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을 맞이하여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설치가금류족, 혓바닥무성족에게 고함!
쥐와 닭, 혓바닥무성족과 그 떨거지들 외에는 되도록 욕을 삼가려했는데,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보면서 참으로 참담한 심정으로 욕이 울대를 꾸역꾸역 기어 나온다.
그러면서 문득 김창룡이 다까기 마사오(박정희)를 여순반란 수괴일 때 처형했으면 반신반인족도, 귀태족도, 쥐닭 설치가금류족도, 어쩌면 혓바닥무성족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 백번 공감이 간다.
또 그 구미(九尾)에 선산(先山)을 둔 매국노(賣國奴)종족들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죽기 살기로 하려고 하는 이유도 또렷하게 인식이 된다.
하늘도 무심치, 그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 미한민국, 헬조선을 만들다니!
그래서 오늘은 역사 속에 잊혀지고 싶어 할 얘기 하나를 꺼내든다.
1975년이니까 교육감을 관선으로 뽑을 때다. 관선이 뭔가? 손바닥 지문이 닳도록 아부, 아첨이 일번 조건 아닌가?
아무튼 제 5대 전남도육감에 노모씨가 낙점이 되었다.
그 노모씨가 지역 초도순시차 나주교육청에 들렸을 때다.
남루한 차림의 노인들이 절뚝이는 몸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 나주 교육청 정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마침내 노모씨를 태운 차가 도착했고, 내렸을 때다.
“이보게! 노교육감! 우린 광주학생독립운동 때 자네 애비에게 고문을 당해 반병신이 되어 평생을 산 사람들일세. 그러니 교육감 잘해야 하네.”
그 말을 들은 노모씨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요즈음 지 애비가 독립지사나 되는 듯 큰 소리 치는 매국노 자식놈처럼 ‘우리 아비도 남몰래 조선 예술가들을 도와준 우국지사였다. 왜놈들의 족보정책도 위반해서 일번으로 잡아 죽이려 했던 사람이 우리 아비다.’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악명 높은 노경부’로 알려졌던 노주봉(盧周鳳), 본명 노주현(盧周鉉), 일본이름(豊川守弘)은 자신의 문중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각별하여 일제강점기에 족보 편찬이 금지되었음에도 ‘풍천 노씨’ 족보를 편찬, 문중의 촉망과 덕망 있는 인물로 존경받았다 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축적한 부를 호남지역의 남종화에 탁월한 동양화가들(의제 허백련도 그 중 한 명이다)에게 아낌없이 후원하며 풍류객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모씨의 아비인 노주봉이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학생들을 고문했던 사연은 이렇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주봉은 1920년대 중반 전남 보안과 순사부장으로 출발하여 경부보, 경부, 해방 직전에는 경시(도경찰부 과장, 지역경찰서 서장)로 승진했는데 해방 직후 암살되었다.
1945년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말(음력 9월 9일, 노주봉의 기일은 9월 10일)이다. 반쯤 찬 달이 떠 있을 때 광주 구 시청 앞에서 탕탕탕! 세발의 총소리가 새벽 공기를 쨍하고 갈랐다. 일제의 최고 앞잡이였던 총독부 경찰로 전남 지역에서 조선인으로는 최고의 지위인 경시(警視)까지 올랐던 노주봉이 그 중 두발의 총에 맞은 것이다.
광주농고 교사였던 아들은 세수를 하던 중이었다. 그 때 총소리와 함께 ‘민족 반역자! 노경부를 처단했다!’는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아버지!”
타고 있던 말에서 떨어져 피를 흘리고 쓰러진 노주봉에게 아들이 다가갈 때다.
“이놈! 너도 죽어!”
누군가가 그리 말하자, 아들은 아버지를 내팽개치고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그 아들이 후일 노모교육감이다.
노주봉에게 수사와 취조를 당했던 증언자들에 의하면 노주봉은 특히 학생들에게 원인 모를 적개심을 품고 가장 잔인하게 다루었던 경찰이었다 한다.
해방 후 미군정청 경찰위원이었던 노주봉, 김의택(金義澤), 김정택(金正澤), 홍용구(洪鎔球), 조희인(曺熙仁)들 중 노주봉은 특히 학생들을 고문, 취조하는 방법이 가장 악랄하였고 사건을 억지로 엮어 만드는 수완이 남달리 뛰어났던 것이다.
일제 경찰의 상습적인 고문 방법은 무차별 구타, 철봉을 팔이나 다리에 끼워 주리 틀기,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허리나 손톱 등을 마구 지지기, 두 손과 두 발을 묶은 채 코와 입을 젖은 솜으로 틀어막고 그 솜 위에 큰 주전자로 고춧가루 물 퍼붓기, 심지어는 자정 무렵에 경양방죽(광주 구 시청 자리에 있던 방죽)으로 끌고 가 팔다리에 수갑을 채우고 무거운 추를 달아매 처박기, 물고문 뒤 담뱃불로 지지고 잠 못 자게 하기 등 악랄, 잔인 그 자체였다.
그리고 노주봉은 광주학생운동 당시 고문기술자로서 취조와 심문의 실무를 맡아 고문을 즐겼던 것이다.
물론 일제를 이어받은 516쿠데타군사독재, 유신독재 때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문방법은 한층 더 발전하여 성고문이 추가되었던 것을 우린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노주봉은 고문을 즐겼던 사이코패스형 인간말종이었다.
자신이 갖가지 방법의 혹독한 고문으로 반불구의 몸을 만들어놓은 학생이 석방될 때다. 노주봉은 친절한 얼굴로 다가가 등을 토닥이는가 하면 억지로 술까지 마시게 하면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는 것’이라며 니글니글 웃었다 한다. 그 웃음은 바로 공포였던 것이다.
해방 후 노주봉의 자식들은 대부분 출세가도를 달렸다. 특히 노주봉의 장남 노모씨는 전남 주민들의 비난 속에서도 자신의 아버지가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학생들의 학교 교장을 지냈고 교육감에 이르렀다.
그것은 유신독재 당시 다까기 마사오에게 ‘둔마를 채찍질하여 주시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고 했던 유기춘 문교부 장관의 힘이었으니 김창룡이 다까기마사오를 죽이지 않은 책임처럼 둔마장관의 책임도 크다고 할 것이다.
분단된 현실을 핑계 삼아 독재, 친일매국노 떨거지들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면 무조건 빨갱이, 종북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며 지금까지 부와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터라 무슨 말이 또 필요하랴?
다만 노모씨의 경우는 현 설치가금류족과 그 똥구멍을 핥는 혓바닥무성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행하다고 할까? 억울하다고 할까?
기억컨대 노모씨는 부친의 죄과를 갚으려했는지, 아님 죄과를 덮으려했는지 당시 유난히도 충효교육을 강조 했었다.
그렇게 기억하기 싫은 지난 역사를 되새겨보니, 독재친일매국노 떨거지족들이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려는 의도가 더욱 더 명백해진다.
덧없이 지난 일을 되새기다 보니 가을밤도 깊어간다.
이제 날이 새면 선열들이 피 흘린 학생독립운동 성스러운 기념일이다. 그러니 설치가금류족, 혓바닥무성족들에게 한 마디만 더 욕하고 심란한 글 마치련다.
이 년놈들아! 네 년놈들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역사는 지우지도 덮지도 못하는 거다. 이 추잡한 귀태추종자들아!
(2015년 11월 2일 월요일 밤)
<일제, 독재, 친일매국은 똑같은 이름이다>
<독재, 친일매국노 후손들이 웃으면 의병후손들과 민초들은 통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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