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베트남 여행기

캄보디아 베트남 여행기 2

운당 2012. 10. 7. 18:25

 

2. 1975 캄보디아의 봄

 

<환한 얼굴에 온갖 만행을 숨긴 독재자 시아누크>

1975년 봄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는, 우리처럼 2차 대전 이후 반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해방된 여러 나라들 중의 하나였다.

1953, 프랑스에서 해방된 캄보디아의 정치적 공백을 노로돔 시아누크라는 사람이 채우게 된다. 그러나, 시아누크의 권력남용 부패, 억압 등 독재정치는 시민들의 불만이 되었고 결국 1970년 군인장교, ‘론 놀의 쿠데타 세력에게 정권을 내주었다.

오랜 식민지 생활, 해방은 됐으나 시아누크의 독재정치에 이골이 난 캄보디아 사람들은 공정하고 안정된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소망과 염원이 컸다. 따라서 독재자 시아누크나 역시 부당하게 권력을 움켜쥔 론 놀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론 놀은 민심 따위는 아랑곳없이 반공산주의를 내세워 전폭적인 미국의 지원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이런 미국의 꼭두각시 론 놀은 1975년 내전이 일어나자 권자에서 쫓겨났다.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신흥세력을 민중들은 해방자로 환영하였다.

하지만 어찌 꿈에도 알았으랴? 두루미를 왕으로 삼은 개구리들처럼 학살자를 해방자로 여겼으니 말이다.

1975년 봄,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 해방자 크메르 루즈가 찾아왔다.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프놈펜으로 들어온 정부가 민주 캄푸치아이다. ‘민주라는 말이 두려움 그 자체가 된 캄보디아 역사상 가장 비민주적이고, 상식과 이성이 상실된 야만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캄보디아의 박정희. 쿠테타로 권력을 장악한 론 놀> 

그렇다면 이런 어지러운 시기에 민주라는 슬로건으로 위장한 크메르 루즈는 어떤 자들인가.

이념적으로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살로스 사’, 혹은 폴 포트로 더 잘 알려진 자가 바로 크메르 루즈의 리더였다. 1928년 출생, 1949년 프랑스 유학, 그곳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접했다. 공산주의의 우월성에 신념에 빠진 그는, 시아누크의 왕권주의와, 론 놀의 부패한 민주주의를 소탕하고 싶었다.

하지만 1975년 론 놀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한 폴 포트는 소련이나 미국 같은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하지 않았다. 또한 민주주의의 이념인 헌법, 선거구조, 인권, 삼권분립 같은 요소에 대해서도 아예 관심이 없었다.

 

<캄보디아의 전두환. 학살자 폴 포트>

그렇다면 폴 포트가 추구하던 이상은 어떤 형태였을까? 1954년 캄보디아로 돌아와 캄보디아 농부들을 보면서 그는 농사로 자급자족하는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공산주의의 이념을 실천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회계층간의 구조적 불평등을 없애고, 세속적인 문명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순수한 공산주의며, 캄보디아인들이 살아야 될 생활방식이라 믿었다. 이런 극단적 농본주의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모여 크메르 루즈라는 단체로 진화 위장한 것이다.

 

 <와트마이 사원의 크메르 루즈 학살자 유골>

<킬링 필드. 희생자 유골로 만든 캄보디아 지도>

19754, 폴 포트가 지도하던 크메르 루즈가 프놈펜으로 왔다. 시민들은 부패했던 론 놀 정부를 몰아낸 크메르 루즈를 환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환영의 환호는 곧 비명과 절규로 바뀌었다.

크메르 루즈가 가장 처음 한 일은, 정부수립이나 헌법제정 같은 일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프놈펜에서 추방시키는 작업이었다. 대대적인 크메르 루즈의 문명숙청이 시작된 것이다. 군인, 학자, 의사 같은 지성인들, 시계를 찬 사람, 안경을 쓴 사람들도 지성인의 부류로 판정해 무참히 죽여 버렸다.

추방된 캄보디안 인들은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끔찍했다. 사람들은 쉬지 않고 일해야만 했다. 게으름은 곧 죽음이었다. 음식배급은 줄어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고 뱀, , 귀뚜라미, 지렁이 등 그 어떤 것이라도 먹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은 죽음에 방치되었고 부모들도 이성을 잃었다.

일제강점기의 서대문형무소와 같았을 당시의 캄보디아 수용소의 수칙을 보면 끔찍하다.

 

(1) 나의 질문에 무조건 대답한다. 무마하려 하지 마라.

(2) 사실관계를 숨기려 이런저런 변명을 하지마라. 내 말을 반박하려 하지마라.

(3) 멍청하게 굴지마라, 넌 어차피 크메르 혁명을 훼방하려했다.

(4) 넌 나의 질문에 생각할 시간을 가지지 말고 즉시 대답해야만 한다.

(5) 너의 도덕적인 부족함이나 혁명의 의미에 대해서 얘기하지 마라.

(6) 채찍을 맞거나, 전기충격을 당하는 동안 너는 절대 울어선 안 된다.

(7)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나의 명령을 기다려라. 아무런 명령이 없을 땐 조용히 있어라.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아무 소리 말고 바로 실행해야만 한다.

(8) 너의 비밀이나 반역행위를 감추기 위해 캄푸치아 족(Kampuchea Krom)에 대한 변명거리를 늘어놓지 마라.

(9) 만약 위에 있는 규칙들을 어긴다면, 너는 아주 많은 전기채찍에 맞게 될 것이다.

(10) 만약 나의 규칙을 한 가지라도 어긴다면, 너는 10번의 전기채찍형이나, 5번의 전기충격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 유신시대의 긴급조치와 같은 인권말살, 고문, 폭압 등 인권의 기본적 존엄성을 짓밟는 조항들로 가득한 수칙이었다.

 

<다까기 마사오였던 박정희> 

1979, 우연의 일치인가? 한국의 독재자 박정희가 총 맞아 죽던 해에 지옥과도 같던 폴 포트의 크메르루즈 정부도 종결되었다. 베트남이 침공을 해왔고 상대가 되지 못한 크메르 루즈 정부는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뒤를 이어 실권을 잡은 사람은 훈 센 이었다. 훈 센은 전 크메르 루즈 간부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도왔다. 일테면 배신자요, 매국노였던 것이다. 그렇게 베트남군의 침공을 성사시키는데 기여를 한 훈 센이 새로울 것 없이 새로운 캄보디아공화국의 권력을 쥔 것이다. 2012년 현재까지도 그는 캄보디아공화국의 총리다. 어쩜 이리도 한국과 비슷한 길을 걷는지, 앞서거니 뒤서거니다. 그래서 악질적 역사의 되풀이를 막아야할 책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516, 유신 긴급조치, 장준하 선생, 인혁당 등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고 하는 파렴치한 인간들을 우리는 반드시 심판해야 하는 것이다.

 

 

<왜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혈서를 쓴 박정희>

캄보디아의 깨어있는 민중들은 나치의 아유쉬비츠 대학살에 버금가는 크메르 루즈의 대학살을 응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여론에 대한 크메르 루즈의 간부 출신 훈센의 말을 들어보자.

만일 그들을 재판하게 된다면, 그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내전을 불러들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큰 구멍을 파서 과거를 묻고, 미래를 바라보며 나아가야할 것이다.”

참으로 뻔뻔하다. 과거를 묻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말은 상처받고 고통 받았던 수많은 캄보디아 사람들의 염원을 배신하는 망언이다.

바로 이 캄보디아의 훈센이 한국의 이승만이요, 박정희며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근혜 일당들이다. 그렇게 이승만을 비롯하여 이명박근혜까지 가해자 쪽인 친일파들이 지배층이 된 것이나, 일제강점, 미국종속, 그리고 516과 유신을 옹호하는 그들의 말과도 똑같다. 기가 막힌 현실이다.

 

 <29만원 전두환>

<크메르 루즈의 추종자였던 훈센이 지금도 캄보디아를 장악하고 있다>

그렇게 박정희를 좋아하는 넋 빠진 인간들이 우리나라에 있듯이 캄보디아도 멍청한 국민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도 학살자인 폴 포트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국민들이 있다고 한다. 총인구 7백만 명 중 2백만 명 이상이 학살당한 킬링필드(Killing Field)’ 같은 사건이 존재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오히려 만들어낸 허구성 이야기라며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광주 518 민중항쟁을 북한에서 내려온 인민군과 광주의 폭도, 빨갱이들이 저질렀다거나, 날조한 거라고 주장하는 지만원이 같은 미친 인간이 있으니 이것도 닮은꼴이다.

당시 2백여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2백여 곳의 집단 수용소로 끌려가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중 하나인 프놈펜에서 15Km 근교의 토울 슬랭(Toul Sleng) 감옥에서는 2만여 명 수용자 중 단 7명만 살아남았다 한다. 이곳 토울 슬랭은 뚜올 스베이 프레이라는 한 여자고등학교 건물로 1975년부터 1979년까지 크메르 비밀 요원들에게 접수되어 S-21 비밀감옥으로 이용된 곳이다. 수용자들은 이곳에서 약 2Km 떨어진 초웅 억(Choeung UK)’으로 끌려가 무참히 살해되었다. 지금도 이 토울 슬랭 감옥과 초웅 억에 가면 당시 살해된 캄보디아인들의 인골이 제대로 수거되지 않아, 방문객들이 주우면 회수함에 넣어달라는 안내문이 있다. 그 때의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

 

 <박정희 시대를 멸한 부마 항쟁>

  <그러나 전두환이 등장했고, 최근 육사 사열까지 받으니 이게 무슨 국격인가?>

앙코르 와트로 상징되는 크메르 제국은 중세시대의 영화와 위엄을 간직한 캄보디아인들의 자존심이다. 그 크메르 제국의 찬란했던 영광과 위대함은 소수의 매국노, 독재자, 학살자에 의해 전쟁과 살육으로 더럽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도 아직 친일파 매국노, 친미의 굴욕과 독재의 잔재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싸고 좋다고 놀러가는 수많은 여행객들이, 캄보디아의 1975년 봄의 만행과 절규를 진지하게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특히 한국인들은 더욱 자중 자애하였으면 싶다.

 

<518 광주 민중항쟁. 앞으로도 역사에 맡기자는 미친 소릴 듣고 살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