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슬픈 기억 이승만, 그리고 역사 교과서

운당 2015. 9. 13. 06:20

슬픈 기억 이승만, 그리고 역사 교과서

<세월이 흘러 다 지나가겠지?>


2015911일에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집필기준 연구에 참여한 교수들이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에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한다.

구체적으로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기사만 보고는 판단키 어려우나 아무튼 국정화는 반대라니 참으로 다행스럽다.

 

하지만 이승만을 국부로 못 만들어서 사생아인 이쥐놈닭그년과 딴따라 나발수며 집사인 긴무식, 또 칼 든 망나니역, 후여! 우여! 새도 못 쫓는 꼭두각시 황당우려는 어떻게든 밀어붙일 것이다.

 

집에서 기르는 개 이름을 빽(빽이 있어야 산다는 뜻으로 박정희를 지칭), 두환, 태우, 명박 등으로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개를 부를 땐 작대기로 후려치거나 발길질을 했다. 그러니 개가 지 이름만 부르면 납작 엎드려 공포에 떨었다. 참으로 견권침해, 동물학대지만,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도 서슴없이 고문과 암살 등을 저질렀던 암흑과 절망의 시대 아닌가? 그래서 다까기마사오 박정희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했을까?

 

이승만 정권시절, 필자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다닐 때인데, 4학년으로 기억한다.

이승만 전기가 학교에 배부되었다. 담임선생님께서 의무적으로 사야한다고 해서 달랑달랑 들고 갔더니, 선친이 자서전도 아니고 산사람 전기라니, 곧 죽을 때가 됐나보다하시며 책값을 주셨다.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인 19604.19 혁명으로 학원이 신세, 5년 뒤 하와이에서 졸했다.

그 때 두 형제 이름이 타승(打承), 타만(打晩)이가 있었다.

타도하자 이승만(李承晩)! 타승(打承), 타만(打晩)’

! 그런 뜻이었구나.’

지금에야 깨달았다.

 

우리들은 이승만 부인을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코쟁이 나라(미국)에서 와서 코주댁이 호주댁이 됐다.’

아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와서 호주댁이야.’

아이들이 서로 아는 척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다 틀린 말이다. 오래 뒤에 호주댁 프란체스카가 오스트리아댁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 아이들이 전봇대 애자 깨뜨리기, 지나가는 차나 기차에 돌을 던졌다. 솟 먹어라며 왼쪽 손바닥 위로 주먹 쥔 오른 쪽 팔뚝을 연신 쭉쭉 내 뻗는 욕을 했다. 그런 아이들이 한 둘 있었는데, 일종의 놀이였던 셈이다.

조국(실은 이승만)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발정 난 암캐처럼 달랑 붙은 모윤숙때문에, 본의 아니게 수캐가 된 존 리드 하지는 해방한국의 실권을 거머쥔 미군정 사령관이었다. 그가 기차로 부산에서 서울로 갈 때 철로가 아이들에게 그 솟 먹어라인사를 많이 받았다 한다.

통역관이 저게 반갑다는 조선 인사다며 얼렁뚱땅 둘러 붙였다. 마침내 이승만 관저 경무대에 도착한 하지가 갑자기 주먹을 연신 뻗으며 이승만에게 을 먹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이승만도 답례로 을 먹였다 한다.

그 얘길 듣고 우리 꼬맹이들도 솟 먹어라를 신이 나서 주고받으며 낄낄댔다. 밥상 앞이나 웃어른 앞에선 두 무릎 단정히 꿇고 살던 시대에 있었던 참 상반, 모순이 겹치는 추억이다.

이것 먹어라.’

너도 먹어라.’

이승만과 하지! 그 옆에 모윤숙은 있었을까? 있었다면 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상상해보면 쓴 웃음 대신 에라이! 솟 먹어라가 절로다.

 

그 때 이승만이 읽는 신문과 백성이 읽는 신문이 다르다고 했다.

신문에 물건 값이 실리는데, 이승만이 읽는 신문의 쌀값은 시중 쌀값보다 훨씬 쌌다했다.

가카! 아니 빡사님! 선정 덕분에 백성들은 가카 만세, 빡사만세, ~평만만세를 부릅니다.’

그 아첨을 떨던 장관들이 이승만이 또 방귀를 뀌면 시원하시겠습니다하며 허리를 90도로 연신 굽혔다 한다.

요즘도 만기친람 닭그년 장관들은 회의 때 고개 푹 숙이고 받아 적느라 바쁘다 한다.

가카! 분부만 내리시오소서. 국정화고 솟이고 개법원, 헌법개판소, 걱정원, 로또호텔이 다 해결하니 오직 즐기시옵소서. 7시간도 조코, 70시간도 좃소이다.’

그런데 닭그년이 방귀를 뀌면 뭐라 할까? ‘척보면 앱니다라 했겄다. ‘시원하시지요? 으으흠! 향기로워!’ 이승만 때와 한 치도 틀리 지 않을 성 싶다.

그리하여 금년이 이승만 사후 50년이니, 50년 세월이 흐른 뒤 똑 같은 얘기가 인구에 회자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으리라.

 

1959,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니, 적으면 10살 많으면 12살이다. 그 꼬맹이들 입에서 건너다닌 말이지만, 어른들께 들은 얘기니, 민심은 천심이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역사교과서 논쟁 덕에 참으로 오랜만에 어릴 적 추억에 젖으며 그때는 동무라고 불렀던 깨복쟁이들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오호, 통제라, 애제라! 위 말들에 대한 사실 확인이나, 객관적 자료, 과학적 증거는 없다.

봐라. 이러니 역사교과서가 국정화 되어야 해.”

닭그년과 그 조무래기들인 긴무식, 황당우려는 봐라. 역사 교육 잘못하면 나라가 망한다며 북, 장고에 얼시구나 깨춤을 출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년놈들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건, 반신반인화 하건 괘념치 않는다.

난 내 후손들에게 만물이 상존하는 중용의 역사를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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