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시인 김삿갓

흰구름이거나 꽃잎이거나 6-3

운당 2013. 5. 13. 07:47

3) 김안근

 

1786(정조 10)에 태어났으니 홍경래 난 당시 26세였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노비를 부리며 부유한 생활을 하였으리라고 여겨진다.

매사에 큰 어려움 없이, 부족함 없이 생활했고, 병하, 병연 형제에게도 독선생을 붙여 글공부를 시킬 수 있었다.

홍경래난 이후로 진주로 귀양살이의 형벌에 처해졌다고 하나, 실제로는 여주로 피신을 하였으리라고 여겨진다. 아버지인 익순이 있는 곳은 평안도여서 그곳의 소식이 늦게 전해지긴 했겠지만, 왕조의 형벌이 내려지기 전에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몸을 피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또 전답은 황급히 정리할 수 없었겠지만, 꽤 많은 금은패물을 가지고 몸을 피할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수많은 고초를 겪었지만은 병연의 어머니가, 병연의 뒷받침을 잘 한걸 보면 그래도 그만한 재력이 있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 짐작하건데, 아버지인 익순이 홍경래 난을 감지하고, 미리 아들에게 연락을 하여 사후 대비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 무인으로 20여년을 변방에서 보낸 사람으로, 그만한 예측정도는 할 수 있었을 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무튼 김안근은 홍경래 난이 있고 2년이 지난 1813년에 이천에 있는 아내와 황해도 곡산에 있는 병하, 병연 등을 데리고 경기도 가평으로 옮긴다.

어떻게든 멸족에서 폐족으로 된 가문을 일으켜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일그러진 운명을 돌려세우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안동 김씨 가문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터놓고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권세 밑에서 화초처럼 성장한 안근으로서는 참으로 막막하기만 했다.

자연 술을 벗 삼아 울분을 삭힐 수밖에 없었다. 가평으로 옮겨 셋째 아들인 병호를 얻었으나, 그 해에 그만 28세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강원 영월의 삿갓 문학관>

<삿갓 선생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