잔치에서는 문객들이 축시를 지어 장수를 비는 게 풍습이기도 했다.

살펴보니 너른 마당에 쳐진 차일(遮日)만도 여러 개인데, 잔치는 무르익어 들락날락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김삿갓이 헛기침을 하며 푸짐한 음식상 모퉁이에 끼어 앉더니 대뜸 한 소리 읊었다.

피좌노인불사인이구나(彼坐老人不似人)’ 저기 앉은 저 노인이 도무지 사람 같지 않구나.

이 소리를 들은 자식들의 얼굴이 대뜸 붉어졌다. 이런 경사스런 날에 아버지를 보고 사람 같지 않다니 말이다.

그러자 김삿갓이 두 번째 구절을 읊었다.

의시천상강진선이로다(疑是天上降眞仙)’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인가보다.

두 번째 구절을 읊자, 이번엔 자식들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세 번째 구절을 듣더니 다시 눈가에 쌍심지가 돋았다. 금세라도 김삿갓의 멱살을 잡을 듯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기중칠자개위도구나(其中七子皆爲盜) 여기 있는 일곱 아들이 모두 도둑놈이다.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얼굴로 자식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우르르 달려들 때, 김삿갓이 빙그레 웃으며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투득천도헌수연이로다(偸得天桃獻壽筵)’ 천도를 훔쳐다가 환갑잔치에 바쳤구나.

 

* 천도 : 복숭아나무가 자라서 처음 열매를 맺을 때, 그걸 먹으면 장수한다고 했다. 자식들이 그 열매를 훔쳐다 부모에게 드렸는데, 그런 아들을 도적이라 하지 않고 효자로 칭찬하였다.

 

그 날 김삿갓이 그 환갑연의 귀한 진객으로 일곱 아들로부터 극진히 대접 받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김삿갓 같은 과객을 언제라도 환영하며 잘 대접한 사람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1600년대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꾼의 전통을 이어온 조선 팔도에 널리 알려진 경주 최 부자 집이 있다.

부자(富者)3대를 못 간다는 부불3(富不三代)라는 옛말이 있음에도 그 집이 오늘날까지도 부자 집의 전통을 이어온 데는 나름대로의 가훈철학(家訓哲學)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는 그 집의 가훈철학 4가지 중 4번째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며 당시의 과객들의 모습을 미루어 짐작해보기로 한다.

 

넷째,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과객은 길 가던 손님, 즉 나그네이다. 예전에는 요즘같이 교통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여관이나 호텔이 많지 않았다.

따라서 여행을 하는 나그네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양반집이나 부자 집에 며칠씩 또는 몇 달씩 그 집 사랑채에 머물다 가는 일이 흔한 일이었다.

이들 과객들의 성분은 다양하였다. 몰락한 잔반(殘班)으로서 이 고을 저 고을의 사랑채를 전전하며 무위도식하는 지식인이 있었는가 하면, 학덕이 높은 선비나 시를 잘 짓는 풍류객도 있었고, 무술에 뛰어난 협객도 있었다.

최 부자 집에서는 이들 과객들이 누구냐를 따지지 않고 후하게 대접하였다.

어느 정도 후하게 대접하였는지를 살펴보면 최 부자 집의 1년 소작수입이 쌀3천석 정도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1천석은 가용으로 쓰고, 1천석은 과객 접대하는데 사용하였고, 나머지 1천석은 주변 지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데 썼다고 한다.

1년에 1천석의 쌀은 당시의 경제규모로 환산해 보면 엄청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과객을 대접하는데도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다.

과객 중에서 상객(上客)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매끼 식사할 때마다 과매기(마른 청어)1마리 제공하고, 중객(中客)에게는 반마리, 하객(下客)에게는 4분의 1마리를 제공하였다.

최 부자 집에 과객이 많이 머무를 때는 그 숫자가 100명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 이상을 넘어설 때는 최 부자 집 주변에 살고 있던 초가(노비들이 사는 집)로 과객들을 분산 수용하였다고 한다. 부득이 과객을 분산해야 할 때에는, 그 과객에게 반드시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과매기 1마리와 쌀을 들려서 보냈다.

과객이 최 부자 집에서 쌀과 과매기를 가지고 주변의 노비 집으로 가면, 그 노비 집에서는 무조건 밥을 해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과객들을 접대하는 대가로 최 부자 집 주변에 사는 노비들은 소작료를 면제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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