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그늘
從Book
“얘, 너 어디서 왔냐?”
“누구? 나?”
“그래, 너!”
“나를 모르다니? 날 보면서도 모르다니?”
“모르니까 묻는 거 아냐?”
“아휴! 답답해! 그래서 너 같은 답답한 자들을 세상에서는 ‘을’이라고 한단다.”
“을?”
“그래. 이 세상에는 갑과 을이 있지. 갑은 지배하는 자이고 을은 지배 받는 자거든. 쉽게 말해 나처럼 잘 생긴 꽃은 ‘갑꽃’이고, 너처럼 못 생긴 꽃은 ‘을꽃’이야.”
“갑꽃과 을꽃이라니! 우리 꽃에게 다 이름이 있지만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 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답답한데다 무식하기까지 하구나. 이 봐 을꽃! 이제부터라도 알고 있으렴. 이 갑꽃과 을꽃은 세상이 생길 때부터, 그리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변함없이 이어질 이름이니까.”
썰렁하고 흐린 하늘입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우중충한 날씨입니다. 거리에 사람들은 잔뜩 몸을 웅크리고 걷습니다. 웃기는커녕 찌푸린 얼굴들이 잿빛 구름처럼 흐릿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봄날처럼 환합니다. 왜냐하면 주변이 온통 꽃으로 뒤덮여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함박입니다.
‘경축!’ ‘축 준공!’
큰길가에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이 새로 들어섰습니다. 오늘은 그 새로 지은 건물 준공식 날입니다.
그 새로 지은 큰 건물로 들어오는 들머리가 온통 꽃으로 뒤덮였습니다. 울긋불긋 예쁜 꽃으로 만든 3단짜리 화환, 한 겨울인데도 활짝 꽃을 피운 화분 등이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너 ‘푸른기와꽃집’ 알아?”
“모르는데….”
“뭐? 푸른기와꽃집도 모른다고? 우하하하!”
그 산처럼 쌓인 화환과 화분들이 서로 얘기를 나눕니다.
모두들 자기 자랑을 합니다. 서로들 자기가 더 예쁘다고 뻐기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눈에 확 띠는 화분이 있습니다.
“우하하하! 푸른기와꽃집을 모르다니? 우하하하!”
그 눈에 확 띠는 화분이 큰 소리로 웃자, 모두들 고개를 돌려 쳐다봅니다.
“자, 모두들 입 다물고 날 봐.”
그 눈에 확 띠는 화분이 앞으로 나서더니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을 치며 말했습니다.
“난 ‘푸른기와꽃집’에서 왔어. 그리고 내 이름은 ‘무지개한복꽃’이야. 난 매일 아침 색깔이 다른 꽃을 피우지. 난 ‘푸른기와꽃집’의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이야. 알았냐? 그래서 난 꽃 중의 꽃 ‘갑꽃’ 중의 ‘갑꽃’이란 말이다.”
그 눈에 확 띠는 ‘갑꽃’이며 ‘무지개한복꽃’이라는 화분이 눈알을 희번득 부라리며 매서운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입에 침을 튀기며 말로 못을 박았습니다.
“이 답답하고 무식하고 천하기까지 한 ‘을꽃’들아! 알았냐?”
산처럼 쌓인 화환과 화분들은 그만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꽃잎이나 이파리를 뜯기고 허리가 두 동강 날 것 같아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라고?”
갑꽃이며 무지개한복꽃의 앙칼진 쇳소리가 다시 한 번 고막을 찢었습니다.
“예! 예예…. 가, 가가, 갑꽃이오.”
“또?”
“예! 예예! 무, 무무, 무지개한복꽃이오.”
“또?”
“예! 푸푸, 푸, 푸른기와꽃집이오.”
“좋았어. 진즉 그럴 것이지. 으흐흐!”
‘갑꽃’이고 ‘무지개한복꽃’이며 ‘푸른기와꽃집’ 꽃은 비로소 흐뭇한 얼굴로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너무 기뻤는지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방울뿐인 그 눈물이 코로 툭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눈물인지, 콧물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눈물은 다른 화환과 화분에게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제 목숨은 살았구나!’
겁에 질리고 공포에 떨던 화환이나 화분들은 비로소 움츠린 가슴을 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경축!’ ‘축 준공!’을 위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화환과 화분들은 ‘갑꽃’이고 ‘무지개한복꽃’인 ‘푸른기와꽃집’ 꽃의 엉덩이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두머리로 섬긴다는 충성맹세였습니다.
‘경축!’ ‘축 준공!’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야! 참 신기한 꽃이네. 꽃이 꼭 한복 입은 여자 모양이야.”
“날마다 꽃 색깔이 달라진다네.”
“푸른기와꽃집에서 만든 세계에서 하나 뿐이 꽃이라네.”
“오! 눈부시네. 형광등 백 개의 아우라에 눈멀어 다른 꽃은 보이질 않아.”
모두들 ‘갑꽃’이고 ‘무지개한복꽃’인 ‘푸른기와꽃집’ 꽃을 침 흘려 칭찬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경축!’ ‘축 준공!’을 축하하러 오는 사람들이 차츰 뜸해졌습니다.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이제 산처럼 쌓여있던 화환과 화분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져가기도 하고, 나머지 화환이나 화분은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노인 몇 사람이 큰길가에 어마어마하게 크게 지은 건물 쪽으로 갑니다.
“어야! 정말 꽃을 주워 가도 된 당가? 도둑으로 잡혀가면 어쩌지? 우리들은 특별사면, 가석방이 없을 텐데….”
“그래도 죄 짓고 감옥가면 밥은 먹지만, 돈 없음 산 입에 거미줄 쳐.”
“어허! 걱정도 팔자네. 내가 어저께도 가져왔다니까. 그러니 헌법개판소 걱정 말고 빨리 가세.”
마침내 노인들이 큰 건물 뒤쪽으로 갑니다. 그곳에 화환과 화분들이 쓰레기가 되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정말이네. 이제 화레기네. 화환화분쓰레기!”
“박음 된 화분이나 찾아봐. 금이나 은박 화분이 일단 비싼 화분이어.”
“윤기가 잘잘 흐르고 미끈함 더 좋아.”
“근데 며칠 만에 다 화레기가 되다니, 암튼 갑들은 대단해!”
“회충 같은 놈들이기도 하지. 갑들이 자기 돈으로 샀겠는가? 다 을들 돈을 빨아서 펑펑 쓴 거겠지.”
“혜택이 왜 없겠는가? 낙분 효과가 있어. 예전에 똥도 거름으로 안 썼는가?”
“낙분? 떨어지는 똥도 똥 나름이지. 독한 갑들 똥은 봉지째 먹은 마카다미아넛똥, 즉 봉지안깐땅콩똥이여! 안 썩어. 거름으로 쓰들 못해.”
노인들은 주거니 받거니, 화환과 화분이 쓰레기처럼 쌓인 곳을 뒤졌습니다. 재수 좋거나 운수 있으면 ‘갑꽃’을 품에 안을지도 모른다며 열심히 화레기를 뒤졌습니다.
<25일 밤 서울 명동 거리에서 청년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ㅈㅂㅇㄱㅎㅎ 나라꼴이 엉망이다’라는 글귀를 쓰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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