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과거제도
드러난 기록에 따르면 김삿갓과 홍경래는 다 과거제의 희생양이다. 특히 홍경래는 ‘서북인무리중용’이라는 조선조의 정책에 의해 자신이 과거에 낙방한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김삿갓 역시 당시의 과거제가 인재등용의 원칙을 잘 살렸더라면, 타고난 글 솜씨로 정승반열에 이름을 올렸을 게 틀림없다.
그 과거제도가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썩을 대로 썩은 시대에 살면서 청운의 꿈을 접어야했던 홍경래와 김병연의 심정을 헤아려보는 의미로, 여기서 잠시 당시의 과거제도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도 살펴보겠다.
① 식년시(式年試)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으로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되었다. ‘속대전(續大典 : 조선 후기의 법전인데 6권 4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경국대전 편찬 이후 최초로 개정된 정식 법전으로 이후의 대전통편, 대전회통과 함께 조선시대 4대법전의 하나이다)’ 이전에는 대비과(大比科)라 하던 것을 속대전(續大典) 이후부터 자(子), 묘(卯), 오(午), 유(酉)가 드는 해를 식년(式年)으로 하여 이 해가 되면 호적조사와 과거를 시행하고 이를 식년시라 했다. 식년시는 소과(小科), 문과(文科), 무과(武科)로 나눈다.
부정기적으로 보는 시험으로는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試)가 있다.
소과의 경우는 생원‧진사의 복시, 문과와 무과는 복시‧전시, 잡과는 역과(譯科), 의과(醫科), 음양과(陰陽科), 율과(律科)의 복시를 식년에 실시하였다. 초시를 거친 합격자는 예조에서 복시(覆試)를 거쳐 33명을 뽑고 전시(殿試 : 조선조 때 대과에 선발된 사람에게 왕이 몸소 보이던 과거, 곧 최종의 시험으로 결과에 따라 갑, 을, 병과로 등급을 정하였음. 고려 때부터 원나라 제도를 모방하며 조선조 때 제도화되었다) 에서 성적순으로 갑과(甲科)에 3명, 을과에 7명, 병과에 23명을 급제시켰다. 무과는 28명, 잡과는 역과가 19명, 의과 1명, 율과 9명, 음양과 9명 등 총 38명을 뽑았다.
식년시가 처음 실시된 것은 고려 선종 1년(1084)이지만, 조선의 태조 2년(1393)에 와서야 비로소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국가적 변고나 국상(國喪), 또는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는 식년시를 연기하거나 시행하지 않았다.
식년시는 그 해 1∼5월에 시행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농번기와 겹치는 이유로 생원 또는 진사의 초시는 식년 전해 8월 15일 이후에, 문과·무과의 초시는 같은 해 9월 초순에 각각 실시하였다.
생원과 진사의 복시와 문과·무과의 복시는 식년의 2월과 3월에 각각 실시하였다. 식년 문과는 총 163회에 걸쳐 시행되었다.
② 증광시(增廣試)
조선시대 즉위경(卽位慶)이나 30년 등극경(登極慶)과 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 또는 작은 경사가 여러 개 겹쳤을 때 임시로 실시한 과거. 소과(小科), 문과(文科), 무과(武科), 잡과(雜科)가 있었다. 태종 1년(1401) 왕의 등극을 경축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실시하였고, 그 뒤 14대 선조 때부터 확대되어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마다 실시되었다.
선조 22년(1589) 종계변무경(宗系辨誣慶), 90년 종계변무 및 상존호경(上尊號慶), 1605년 공신책훈(功臣冊勳), 상존호경, 이듬해의 즉위 40년경(慶), 광해군 4년(1612) 창덕궁 낙성 및 세자가례경(世子嘉禮慶), 효종 3년(1652) 왕세자가례, 입학, 김자점토역(金自點討逆)을 축하하기 위한 합삼경(合三慶), 현종 3년(1662) 효종부묘(孝宗廟), 양대비존숭(兩大妃尊崇), 왕비 책례(冊禮), 원자(元子)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합오경(合五慶) 등이 실시되었다. 식년시(式年試)와 마찬가지로 그 절차가 생원·진사의 초시(初試)·복시(覆試), 문과초시·문과복시·문과전시(殿試)의 5단계로 나누어지며, 시험과목도 같았다. 때로는 대증광(大增廣)이라 하여 문과합격자에 7명을 더하여 선발하였다.
③ 별시(別試)
조선시대에 정규 과거시험 외에 임시로 시행된 과거시험의 하나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와 인재등용이 필요할 때에 실시되었다. 세조 2년(1456)에 처음으로 실시되었고, 문과와 무과만 열고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와 잡과(雜科)는 열지 않았다. 처음에는 일정한 시행규칙이 없었으나, 영조 때 ‘속대전’에 이르러 일정한 규정이 생겼다. ① 별시문과(別試文科)에는 초시(初試)·전시(殿試) 2단계 시험이 있고, 경향(京鄕)의 유생들을 서울에 모아 고시하였다. 초시에서는 종2품 이상 3명을 상시관(上試官), 정3품 이하 4명을 참시관(參試官), 양사(兩司) 각 1명을 감시관(監試官)으로 하여 300명 또는 600명을 뽑았다. 전시(殿試)에서는 의정(議政) 1명이 명관(命官), 종2품 이상 2명이 독권관(讀卷官), 정3품 이하 4명이 대독관(對讀官)이 되어 시행하였다. 시취 인원은 일정하지 않아 가장 많을 때가 30명, 적을 때는 3명이었다. ② 별시무과(別試武科)에도 초시·전시 2단계의 시험이 있었다. 초시는 처음 서울에서만 보였으나, 후기에는 각 도에서도 치렀다. 2품 이상 문관 1명, 무관 2명, 당하(堂下)의 문관 1명, 무관 2명이 시관(試官)이 되고 양사(兩司) 각 1명을 감시관으로 시행하였다. 11기(技) 중 2∼3기를 선정하여 고시하였으며, 비율·평균에 의하여 선발하였다. 전시의 시관은 의정 1명을 더하여 초시와 같이 시험을 보였으나, 정원을 두지 않고 입격(入格)하는 대로 뽑았다.
④ 알성시(謁聖試)
조선시대에 실시된 비정규 문과·무과 시험으로 알성과(謁聖科)라고도 한다. 국왕이 문묘에 가서 제례를 올릴 때 성균관 유생에게 시험을 보여 성적이 우수한 몇 사람을 선발하는 것으로서, 태종 14년(1414)에 처음 실시하였다. 알성시는 문과·무과만 치렀다. 문과는 초시와 복시(覆試)는 없고 전시(殿試)만으로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알성시는 왕이 친히 참가한 친림과(親臨科)였다.
알성문과는 당일 합격자를 발표하였으므로 시관(試官)의 수도 많았다. 또 친림하므로 상피제(相避制)가 없어 시관의 아들이나 친척도 응시할 수 있었다. 국초(國初)에는 성균관 유생과 3품 이하의 조사(朝士)에게만 응시자격을 주어 성균관 유생들에게 학문 의욕을 고취하는 효과가 있었다. 뒤에 지방의 유생들에게도 응시자격을 주었다.
알성무과는 초시(初試)와 전시(殿試)로 나뉘어져있었다. 과목은 목전(木箭)·철전(鐵箭)·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芻)·과녁(貫革)·격구(擊毬)·기창(騎槍)·조총(鳥銃)·편추(鞭芻)·강서(講書) 등이다.
이밖에도 다양한 과거제도가 있었다.
음사(蔭仕)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다만 조상의 혜택으로 얻은 관직으로 남행, 생원, 진사, 유학 등의 벼슬을 두루 일컫는 말이었다.
수직(壽職)은 해마다 정월에 18세 이상의 관원 및 19세 이상의 백성에게 은전으로 주던 벼슬을 일컬었다.
정시(庭試)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시 대궐 안마당에서 보이던 과거이다.
감시(監試)는 조선조에 생원 진사를 뽑던 과거로 사마시(소과)라고도 한다.
중시(重試)는 문과 당하관을 위하여 둔 과거로 고려 16대 예종 17년에 최초로 실시하여서 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당상 정2품의 품계로 올려 주었다.
갑과(甲科)는 문과복시 합격자에게 예조에서 전시를 보여 성적에 따라 나누던 세 등급의 하나이다. 성적순에 따라 갑, 을, 병과로 구분하였다. 갑과의 정원은 3인으로 1등은 장원랑(종6품), 2등은 방안랑(정7품), 3등은 탐화랑(정9품)에 임명하였다. 을과(乙科)는 성적 제2위로 7명을 뽑았고 병과(丙科)는 제 3위로 23명을 뽑았다.
이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각도 감영에서 행하는 향시나 중앙에서 행하는 생진과 초시를 조흘강(照訖講)이라 한다.
소과의 조흘강은 소학(小學)을 뒤돌아서 외우는 배강(背講)이고, 복시는 가례(家禮 : 유학자로서 자격)와 경국대전(經國大典 : 조선의 헌법을 숙지)을 보고 읽는 임문고강(臨文考講 :본문의 앞뒤를 가리고 중간만 보여주고 문답하는 방법)이었다.
이 조흘강에 급제하면 이 초시, 김 초시라고 불러준다. 그리고 조흘첩(조(照)는 확인을 뜻하며, 흘(訖)은 글자 그대로 확인을 ‘마쳤다’는 뜻이다. 이 합격증이 있어야 다음 단계 시험에 등록하는 녹명(錄名)을 할 수 있다.)을 주는데, 이것이 있어야 생진과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된다.
그리고 각 지방에서 조흘강에 급제한 사람들이 한양으로 모여들어 3년마다 돌아오는 자(子), 묘(卯), 오(午), 유(酉)년에 과거를 보았는데, 이를 식년시라고 했다.
생원과는 경서를 암송하게 하고 또 거기에 대한 뜻을 물어보는 시험이다. 시험관에는 상시(당시 판서급), 부시(당시 참판급)가 있어 응시자를 불러서 열 번이나 암송을 들어보기도 하고 잘 외우면 통(通), 약(略), 조(粗), 불통(不通)의 네 가지로 나누어 통(通)은 2점, 약(略)은 1점, 조(粗)는 반점, 불통(不通)은 영점으로 하여 총14점 반 이상에 달하는 자를 급제로 했다. 이 생원과는 경서를 외우게 함으로서 강경과 또는 치경과라고도 부른다.
진사과는 제술과라고도 하며 본과 시험에서 시험관이 임석하여 감찰들로 하여금 차작 차필들을 못하게 엄중히 단속하는 한편 제목을 내고 운자를 정하여 시를 짓게 하고 시간을 엄수토록 했다.
이에 응모자들은 각자 준비된 필묵으로 시를 지어 장지에 18수를 써서 봉하여 시험관에게 내고 퇴장한다. 그러면 시험관들이 그 시축을 모아서 점수를 주는데 상상(上上), 상중(上中), 상하(上下), 이상(二上), 이중(二中), 이하(二下), 삼상(三上), 삼중(三中), 하하(下下)의 아홉 단계로 정한 뒤 상상(上上)은 9점∼하하(下下)는 1점으로 등분하여 채점했다. 대개 이하(二下) 4점까지를 택하여 급제로 정했다.
이런 식으로 3년에 한번 씩 생원, 진사 각 100명씩, 200명을 뽑아서 발표하였으며 급제자의 발표를 방이라 하였다.
이 생진과에 급제한 자 가운데 대과 즉 문과에 응시하려는 자는 성균관에 입학을 허가하였다.
그리고 대과(문과)에 응시하려면 우선 대과 초시에 급제하여야 하는데 문과 초시에서는 관시(館試 : 관시는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한 시험이다. 성균관은 생원 진사에게 입학자격이 주어졌다. 1400명이 정원이고 원점(圓占)이 300점 이상 되어야 관시(館試) 응시자격을 주었다. 식사 때 성균관 식당에 비치된 일종의 출석부인 도기(到記)에 아침, 저녁 두 끼를 표시하면 원점 하나를 주었다.)에서 50명을 뽑았다.
그리고 한성시에서 40명, 향시로는 경기에서 20명, 충청, 전라도에서 각 25명, 경상도에서 30명, 강원, 평안도에서 각 15명, 황해, 함경도에서 각 10명씩을 뽑아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이렇게 생진과에 급제한 사람이 성균관을 거치지 않고도 대과를 볼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한 것 때문에 총240명이 대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대과에 제1차 시험을 초장이라고 하는데 거기에서 경서를 암송시키는 것이 마치 생원과에서 시험하는 것과 동일했다.
제2차 시험을 중장이라 하는데 거기에서는 시부를 짓는데 마치 진사과에서 행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경서암송에 자신 있는 사람이 제1차 시험인 초장에 응시하고 시부 짓는데 자신 있는 사람은 중장에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대개는 초장에 응시하여 낙제한 사람이 중장에 응시하여 급제를 노리는데 제1차 시험인 초장에서 16명, 제2차 시험인 중장에서 16명, 그리고 양장에서 성적이 우수하였으나 합격권 내에 들지 못한 사람을 양장 시험관이 회합하여 1명을 뽑았는데 이것을 생획 급제라 했다. 그리하여 대과 급제자 33명을 선정하였다.
대과 급제자 인원은 아무리 성적이 좋다 해도 33명 이상은 뽑지 않는 것이 철칙으로 되어 있었으나, 성적이 나쁠 때에는 그 이하 30명, 혹은 28명, 이렇게 33명보다 적게 뽑을 수 있었다.
이렇게 대과 급제자가 선정이 되면 최후로 전시라는 것이 있었다. 전시에는 왕이 친히 임석하는 것이지만 최후의 시험이라는 뜻이다. 거기에서는 간단하게 대책이나 표(表), 전(箋), 잠(箴), 송(頌), 제(制), 조(詔) 중 어떤 것이나 1편만 짓게 하는 것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논문을 짓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전시의 결과를 보아 33명의 등급을 갑, 을, 병 3등급으로 나누어 제일 잘 지은 사람이 갑이라 하여 3명, 다음은 을이라 하여 7명, 다음은 병이라 하며 23명으로 정하는데 이것을 갑, 을, 병 3과라 한다.
제일 글을 잘 지은이로 전시에서 갑과에 급제한 첫째 되는 사람을 ‘장원랑’이라 하고 둘째 되는 사람을 ‘방안랑’이라 하며 셋째 되는 사람을 ‘탐화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생진과에 급제한 사람에게는 그 증서를 백지에다 써서 주는 까닭에 ‘백패’라 하였고, 대과에 급제하면 홍색지에 써 주었음으로 ‘홍패’라 하였다.
생진과 초시(조흘강)에서 생원과나 진사과에 장원을 하고 그리고 대과응시 자격시험인 대과초시(관시와 향시)를 거쳐 초장(제1차시), 중장(제2차시), 전시까지 장원으로 급제한 재사로 암송과 뜻에 잘못이 없고 글짓기까지 상상(上上)으로 장원급제한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왕이 불러 암행어사로 삼았고 승진도 빨랐다.
그러므로 과거에 응시하는 자는 장원급제를 하고자 애를 쓰는 것이다. 이상은 문사들에게 행하는 시험이고 다음은 무인 즉 군인에 대한 시험으로 무과라는 것이 있는데, 이 역시 초시(初試), 핵(試), 전시(殿試)의 구별이 있다.
무과초시도 문과초시와 같이 중앙과 각도 감영에서 행하는데, 중앙(경기 포함)에서 70명, 경상도에서 30명, 충청, 전라도에서 각 15명, 강원, 황해, 함경, 평안도에서 각 10명씩 선발하였다. 그렇게 총 190명이 중앙에서 행하는 ‘핵시’에 응시하여 다시 그 중에서 28명을 뽑아 전시에 응시토록 하여 활(弓)을 쏘게 하였다. 그 중 제일 잘 쏘는 무사 3명을 추려 갑과 급제라 하고 그중 첫째가는 무사를 장원랑, 둘째가는 무사를 방안랑, 셋째 가는 무사를 탐화랑 이라 함은 문과나 다름없었다.
그 다음 을과에 5명, 병과에 20명을 각각 선정한다. 이상 문과 무과는 소위 양반집 자제들에게 한하여 응시할 자격을 부여하는 까닭에 중인 이하 일반인은 응시해 볼 생각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 다음 잡과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중인들에게 보이는 과거라 하겠다. 거기에 외국어를 배워 가지고 역관 노릇을 하는 역과라는 것이 있어 그것도 초시에 한자(중국어)23명, 몽학(몽고어), 왜학(일본어), 여진학(만주어) 등은 각각 4명씩을 뽑아 다시 복시에 가서 한학(중국어 역관) 13명, 그 다음 몽학(몽고어 역관), 왜학(일본어 역관), 여진학(만주어 역관) 등은 각각 2명씩을 선발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문과 대관의 수행원으로서 통역관 노릇을 하였다.
그 다음 의과, 산과, 음양과, 율과 등이 있었는데 그것도 모두 초시, 복시의 구분이 있었다. 이러한 모든 과거(생진과, 대과, 잡과)도 3년 만에 한 번씩 자(子), 오(午), 묘(卯), 유(酉)년에 식년 과거라 하여 정기적으로 행하여졌던 것이다.
이렇게 과거에 합격을 하면 방목을 내리는데, 방목은 과거 합격자 명부를 말한다.
방목은 단순한 합격자 명단이 아니라 합격자 개인에 관한 신상정보는 물론 가족에 관련된 사항과 과거시험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방목마다 기재 사항이 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첫째, 과거 합격자 본인에 관한 사항으로 급제 당시의 지위, 성명, 자(字), 생년, 본관, 거주지, 관직명이다.
둘째, 가족과 관련된 사항으로 4조(四祖 :생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와 처부, 형제 등의 성명과 품계, 관직, 과거급제여부를 기록했다.
셋째, 시험에 관한 사항으로 과거의 종류와 설행시기, 시험관, 시험설행 이유 등이며 방목의 명칭은 문과급제자 명부를 문과방목, 무과급제자 명부를 무과방목, 잡과 합격자 명부를 잡과방목이라 부르고, 생원진사시 합격자 명부는 사마방목이라 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과거 응시자는 많아지고, 세도, 붕당 정치의 폐해로 과거제도는 인재등용이 아니라, 썩을 대로 썩은 입신출세의 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온 나라가 과거를 보기 위해, 양반이 되기 위해, 입신출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과거에 낙방한다거나, 과거를 볼 수 없다거나 하는 것은 조선조 지식인들에겐 사형선고 그 자체나 다름 아니었다. 다음의 기록이 간접적으로나마 그걸 말해준다.
조선시대 22대 임금인 정조 24년 3월 21일, 과거(科擧)시험 1차격인 초시에 몰린 인원은 11만1838명, 그리고 그 다음날 성균관 유생을 상대로 하는 인일제 시험에 또한 10만3579명이 몰렸다고 한다. 이틀 새 21만 명이 운집한 셈이다. 당시 한양성 안의 인구가 20만∼30만 명이었다고 하니 요즘으로 따져보면 서울 인구의 3분의 2가 몰린 것이다.
그렇게 높은 벼슬에 올라가는 것을 입신양명(立身揚名)의 기준으로 삼던 조선에서 인구 증가, 양반 위주의 신분 질서 붕괴 때문에 후기로 갈수록 시험장에 몰리는 사람 수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숙종 때 성균관에서 과거를 보던 응시자 중 6~7명이 짓밟혀 죽었다고 하는 게 이해가 되는 것이다.
과거장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먼저 과거를 볼 수 있는 응시자격을 살펴보겠다.
응시자격 조선시대 법제상으로는 천인이 아니면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평민인 양인(良人)의 응시 자격을 보장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응시할 수 없다고 규정한 법조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신분에 따르는 아무런 차별이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물론, 무장을 뽑는 무과나 기술관을 뽑는 잡과의 경우 천계의 혈통이 섞이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신을 뽑는 문과나 그 예비시험의 성격을 가진 생원·진사시만은 사족(士族), 즉 양반신분이 아니고는 응시하여 합격하기가 어려웠다. 양반신분이라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결격사유가 있는 자는 응시할 수 없었다.
첫째, 중죄인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사직을 위태롭게 한 모반죄, 종묘·능침·궁궐을 파괴한 대역죄, 국가를 배반하고 외국과 몰래 통한 모역죄, 부모나 남편을 죽인 강상죄(綱常罪), 인신위조죄(印信僞造罪) 등 중죄인의 자손은 영세금고(永世禁錮)하여 과거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다. 또, 증수뢰(贈受賂)를 하거나, 관물(官物)을 유용하거나, 남의 재물을 불법으로 탐낸 관리를 장리(贓吏)라 하여 처벌하고, 그 아들에게 과거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다.
둘째, 영불서용(永不敍用)의 죄를 지은 자도 응시 할 수 없었다. 범죄를 저질러 영영 관직에 임명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자, 즉 현직 관료로서 범죄인에 대한 재판을 일부러 질질 끄는 자와 고문하여 치사하게 한 자, 공물(貢物)을 대납(代納)하는 자, 산사(山寺)에 올라가 말썽을 부리는 유생 등에게는 문과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다.
셋째, 두 번 결혼한 재가녀(再嫁女)와 행방불명 된 실행부녀(失行婦女)의 자손도 응시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문과 응시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다음의 경우 응시에 제한을 받았다.
첫째, 원적(原籍)에 없는 자이다. 향시는 시관의 상피인을 제외하고는 타도인의 응시를 금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원적을 속이고 타도의 향시에 응시하는 자가 있게 되자, 1744년(영조 20) 원적에 없는 타도인이 향시에 응시하였을 경우 3식년 동안 응시자격을 박탈하였다.
둘째, 도목(都目)에 없는 자이다. 임진왜란 이후 쇠퇴해진 관학의 재건을 위하여 1651년(효종 2) 도목제를 실시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유생을 소학, 가례, 사서 중 1서를 고강케 하여 뽑은 다음 사학 또는 향교에 분속시켜 면역의 특전을 주는 한편, 청금록(靑衿錄)이나 유안(儒案)에 들어 있지 않은 자에게는 과거응시를 금하는 것이었다.
즉, 과거 때가 되면 서울은 4관원(四館員), 지방은 수령이 학교의 재적생 일람표인 도목을 작성하여 각 시소(試所)에 보냈는데, 시소에서는 도목에 실려 있는 자에 한하여 녹명을 허용하였다.
셋째, 유벌(儒罰)을 받은 자이다.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유생에 대하여 조정에서 과거응시를 제한하는 경우가 있었고, 또 성균관 유생들이 자치기구인 재회(齋會)를 열어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자에게 제적 등의 유벌을 주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유벌을 받은 자는 그것이 풀리기 전까지 과거응시에 제약을 받았다.
넷째, 기복(朞服) 이상의 상을 당한 자이다. 부모의 상을 당하거나, 승중손(承重孫)이 조부모의 상을 당한 자는 3년상(만 2년 3개월)이 끝날 때까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초시 합격자가 상을 당하였을 경우 거주지 수령의 공문을 받아 예조에 제출하면 다음의 복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었는데, 이를 진시(陳試)라 하였다.
다섯째, 현직관료와 종친(宗親)이다. 국초 소과는 참하관 이하, 대과는 당하관 이하에게 응시 자격을 주었으나, 1472년(성종 3) 이후부터 소과는 정5품 통덕랑(通德郎) 이하, 대과는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에게 응시 자격을 주었다. 그리고 종친에게도 국초 과거응시를 허용하였으나, 1471년부터는 금하였다.
이어서 고시절차를 알아보자.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는 알성시·정시·춘당대시 등을 제외한 과거시험의 수험생은 시험 전에 녹명소에 녹명을 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복시의 경우 녹명 전 조흘강이라 하여 4관원(四館員)이 소과는 소학과 가례, 대과는 경국대전과 가례를 임문고강하였다. 전자를 학례강, 후자를 전례강이라 하였는데, 이에 합격해야만 녹명할 수 있었다.
수험생들은 녹명소에 먼저 자신의 성명·본관·거주와 부·조·증조의 관직과 성명 및 외조의 관직·성명·본관을 기록한 4조단자(四祖單子)와 6품 이상의 조관(朝官)이 서압(署押:手決을 둠)한 일종의 신원보증서인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하여야 하였다.
시험 당일 새벽 수험생들이 모이면 입문관(入門官)이 녹명책을 보고 호명하여 입장시켰다. 이때 책을 가지고 들어가다 발각되면 1식년 또는 2식년 동안 과거응시의 자격이 박탈당하였다. 수험생의 입장이 끝나면 그들을 여섯 자 간격으로 떼어 앉히고 시험장을 폐쇄하였다. 그리고 시관들이 이른 새벽 의논하여 정한 시험 문제가 게시되면 수험생들의 답안 작성이 시작된다.
답안지 작성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을 지켜야 하였다.
첫째, 생원·진사시와 전시의 시권(試卷)은 반드시 해서로 쓸 것.
둘째, 노장(老莊)·불가(佛家)의 문자를 쓰거나 순자(荀子)·음양서·패설(稗說)을 인용하지 말 것.
셋째, 색목(色目:朋黨)을 언급하지 말 것.
넷째, 국휘(國諱:국왕이나 역대왕의 이름)를 범하지 말 것.
다섯째, 신기하고 기괴한 문자를 쓰지 말 것.
여섯째, 시험 문제를 옮겨 쓰고 초·중·종단(初中終段)의 허두(虛頭)에 ‘신복독(臣伏讀)’의 세 글자를 썼는데, 게시된 시험 문제와 자획이 다르거나 한 자라도 빠뜨리면 안 되었다.
시험 도중 예조좌랑이 시험지를 거두어 예조인(禮曹印)을 찍은 뒤 돌려주었는데, 혼란을 자아낸다는 이유로 1713년(숙종 39)부터는 시험지를 거둔 뒤 찍었으며, 그나마 영조 때는 회시 시험지만 찍도록 하였다.
답안지는 식년시·증광시·별시에서는 인정(人定:밤 9시)까지 제출하게 하고, 당일로 합격자 발표를 하는 알성시·정시·춘당대시의 경우 처음에는 2시간, 뒤에는 3시간 동안에 작성, 제출하도록 하였다.
수권소(修卷所)에서는 제출된 순서대로 답안지를 100장씩 묶어 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험지의 피봉과 제문(製文)을 분할하여 제문을 서리(書吏)에게 붉은 글씨로 베끼게 하였는데, 이를 역서(易書)라 하였다.
역서는 문과 중 식년시·증광시·별시에서만 하고, 친림과인 알성시·정시·춘당대시 및 생원·진사시에서는 하지 않았다. 역서가 끝나면 본초(本草:본시험지)와 주초(朱草:붉은 글씨로 베낀 답안지)를 대조하여 틀린 곳이 없나를 확인하고 주초만 시관에게 넘겨줬다.
시관은 주초를 가지고 채점하여 과(科:갑·을·병과)와 차(次:제1인·제2인·제3인)를 정한다. 합격된 시험지는 본초와 주초를 일일이 대조하였다. 합격자 명단은 국왕에게 보고한 뒤 발표하였다. 생원·진사시와 잡과는 합격이라 하였고, 문·무과는 급제 또는 출신(出身)이라 하였다.
합격자 발표인 방방(放榜)이 있고 궁중에서 방방의(放榜儀)·창방의(唱榜儀)라는 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어좌에 앉은 국왕으로부터 문과, 무과 급제자는 급제증서인 홍패와 어사화(御賜花:帽花), 개(蓋:日傘) 및 주과(酒果)를 하사받았다. 또, 은영연(恩榮宴)이라 하여 조정에서 축하연을 베풀어 주기도 하였다.
생원·진사시 합격자들도 예조에서 주는 백패를 받고 모화(帽花)와 주과를 하사받았다.
그 다음날 문과, 무과 급제자들은 모두 문과 장원의 집에 모여 그 인솔하에 예궐(詣闕)하여 국왕에게 사은례를 올렸고(생원·진사시 합격자는 생원시 장원 집에 모였다), 그 다음날 무과 장원의 집에 모여 그 인솔하에 문묘(文廟)에 가서 알성례(謁聖禮)를 행하였다(생원·진사시 합격자는 진사시 장원 집에 모였다). 또, 시관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을 열기도 하였다. 대과, 소과를 막론하고 일종의 시가행진인 급제자들의 유가(遊街)가 3∼5일간 허락되었다.
그리고 지방 출신의 신 급제자들을 위한 영친의(榮親儀)가 있어서 그들이 고향에 내려가는 날 그곳 수령과 향리들의 환영을 받고 유가하였다.
오늘 날 세계만방에 명성을 떨치고 돌아오는 예체능 인재나, 특정분야의 수재들이 귀국하면서 열렬한 환영을 받는 것처럼, 당시의 과거급제자들에게 영친의와 유가는 가문의 영광이요, 해당지역 사람들에게도 향토의 자랑인 금의환향이었다.
한편, 예문관에서는 신급제자의 합격 순위에 따라 성명·본관·거주 및 부친의 관직과 이름 등을 적은 문과·무과방목(龍虎榜目이라고도 함)을 만들어 중외에 반포하였다. 소과의 그것은 사마방목이라 하였다. 동방(同榜:합격동기생)은 동년(同年)이라 하여 형제와 같이 친하게 지냈다. 한편, 조선시대 5자등과(五子登科 :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집안)의 경우 그 부모가 살아 있으면 세미(歲米) 20석을 주고, 죽었으면 벼슬을 내려주는 것이 관례였다.
급제자는 등급에 따라 품계를 받았는데, 품계 없이 등과한 경우 갑과 제1인에게는 종6품, 제2, 3인에게는 정7품, 을과에게는 정8품, 병과에게는 정9품의 품계를 주었다.
그리고 갑과에게만 즉시 실직(實職)을 주고, 나머지는 문과의 경우 4관원(四館員)에, 무과의 경우 훈련원과 별시위(別侍衛)에 권지(權知)로 분속시켰다가 실직에 임용하였다. 품계를 가지고 등과한 경우, 갑과 제1인은 4계급, 제2, 3인은 3계급, 을과는 2계급, 병과는 1계급을 각각 승진시켜 주었다. 이러한 경우 승진 한계는 정3품 당하관까지였다.
<한국을 빚낼 인간들,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과거 급제는 따논 당상>
<이 뭣꼬?>
<혹시나가 역시나 호모 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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