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청계계곡입니다. 의병장 양대박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지요.
나쁜 귀신 청계도 있어서 이 청계 양대박 장군 얼굴 볼 낯이 없습니다.>
홍경래 난은 그가 죽기 전 10년 전, 그의 나이 42세 때의 일이다. 어떻게든 장녀인 함평 이씨를 도와주었다고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함평 이씨는 부유한 집안 덕분에 천자문을 깨치고 세상의 이치에도 밝았다. 생활력도 무척 강해 걷잡을 수 없이 닥쳐오는 불행에 굴하지 않고 집안을 이끌었다.
시아버지인 익순이 홍경래 군에게 붙잡혀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닥쳐올 재난을 대비해 금은패물 등 가산을 정리해 아이들을 충복인 김성수에게 맡겼다. 남편은 여주로 자신은 이천으로 각각 몸을 숨겼다.
형벌이 멸족에서 폐족으로 한 단계 낮아지자, 1813년 남편과 함께 가평으로 모인 뒤, 셋째 병호가 태어났다.
함평 이씨는 술로 마음을 달래는 남편을 위로하면서, 어떻게든 세 아이를 잘 키우려고 했다.
그러나 그 해에 28세의 김안근이 술로 세월을 보내다 죽자, 상황은 더 어려워졌고, 가문을 쉽게 일으켜 세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일단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1년여 만에 북한강가 가평에서 남한강가 여주로 1814년에 이거를 했다.
한양과 가깝기도 하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소식 듣기도 쉽고, 어떻게든 세 아이를 잘 키워서 집안을 일으켜야겠다고 작정했다.
충분하진 않지만, 깊이 감춰 둔 금은패물도 아직 있었다. 여차하면 친정의 도움도 청할 셈이었다. 그런데 또 셋째 병호가 죽었다.
세상은 계속 뒤숭숭했다. 이 해에도 조선 팔도에 피바람이 불었다. 경상, 충청, 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 죽인 을해박해(乙亥迫害)가 그것이다. 경기도 용인의 이응길(李應吉)이 민란을 일으켰다.
더욱이 오가작통법이란 제도가 함평 이씨의 숨통을 조여 왔다. 폐족을 당한 자신들의 처지가 들통이 나면, 가문을 일으키기는커녕, 아이들의 장래에도 악영향을 미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함평 이씨는 다시 생각했다. 생활비도 적게 들고 아이들과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결단을 내렸다. 1815년 11살, 병하, 9살 병연 등을 데리고 남한강가 여주에서 강원도 영월 삼옥리로 이주 하였다. 여주에서 뗏목으로 250리에 이르는 곳이다. 지니고 있는 금은보화와 패물을 염려하여 배를 이용하여 그곳까지 갔다.
산골 마을에 묻혀서 세상의 눈도 피하고 아이들 글공부도 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가지고 있는 패물을 정리해 약간의 농토와 집을 마련한 함평 이씨는 뼈골이 부서져라 일했다.
큰 아이 병하는 몸도 약하고, 공부를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병연은 달랐다. 이미 5살에 천자문을 떼고 소학이며 동몽선습도 병연의 공부감이 아니었다.
병연은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중이었다. 그런 병연을 부러운 눈길로 보며 사람들은 천재, 수재라고 칭송을 했다.
함평 이씨는 그 병연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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