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50
고부(古阜) 청청(靑靑) 양유색(楊柳色)은 광양(光陽) 춘색(春色)이 팔도에 왔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라지만, 실은 산천도 인걸도 다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허나 진시황 정(政)이나 징기스칸 테무진이 온데간데없는 건 괜찮지만, 막개발, 난개발로 사라지고 사라져가는 산천은 참으로 큰 문제다.
포항인가 청도에서 새벽종(鐘)을 치기 무섭게 파헤치기 시작한 산천은 시바스 리갈의 궁정동 저녁총(銃)이 울리고도 끊임없이 이어져 칠 사기는 다친(747) 희대의 협작꾼 이명박이 4대강으로 화룡정점을 찍었다.
2013년 9월 24일자(한국일보) ‘4대강 사업, 혈세 줄줄 샌 건설사들 물놀이’ 보도에 의하면 ‘현대건설, 대우건설, 삼성물산, 대림산업, GS건설, SK건설, 포스코건설, 현대산업개발, 삼성중공업, 금호산업, 쌍용건설 등 11개 건설업체의 전현직 임원 22명이 범죄 혐의로 기소되고 이 중 6명은 구속, 김중겸 전 현대건설 사장과 서종욱 전 대우건설 사장도 재판에 넘겨졌다고 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막개발, 난개발, 사기협작, 눈 감고 아웅, 땅 놓고 돈 따먹기 개발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거라는데 있다.
그래서 ‘세상사 쓸 거 없다. 산천도 인걸도 다 허망하게 간다네.’가 맞는 말이 아닐까 여겨진다.
고부(古阜) 청청(靑靑) 양유색(楊柳色)은 광양(光陽) 춘색(春色)이 팔도에 왔네.
노랫말을 풀어본다.
‘옛 동산(古阜)에 홀로 앉아 버들피리 분다. 연푸른 버들가지(楊柳色) 햇살에 빛나고(光陽), 푸르른 봄기운(春色) 온 세상(八道)을 덮는다.’
환하고 밝은 봄날의 노래가 마치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처럼 어쩐지 외롭고 쓸쓸하다. 이명박근혜로 이어지는 세상이 하 수상하여 그러려니 하면서, 그렇게 호남가 한 자락 흥얼거리며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을 찾는다.
옛 동산이란 말은 오랜 역사를 지닌 고을이란 뜻일 게다. 지형 상으로 보면 고부는 동서남북 사통팔달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과 물산이 모였다 흩어지는 그런 풍성한 고을이었을 것이다.
그런 고부 군수 자리니, 누구든 욕심을 낼만도 하다. 다만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를 그런 자리에 앉혔으니, 윗물이 썩을 대로 썩었던 시대의 증표다. 그러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1894년 2월15일(음력 1월10일)이다.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탐관오리 계보의 대선배 조병갑의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농민들이 떨쳐 일어섰다.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 농민군의 흰옷과 죽창이 너른 들을 덮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중심으로 사발통문을 돌리고 말목장터에 모여 대오를 갖춰 고부 관아로 물밀 듯 밀려갔던 것이다.
바로 동학농민혁명이 그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 된 것은 만석보다. 1893년 5월에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오자마자 온갖 못된 짓거리, 한마디로 말해서 떨 것은 다 떨었다. 가렴주구는 기본이고 남의 선산의 수백 년 묵은 소나무를 베어다 정읍천과 동진천이 만나는 곳에 보를 쌓았다.
원래 정읍천 아래에는 농민들이 쌓은 보가 있었다. 아무리 가물어도 이 보가 있어 배들평야는 항시 풍년이었다.
그런데 그 멀쩡한 보를 두고 또 보를 쌓아 과도한 수세를 거둬들였던 것이다.
어쩜 역사가 이리도 되풀이 되는지 모르겠다.
멀쩡한 역사책이 있음에도 뉴라이트 떨거지들을 시켜, 교학사판 친일 독재 미화 역사책을 만들었다. 민초들이 그걸 비판하자, 우리가 교학사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냐? 공권력을 투입하여 보호하자고 두 눈 부라리고 나선다. 방귀 뀐 놈이 성질낸다는 말이 바로 이 경우다.
저도의 추억 간보기 교학사판 친일 독재미화 교과서가 바로 조병갑의 만석보고, 그걸 지킨다고 입에 게거품을 무는 김무성 같은 무리들이 또 조병갑 1, 2, 3, 4…. 아니겠는가?
죽창에 쫓겨 꼬랑지를 가랑이 속으로 집어넣은 변견꼴이 되어야 속을 차리겠지만 우리 민초들이 무슨 힘이 있는가?
그러니 차라리 벽에다 똥 바르며 천년이고 만년이고 고고손자, 고고고손자랑 감투싸움, 돈싸움 하며 오래오래 살라고 빌 뿐이다. 하긴 그때나 지금이나 노략질하기 좋은 자리를 꿰차려고 눈알 흰자를 희번득거리는 종자들이 오래오래 잘사는 법이니 구태여 빌어주지 않아도 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나그네는 정읍천과 동진천이 만나는 만석보가 있던 배들평야를 찾았다. 배가 드나들어서 배들평야라고 했을 거다. 그 배들평야에 물을 대주던 만석보는 흔적도 없고 벼가 익어가는 너른 들녘을 만석보 기념비가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어 동학농민혁명의 고향 이평면 소재지로 갔다. 왜 배 선(船) 대신 배 이(梨)자로 이평면(梨坪面)이라 했을까? 그 이유가 1909년 일제의 토지조사국(1910년 한일강제병합 뒤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이 토지수탈을 시작할 때 순우리말 지명 배들을 왜식으로 바꾼 농간이 아닐까? 문득 그런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전봉준면으로 개칭했으면 어떨까? 생각하며 말목장터에서 전봉준 장군과 농민들의 함성을 들었다.
그리고 그 함성과 함께 곧장 조병갑이가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던 고부관아로 갔다.
그런데 너무도 허망했다.
관아터는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있고, 어차피 들리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바로 옆 향교의 문은 꽁꽁 닫혀있었다.
역시 산천도 인걸도 다 간 데가 없었다.
이곳이 동학농민함성이 처음 울려 퍼지고, 농민군이 관아를 점령 조병갑이를 쫒아낸 곳이란 말인가?
허전한 마음 달래느라 이리저리 헤매는데 면사무소 앞에 작은 정자가 눈에 뜨였다. 군자정이라 한다. 여기도 녹조다. 연꽃은 시들어 싯누런 녹조 틈새로 잎만 남기고 쓰잘데기 없는 공덕비만 즐비하다.
그런데 공덕비를 보니 어떤 놈은 반 토막, 또 어떤 놈은 삐딱하니 넘어지기 일보직전이다.
저 돌비들도 세월의 무상함을 온 몸으로 보여주며 곧 산천도 인걸도 간데없는 행렬에 참여하리라. 그렇게 산천도 인걸도 의구하지 않으니 옛 동산에 홀로 앉아 버들피리를 불 수 밖에 없다.
나그네는 피 끓는 역사의 현장에서도 들을 수 없는 함성 소리를 쓸쓸하게 가슴에 간직하고 고부를 떠나 광양으로 간다.
<고부 관아 건물인가 했더니 아니다.>
<고부 향교라고 한다>
<바로 옆 초등학교가 관아터라고 한다, 없애버려야 정신도 없애는 법이라서>
<면사무소 가는 길 옆 군자정>
<돌비 군자(?)들이 가을을 지키고 있었다.>
<동학수괴 전봉준, 이말 뉴 라이토들이 좋아하겠다. 다리가 부러져 호송 되는 녹두장군>
<산천도 인걸도 다 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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