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시인 김삿갓

흰구름이거나 꽃잎이거나 6-2

운당 2013. 4. 20. 13:32

2) 김익순

 

병연의 조부인 김익순은 순조의 장인이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핵심인물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과 같은 항렬이다.

김익순은 1764(영조40)에 태어나 두 살 위인 전주 이 씨와 결혼하였다.

26세에 남선무과(南宣武科)에 급제하여 48세에 함흥 중군(中軍)에 이르렀다.

함흥이 정권의 핵심에서는 멀리 떨어진 국가의 변경이지만, 변경이기에 국가방위의 중요한 곳으로 중책의 자리라고 할 수도 있다.

조선시대 각 도의 감영에 있는 순영중군(巡營中軍)은 정3품관이다. 이들 순영중군은 총 10명이었다.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황해도·강원도·평안도·함경도 감영, 그리고 안무영(按撫營통어영(統禦營)에 있었다.

군영의 체제는 특이해서 최고직인 대장(大將)이나 사(使)는 무장이기보다는 비변사당상(총융청), 병조판서(훈련도감), 유수(수어청) 등이 겸임하는 행정직인 경우가 많았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각 영()마다 전문 무장인 중군을 별도로 둔 것이다. 이들은 각 영에서 대장 또는 사를 보좌하면서 실무를 맡아 보았다. 즉 군안(軍案)관리, 시취(試取고강(考講) 감독, 군기검사, 훈련감독 등의 임무를 맡았다.

인사방식은 대체로 단일후보를 추천하여 임명하는 방식이었는데, 1778(정조 2) 이후 3명을 추첨하여 병조에서 결재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중군의 시예(試藝)는 편전(片箭) 10발을 쏘아 5발을 명중시키면 무명 10, 삼베 8, 3, 1장을 상으로 지급했다고 한다.

당시 익순의 위치와 무인으로서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출세에는 세도정치의 중심 세력인 안동 김 씨의 후광이 있었을 거고, 설령 과거시험이 형식적이었을지라도 무인의 실력은 갖추고 있었을 거다.

이어 그는 평안도의 시국이 불안해지자, 홍경래 난이 일어나기 3개월 전에 압록강 하류인 선천부(宣川府)의 부사 겸, 방어사로 임지가 변경 된다. 서부 평안도의 병권을 한 손에 쥔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으니, 일종의 영전을 한 셈이다. 이걸 보더라도 세도정치의 신임이 두터웠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당시의 평안도 상황이 몹시 불안정 했다는 것이다.

홍경래가 봉기를 위해 10여년의 거사준비를 하는 동안 평안도는 일촉즉발의 폭발물과 같았다. 그 화약고의 한 중심으로 익순은 들어갔던 것이다.

익순은 고향인 경기도 양주에 가족을 두고 임지에 부임하였다.

그리고 주변 정세를 살펴보니, 생각보다도 더 상황이 심각하고 어렵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익순은 성의 경계를 강화하고 봉기에 대비해 최선을 다했을 거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있었다. 백성들의 민심은 물론, 성안의 아전이며 관속들도 이미 홍경래 군과 긴밀한 내통이 이루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홍경래의 봉기가 일어나기 두어 달 전, 익순은 마침내 성을 비우고 외성으로 들어갔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면 평지에 있는 본성보다는 산성인 검산산성이 적을 맞아 싸우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주변의 아전들과 관속, 그리고 방어사 휘하의 속오군을 홍경래의 봉기군 세력과 결리 시키려는 뜻이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외성을 수리하고 경비를 강화했다. 휘하 장졸을 독려하며 전투태세를 늦추지 않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마침내 운명의 시간은 다가왔다.

1811년 순조 11년 겨울이 시작되었다. 북녘의 추위는 남달랐다. 첫 추위지만 매서운 삭풍이 시국정세만큼이나 혹독했다.

봉기군은 가산의 다복동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거사의 비밀이 새어나가고 말았다.

그 해 1218, 홍경래는 거사일인 20일을 이틀 앞당겨 2천여 군사를 이끌고 거병을 했다.

이미 청천강 이북 지역은 거의 다 내통이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가산, 곽산, 정주, 선천, 철산 등 청천강 이북의 8개 군이 홍경래의 수중에 들어갔다. 거병한지 20여일만의 일이었다.

당시 가산 군수였던 정시는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다. 끝까지 항복을 하지 않고 홍경래 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익순이었다. 가산, 곽산, 정주가 떨어졌다는 소식이 겨울바람에 들려올 때마다, 산성의 군졸은 줄어들었다. 마침내 봉기군이 가까이 왔다는 첩보를 받았다.

익순은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병사를 독려해, 성벽의 경계를 엄히 하고, 봉기군의 기습에 대비했다.

밤이 되었다. 익순은 갑옷 무장을 단단히 하고 친히 성벽경계를 둘러봤다. 어두운 하늘에는 별빛이 초롱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봉기군이다! 봉기군!”

커다란 함성이 성문 쪽에서 들렸다. 순식간에 사위가 횃불로 환히 밝았다.

성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누군가가 내통했음이 틀림없었다.

봉기군은 활짝 열린 성문으로 물밀듯이 쳐들어왔다.

나는 부원수 김사용이다. 이미 이 검산산성은 무너졌다. 항복을 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홍경래군의 부원수라는 인물이 칼을 빼들고 맨 앞장을 서 달려왔다.

익순은 전신의 힘이 쑥 빠졌다. 칼을 빼들 의욕조차도 없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성문이 열리고 나니,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항복하지 않으면 베겠소!”

뒤돌아보니, 그동안 외성까지 따라와 일했던 낮 익은 농민이었다.

나 역시 홍경래 대원수의 휘하에 있소. 이제 세상은 바뀌었소. 항복을 해서 목숨을 보전하시오.”

무엇들 하느냐? 이 자를 처단하라!”

한 가닥 희망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지만, 그나마 몇 남지 않은 별장, 천총, 파총, 별무사 등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마냥 막대기처럼 서 있기만 했다.

용서하시오!”

낮 익은 그 농민이 억센 팔로 익순을 쓰러뜨렸다. 미리 준비한 듯 밧줄로 익순을 포박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위의 장졸들은 바라보기만 했다. 이미 그들도 홍경래에게 투항을 해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붙잡힌 익순은 정주성으로 끌려가 홍경래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어떻게든 기회를 엿보아 상황을 반전 시켜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18121월 말 봉기한지 한 달 보름여가 지났다. 마침내 봉기군은 관군에게 쫓겨 정주성 안으로 몰렸다.

그리고 3개월 보름여를 봉기군과 관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기회가 왔다. 수세에 몰린 봉기군은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포로들에 대한 감시의 눈길도 허술해졌다.

저녁 무렵이었다. 자신을 포박했던 그 낮 익은 농민이 거처에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익순이 그 뒤를 따랐다. 성 밖까지 나갔다.

어느 산모퉁이였다. 익순은 다짜고짜 뒤에서 그 농민을 덮쳤다. 단숨에 쓰러뜨린 뒤 입에 재갈을 물리고 미리 준비한 밧줄로 꽁꽁 묶었다.

익순의 갑작스런 기습에 쓰러진 그 농민은 홍경래군의 중간급 두목이었다.

익순은 그 농민을 전리품으로 삼아 관군에 투항하였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였다지만, 온 천지가 뒤집히듯 한 난리 통에 누가 자세한 사실을 알랴 싶었다.

사세 부득하여 숨어있으며 기회를 엿보았다. 그리고 비록 소두목 급이지만 홍경래의 심복인 적장까지 전리품으로 잡아왔지 않느냐?’

김익순은 충분히 정상이 참작 될 것이라고 애써 위안을 삼았다.

또 무엇보다도 김조순이 집안이고 그 일족의 후광을 얻어 방어사까지 했다는 게 든든한 힘이었다. 조정을 장악한 그들이 어떤 경우든 자신의 편이 되어 주리라 여겼다.

조정에 보고해 처리할 테니, 뒷일을 기다리시오.”

토벌군인 관군 장수의 말이 조금 불안했지만 무슨 큰 문제가 있으랴 싶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그동안 숱한 민란이 없었던 게 아니지만, 홍경래 난은 조금 달랐다. 순식간에 왕조를 발칵 뒤집었다. 손쉽게 가라앉을 거라 생각했는데, 강력한 저항에 번개에 맞은 것처럼 세도 세력은 혼쭐이 난 것이다.

그들은 국기를 뒤흔든 난리를 수습하면서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했다. 영웅과 대비되는 역할이 또 한 사람 필요했다.

영웅은 바로 죽음으로 왕조에 충성을 다한 가산 군수 정시였다. 그와 대비 되는 극악무도한 역적 죄인은 홍경래 군에게 항복한 김익순이었다.

다시는 이런 반란이 있어서는 안 된다. 죽음으로 왕조에 대한 책무를 다한 정시의 충성을 가르치고, 항복을 한 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르렀음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가르쳐라.

모든 향교와 서당에서도 정시의 충성과 김익순의 죄를 가르치도록 하라. 각 지방의 과거문제로도 출제하라. 이 두 사람의 행적을 극명하게 알리고 가르쳐서 만고의 교훈이 되도록 하라고 독려까지 했다.

그렇게 조선 왕조와 세도정치의 핵심들은 체제유지의 한 방편으로, 그들의 실책과 실정을 외부로 돌리는 또 하나의 방편으로, 가산군수 정시의 죽음을 충신으로 만들었다. 반대로 방어사 김익순의 투항을 만고의 역적으로 대비시켰다.

싸움에 임해 장수이건 병졸이건 적군에 붙잡혀 포로가 될 수가 있다. 그러다 기회를 엿보아 공을 세워 자신의 실책을 만회할 수도 있다. 그것은 병가의 상사라고 했다.

그런데 세도정권은 자신의 일족이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 김익순을 오히려 만고의 역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자신들의 안위와 체재유지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다. 흔들리는 민심,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백성들에게 뭔가 본때를 보여야 했던 것이다.

김익순은 세도정권의 세력 강화를 노리는 희생양이요, 교과서가 되고 만 것이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김익순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나마 한 가닥 다행인 것은 멸족에서 곧바로 폐족으로 그 형량을 낮추어 준 것이다. 그것도 안동 김 씨의 세도정권이 베푼 특혜라면 일족으로서의 특혜일 수도 있다.

그들은 김익순을 이용하고, 슬그머니 형량을 낮추어주었던 것이다.

또 이런 기록도 있다. 당시 토벌군이었던 조문형(趙文亨)이 봉기군의 지도자인 김창시(金昌始)의 목을 베어오자, 익순이 그 수급을 만량에 사서 바치려 했다고 한다.

역적이 되어 기록을 당하는 자이니 뭐라고 뒤집어씌운들 할 말이 없겠지만, 그 거짓 죄까지 겹쳐져 익순은 멸족과 함께 최고의 형벌인 능지처참형(陵遲處斬形)의 극형에 처해져 49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 날 1218, 가산 군수 정시는 가산군의 아전들인 이맹억, 김응석 등의 안내로 무혈입성한 봉기군에게 붙잡혀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의 노부와 함께 맥없이 살해되었다. 그래도 만고의 충신이 되었다.

또 그 날 1218, 곽산군수 이영식은 벽장 속에 숨었다 들켜서 옥에 갇혔다. 기회를 엿보아 8살 아들을 업고 야반도주하다가 쫓기자, 아들을 버리고 정주성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다음 날인 1219, 정주목사 이주근도 향교로 숨었다가 좌수와 하급관리들에게 붙잡혀 봉기군에게 넘겨졌다.

이렇듯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는데, 유독 김익순을 홍경래 난군의 최고 주동자들과 동급으로 취급해 멸족과 함께 극형인 능지처참형으로 단죄한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은 억울한 일이다.

왕조와 세도정권이 필요한 것은 충신과 그에 대비되는 역적이었다. 그 대상으로 정시와 김익순을 선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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