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48
농사(農事)하는 옥구백성(沃溝百姓) 임피사의(臨陂蓑依) 둘러 입고
정읍(井邑)의 정전법(井田法)은 납세인심(納稅人心) 순창(淳昌)이라.
1941년 3월 31일 일제에 의해 조선의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는 국민학교로 변경되었다. 이는 ‘충량한 일본국의 신민(臣民), 곧 국민(國民)’을 만들고자 했던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초등교육정책이고 제도였다.
그리고 일제가 조선인을 정신부터 몸까지 충성스런 황국신민으로 만들고자 했던 이 명칭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된 뒤에도 행정편의 등의 사유로 반세기를 이 땅에서 더 존재하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995년에 이르러서야 명칭 개명 논의가 있었고, 1996년 3월 1일 마침내 초등학교가 되었다.
나그네의 선친은 일제강점기 왜국 유학을 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 학도병 징집을 도피할 때 얻은 지병으로 평생을 고생하시다 조천하셨다.
나그네 역시 일제의 유물인 국민학교에 다니며 일제의 잔재인 황국신민의 속옷과 출처도 불분명한 자유민주 겉옷을 짜깁기한 교육을 받았다. 그래도 그 국민학교 시절 놀이가 주로 칼싸움이었는데, 독립군이 왜군을 소탕하는 그런 줄거리였다.
그 국민학교 시절 선친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얘기다.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1875~1953)가 조선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조선은 결국 그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어디 아베뿐이었을까? 당시 조선은 반도요, 본국인 왜섬을 내지라고 생각했던 왜인들은 곧 다시 반도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대로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소장 박정희, 중령 김종필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의 말은 적중한 것이다.
왜왕께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군을 소탕했던 앞잡이로 창씨 왜명 다까끼 마사오, 완전 왜식인 오까모도 미노루로 다시 세탁한 박정희가 총칼로 정권을 잡고 한일협정을 맺었으니, 16년만에 아베 노부유키가 돌아온 셈이다.
그리고 그 뒤로, 전두환, 노태우를 거쳐 또 확실한 아베 노부유키의 망령 쓰키야마 아끼히로라는 월산명박이, 귀태 오까모도 미노루의 소(小) 귀태 박근혜가 애비가 만든 중앙정보부의 후신 국정원의 공작과 댓글로 공작댓통령이 되어 교학사 교과서를 들고 나서니, 옛 조선의 영광을 찾으려면 100년이 아니라 1000년이 되어도 ‘아니올시다.’ 이다.
백제의 유민이 왜섬으로 가면서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던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아베 노부유키의 망령이 16년 만에 쿠데타로 돌아온 것이나 다 역사의 회전을 일컬음이다.
피는 피를 부르고, 칼은 칼로 망한다 했다. 그 아베 노부유키 류(流)의 망령들이 서로 주고받는 자업자득, 죄 갚음 놀이에 우리 민초들이 방패막이로 당하고 헛고생하는 것이다.
미국놈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야 한다는 똥별들, 식민지 시대에 일제가 국토건설을 해줬다는 뉴라이트 똘애들, 흉노요, 홍어라 손가락질 하는 2개도 부족해 4개로 쪼개진 지역감정만 보면 이 나라는 분명 미나 일의 식민지요, 아베 노부유키의 망령과 그의 하수인들이 설치는 땅이다.
식민이 무엇인가? 자기 스스로는 아무 것도 못하고 의지하고 지배받으며 하라는 대로 하는 노예들 아닌가?
현재의 왜국 총리 아배 신조(安倍晋三)는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와 이름도 비슷하다. 윽박지르는 헛소리, 미친 말도 비슷하다.
그러니 한국에서도 그들 망령, 하수인들이 설쳐대며 헛소리와 미친 말로 민초들을 윽박지르는 것이다.
왜, 왜국이 자국 수산물 수입금지국인 5개국(러시아, 중국, 대만, 뉴칼레도니아, 한국)중 한국에만 강력히 항의하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를 검토한다고 할까?
왜, 왜국 후쇼샤 판보다도 더한 친일 미화, 독재 찬양 일색의 교학사 역사 교과서를 만든 김무성, 이명희 류들이 입에 침을 튀기며 곡학아세로 룰루랄라 용비왜천가를 부를까?
정말로 100년, 1000년의 세월이 흘러야 하는 건지? 식민의 땅에서 흉화(凶禍)만 보고 겪어야 하는지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다.
이런 때에 들려서 마음을 위로 받을 수 있는 고을이 바로 정읍이다.
정읍은 과거 정전법(井田法)의 이름이 남아있는 땅이다.
정전법은 살기 좋은 세상의 대명사인 고대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에서 실시된 제도다. 토지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하여 주위의 여덟 구역은 사전(私田)이고, 중앙의 한 구역은 공전(公田)으로 이곳의 수확은 조세였다.
백성도 살고, 나라도 사는 그런 공평한 토지제도이고 조세제도였던 것이다.
명박이 때 강만수가 그랬던가? 부자들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가난하건 부자건 가슴에 대못을 박아야 쓰겠는가? 하지만 누구의 가슴에도 대못을 박지 않으려면 이런 공평한 토지, 조세제도 등이 먼저다.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 시키는 그런 제도의 꼭대기에서 손가락 두 개로 V자 그리면서 대못 운운하던 명박이나 만수의 머리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정전법을 떠올리며 불현 듯 궁금해진다.
아무튼 정읍은 살기 좋은 고을, 모두가 합심하여 서로 돕고 살아가는 불만이 없는 공평한 세상을 말함이다.
그래서 세상의 불의를 보면 분연히 또 일어나는 그런 의로운 땅이었는지도 모른다.
녹두장군 전봉준 선생이 소년시절부터 동학혁명의 깃발을 들기까지 살았던 이평면 장내리의 고택과 그의 혼령이 묻힌 단비, 탐관오리의 대명사 고부 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의 고혈을 빨며 즐겼던 이평면 하송리의 만석보 유적지, 지금도 농민군의 피 끓는 함성이 들리는 혁명의 최초 봉기지 이평면 두지리의 말목장터, 관군과의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덕천면 하학리의 황토현 전적지 등을 감사하게 둘러본다.
이어 옥정호(玉井湖)로 간다.
대장금 연속극으로 유명해진 장금이의 고향 마을이 바로 이곳 옥정호라고 한다. 중종실록의 몇 줄 기록에서 불현 듯 현세로 나온 의녀 대장금은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 장금산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현재 이곳은 친환경 황토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정읍은 이미 내장산의 단풍으로 널리 알려진 고을이다.
이제 그 내장산의 단풍과 함께 푸른 물결 넘실대는 옥정호가 짝을 이루니 말 그대로 산자수려한 아름다운 고을, 합심하여 서로 돕고 사는 평화롭고 행복한 마을, 그러나 불의를 보면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의로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정읍이다.
행상(行商)을 나간 남편의 밤길을 염려하는 아내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한글시가 중 가장 오래되었고 유일한 백제의 노래로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있는 정읍사(井邑詞)를 읊조리며 정읍에서 순창으로 넘어간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데를 드디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데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전봉준 고택>
<전봉준 고택의 우물>
<전봉준 단비-시신없이 혼령만 모신 곳>
<만석보 유적지>
<오른위 동진천과 오른아래 정읍천이 만나 왼쪽으로 흘러간다. 두 천이 만나는 지점이 만석보였다.>
<말목장터, 감나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말목장터 안내판>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의 황토현 전투 그림>
<대장금이가 살았던 옥정호 황토리>
<마을 들머리 안내판>
<옥정호 황토마을을 지나가며 만난 정자>
<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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