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그늘

운당 2014. 12. 26. 12:21

<이야기>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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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어디서 왔냐?”

누구? ?”

그래, !”

나를 모르다니? 날 보면서도 모르다니?”

모르니까 묻는 거 아냐?”

아휴! 답답해! 그래서 너 같은 답답한 자들을 세상에서는 이라고 한단다.”

?”

그래. 이 세상에는 갑과 을이 있지. 갑은 지배하는 자이고 을은 지배 받는 자거든. 쉽게 말해 나처럼 잘 생긴 꽃은 갑꽃이고, 너처럼 못 생긴 꽃은 을꽃이야.”

갑꽃과 을꽃이라니! 우리 꽃에게 다 이름이 있지만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 봐.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답답한데다 무식하기까지 하구나. 이 봐 을꽃! 이제부터라도 알고 있으렴. 이 갑꽃과 을꽃은 세상이 생길 때부터, 그리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변함없이 이어질 이름이니까.”

썰렁하고 흐린 하늘입니다.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우중충한 날씨입니다. 거리에 사람들은 잔뜩 몸을 웅크리고 걷습니다. 웃기는커녕 찌푸린 얼굴들이 잿빛 구름처럼 흐릿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봄날처럼 환합니다. 왜냐하면 주변이 온통 꽃으로 뒤덮여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함박입니다.

경축!’ ‘축 준공!’

큰길가에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이 새로 들어섰습니다. 오늘은 그 새로 지은 건물 준공식 날입니다.

그 새로 지은 큰 건물로 들어오는 들머리가 온통 꽃으로 뒤덮였습니다. 울긋불긋 예쁜 꽃으로 만든 3단짜리 화환, 한 겨울인데도 활짝 꽃을 피운 화분 등이 산처럼 쌓여있습니다.

푸른기와꽃집알아?”

모르는데.”

? 푸른기와꽃집도 모른다고? 우하하하!”

그 산처럼 쌓인 화환과 화분들이 서로 얘기를 나눕니다.

모두들 자기 자랑을 합니다. 서로들 자기가 더 예쁘다고 뻐기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눈에 확 띠는 화분이 있습니다.

우하하하! 푸른기와꽃집을 모르다니? 우하하하!”

그 눈에 확 띠는 화분이 큰 소리로 웃자, 모두들 고개를 돌려 쳐다봅니다.

, 모두들 입 다물고 날 봐.”

그 눈에 확 띠는 화분이 앞으로 나서더니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을 치며 말했습니다.

푸른기와꽃집에서 왔어. 그리고 내 이름은 무지개한복꽃이야. 난 매일 아침 색깔이 다른 꽃을 피우지. 푸른기와꽃집의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꽃이야. 알았냐? 그래서 난 꽃 중의 꽃 갑꽃중의 갑꽃이란 말이다.”

그 눈에 확 띠는 갑꽃이며 무지개한복꽃이라는 화분이 눈알을 희번득 부라리며 매서운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입에 침을 튀기며 말로 못을 박았습니다.

이 답답하고 무식하고 천하기까지 한 을꽃들아! 알았냐?”

산처럼 쌓인 화환과 화분들은 그만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꽃잎이나 이파리를 뜯기고 허리가 두 동강 날 것 같아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라고?”

갑꽃이며 무지개한복꽃의 앙칼진 쇳소리가 다시 한 번 고막을 찢었습니다.

! 예예. , 가가, 갑꽃이오.”

?”

! 예예! , 무무, 무지개한복꽃이오.”

?”

! 푸푸, , 푸른기와꽃집이오.”

좋았어. 진즉 그럴 것이지. 으흐흐!”

갑꽃이고 무지개한복꽃이며 푸른기와꽃집꽃은 비로소 흐뭇한 얼굴로 미소를 머금었습니다.

너무 기뻤는지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방울뿐인 그 눈물이 코로 툭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눈물인지, 콧물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눈물은 다른 화환과 화분에게 큰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제 목숨은 살았구나!’

겁에 질리고 공포에 떨던 화환이나 화분들은 비로소 움츠린 가슴을 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경축!’ ‘축 준공!’을 위해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화환과 화분들은 갑꽃이고 무지개한복꽃푸른기와꽃집꽃의 엉덩이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두머리로 섬긴다는 충성맹세였습니다.

경축!’ ‘축 준공!’을 축하하러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참 신기한 꽃이네. 꽃이 꼭 한복 입은 여자 모양이야.”

날마다 꽃 색깔이 달라진다네.”

푸른기와꽃집에서 만든 세계에서 하나 뿐이 꽃이라네.”

! 눈부시네. 형광등 백 개의 아우라에 눈멀어 다른 꽃은 보이질 않아.”

모두들 갑꽃이고 무지개한복꽃푸른기와꽃집꽃을 침 흘려 칭찬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경축!’ ‘축 준공!’을 축하하러 오는 사람들이 차츰 뜸해졌습니다.

또 며칠이 지났습니다.

이제 산처럼 쌓여있던 화환과 화분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가져가기도 하고, 나머지 화환이나 화분은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노인 몇 사람이 큰길가에 어마어마하게 크게 지은 건물 쪽으로 갑니다.

어야! 정말 꽃을 주워 가도 된 당가? 도둑으로 잡혀가면 어쩌지? 우리들은 특별사면, 가석방이 없을 텐데.”

그래도 죄 짓고 감옥가면 밥은 먹지만, 돈 없음 산 입에 거미줄 쳐.”

어허! 걱정도 팔자네. 내가 어저께도 가져왔다니까. 그러니 헌법개판소 걱정 말고 빨리 가세.”

마침내 노인들이 큰 건물 뒤쪽으로 갑니다. 그곳에 화환과 화분들이 쓰레기가 되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말이네. 이제 화레기네. 화환화분쓰레기!”

음 된 화분이나 찾아봐. 금이나 은박 화분이 일단 비싼 화분이어.”

기가 잘잘 흐르고 미끈함 더 좋아.”

데 며칠 만에 다 화레기가 되다니, 암튼 갑들은 대단해!”

충 같은 놈들이기도 하지. 갑들이 자기 돈으로 샀겠는가? 다 을들 돈을 빨아서 펑펑 쓴 거겠지.”

택이 왜 없겠는가? 낙분 효과가 있어. 예전에 똥도 거름으로 안 썼는가?”

낙분? 떨어지는 똥도 똥 나름이지. 독한 갑들 똥은 봉지째 먹은 마카다미아넛똥, 즉 봉지안깐땅콩똥이여! 안 썩어. 거름으로 쓰들 못해.”

노인들은 주거니 받거니, 화환과 화분이 쓰레기처럼 쌓인 곳을 뒤졌습니다. 재수 좋거나 운수 있으면 갑꽃을 품에 안을지도 모른다며 열심히 화레기를 뒤졌습니다.

 

<25일 밤 서울 명동 거리에서 청년들이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ㅈㅂㅇㄱㅎㅎ 나라꼴이 엉망이다라는 글귀를 쓰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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