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47
농사(農事)하는 옥구백성(沃溝百姓) 임피사의(臨陂蓑依) 둘러 입고
정읍(井邑)의 정전법(井田法)은 납세인심(納稅人心) 순창(淳昌)이라.
아직도, 아니면 영원히 일거다. 다까기 마사오의 귀태들과 이 땅의 힘센자들인 갑이 민초들의 고혈과 기름을 짜고, 미군의 주둔처럼 외세가 득세할 땅이다.
쾌지나 칭칭나네, 괘기(고기)가 징징(많이)나네. 가진 자들은 덩더쿵덩더쿵 노래 부르고, 없는 자들도 행여나 하고 어깨춤을 덜썩덜썩 따라 출 것이다.
왜국이 우리의 주인노릇을 했던 때 왜국은 내지였고, 조선은 반도였다. 대일본제국시대, 왜정시대, 일제식민지시대라고도 했다.
이제 왜국의 식민지배를 일제강점기라고 통칭하고 있다. 왜정시대와 일제강점기가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달라져서 무엇이 변하였는지, 이 나그네는 무식하여 알 수가 없다. 친일매국노의 후손들이 읊조리는 을사조약은 을사늑약이요, 한일합방은 경술국치다 등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저도의 추억을 살리려 역사 시험이 부활했다. 윤봉길은 테러리스트요, 왜국이 반도를 식민 통치하며 철도와 도로, 공장을 지어 근대화를 이뤄줬다고 주장하는 뉴 라이트들이 만든 역사책도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 이 가련한 나그네 언발에 오줌이나 눌 수밖에 또 있는가?
1927년 11월 옥구 서수면의 이엽사(二葉社) 농장에서 일어난 옥구농민항쟁은 일본인 지주의 가혹한 수탈에 맞선 소작농들의 저항운동을 대표한다.
64년이면 환갑도 저만큼이다.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이 옥구농민항쟁이 1991년에 공론화 되고, 또 9년을 보낸 뒤 73년만인 2000년 11월 15일 임피중학교 교정에서 첫 행사를 겨우 가졌다.
1894년 청일전쟁의 여파로 1899년 5월 군산항이 개항하자 왜인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반도 제일의 곡창지대인 전북에 기업형 농장을 마구 설립하여 쌀 수탈의 요충지요, 식량 조달의 거점으로 삼았다.
1904년 군산에 온 왜국 니카타현(新潟県) 출신 가와사키라는 악질이 있었다. 국수주의자인 그가 옥구 서수면 일대를 향리처럼 개발하고자 했다. 니가타현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쌀 주산지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 ‘고시히카리’는 맛좋은 왜미의 대명사다. 아무튼 이 가와사키와 더불어 니카타현 출신 왜인들이 1926년 협동조합 형태로 설립한 농장이 바로 이엽사(二葉社, 현재 임피중학교)로 역시 니키타현 출신 왜인 사이토가 주임을 맡았는데 이 자도 전형적인 악질지주였다.
당시 조선은 80%가 농민이었고, 그중 80%가 또 소작인이었다. 그리고 소작료는 42~47%였다. 그런데 옥구와 전주, 익산까지 논 1,000ha, 밭 200ha, 소작인 1,700명을 거느린 이엽사 농장은 75%의 소작료를 요구하였다.
여기서 잠깐 왜국 니키타현(新潟県)에 가본다. 나그네가 급할 거 무어냐? 막걸리 한 잔 마신다 셈친다.
니카타현은 노벨문학상을 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는 설국’의 배경이 되는 풍광이 좋은 고을이다.
그러나 1922년 8월에 조선인 노동자 집단학살 사건이 저질러진 피의 고장이기도 하다.
1922년 초부터 나가노현(長野県)에서 니키타현(新潟県)에 걸쳐 있는 강 시나노가와(信濃川)의 급류를 타고 조선인 노무자들의 시체가 흘러내려왔다. 처음에는 한 두 구였으나 차츰 그 수가 늘었다. 그리고 이 표류시체가 시나노가와댐 건설 공사장에서 맞아 죽은 조선인 노무자들이라는 게 밝혀졌다.
당시 발전량 30만KW의 동양 최대 발전소인 시나노가와댐 공사장은 인가에서 30리, 철도에서 1백리 이상 떨어진 외딴곳으로 ‘지옥의 계곡’이라 불렸다. 8백여 인부들은 주로 경남 일대의 농민들이었다 한다. 고용주가 왕복여비를 부담하고 하루 8시간 노동제, 월 2일의 유급휴가와 고액의 임금을 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은 것이다.
이런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된 박열(朴烈) 등 흑도회(黑道會) 간부들이 현장조사를 했고, 참혹한 조선인 학살 만행을 폭로했다.
왜인들은 조선인 노무자들을 한바(はんば, 飯場)라는 노무자 합숙소에 죄수처럼 가둬놓고 하루 14~15시간의 살인적 노동, 저임금으로 혹사시켰다는 것도 드러났다.
이 한바는 왜국 메이지시대 초기 북해도 개척시의 합숙소였다. 북해도의 반란군을 철도공사에 동원하고 도망자를 감시키 위해 감옥 같은 구조로 합숙소를 지었다. 시나노가와 댐 공사에서도 그 한바라는 합숙소감옥을 만들어 조선 노무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살상을 밥 먹듯이 저지른 것이다.
당시 밀양 출신의 김갑철(金甲喆)은 19세의 소년 노무자였다. 어느 날 도망가다 붙잡혀 쇠갈고리로 온몸 10여 군데를 찍힌 뒤, 나체(裸體)로 눈구덩이 속에 묻혔다. 또 도망치던 우윤성(禹允成) 등 3인도 나체(裸體)로 벽돌을 찍는 틀 속에 넣어져 물과 모래, 시멘트를 부으니 인간벽돌이 되었다. 이렇게 사망자만도 1백 명 이상이 발생하였다.
아름다운 설국(雪國)에 유혈이 눈처럼 흩날리는 혈국(血國)도 있었던 것이다.
2011년 경찰청장을 지낸 강희락이, 해양경찰청장을 지낸 이길범이 등 수많은 견찰들이 저지른 함바비리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왜국의 한바집이 바로 한국의 함바집이다. 경술국치가 한일합방의 면피용어인 것처럼 다까기 마사오가 대표하고 친일매국노 후손들이 일으키고 있는 대물림 비극인 것이다.
아무튼 잠시 막걸리 한 잔 마시며 쉬었으니 다시 옥구 얘기로 돌아가자.
1927년 11월 21일 옥구군 서수면의 농민 500여명이 왜국 농장주 사이또의 살인적인 소작료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농민조합을 통해 불납동맹을 결의하고 소작료를 납부하지 않겠다는 뜻을 왜인 농장주에게 통보했다.
4일 뒤인 25일, 왜경은 농민조합 서수면 지부장 장태성을 검거 압송해 갔다. 이에 서수농민들은 밤 9시경 왜경 임피출장소에 몰려가 장태성을 구출해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왜경이 농민조합 간부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농민들은 재차 10시경 서수주재소로 몰려가 건물을 부수는 등 항의를 했다.
다음 날 새벽 26일, 왜경의 형사대가 농민조합 간부와 소작인 50여명을 검거했다.
또 이에 격분한 서수농민 500여명이 군산경찰서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다 80여명이 추가로 구금되었다. 이 중 34명이 기소되어 징역 1년부터 집행유예까지의 선고를 받았다.
소작료 투쟁에서 발단이 됐지만 이 옥구농민항쟁은 조선인 소작농이 자발적으로 왜경에 맞서 투쟁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는 항일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다.
옥구(沃溝)는 물을 댈 붓도랑이 하늘과 땅 사이의 만 배나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어찌 그 크기를 가늠이나 하랴? 임피는 또 그 너른 땅을 막은 보이니 그 또한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크기다.
그 넓고 기름진 옥토에서 왜인들은 살판이 났다. 쌀에 만족하지 않고 소작인들의 등골을 빼고 가죽까지 벗겼다.
하지만 이 비옥(肥沃)한 땅의 백성(百姓)들이 비록 띠풀로 만든 도롱이 옷을 둘러 입고 농사(農事)를 지을지언정 그리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았다.
나라가 지켜주지 못했으나, 스스로 일어나 자신들을 지킨 것이다.
이를 기념하여 군산에서 대야를 거쳐 익산으로 달려가는 기차역인 임피역사에 옥구농민항쟁 기념비가 또 세워지고, 농사하는 옥구 백성 상징물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자랑스런 옥구, 임피 백성들이요, 우리의 선조들이다.
하지만 어디 옥구와 임피 뿐이랴? 옥구와 임피에 아직도 왜국의 잔재가 지명(地名)에 남아있다니, 나그네의 마음이 씁쓸하기만 하다.
군산은 본래 옥구현 북면(北面)에 속했고, 갑오개혁(1894~1896) 때 부, 목, 군, 현을 모두 군으로 고치면서 옥구현도 옥구군이 되었다. 1906년 옥구부, 경술국치(1910)후 다시 옥구군, 군산은 군산부(府)가 되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군산이 시(市)로 승격, 1995년에 군산시와 옥구군이 통합되었다.
왜국이 조선을 삼킨 뒤다. 그들은 토지조사에 착수하여 우리의 혼과 정신이 담긴 지명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고치거나 새로 만들었다. 한성(漢城)을 일본 동경(東京)의 다음 도시처럼 경성(京城)으로 고친 게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게 왜국의 조선전통문화와 민족혼 말살정책은 군산에서도 절정에 달했다. 금광동, 중동, 영화동, 천도, 횡전, 강호정 등이 왜식 동명이다. 옥구저수지 인근의 팔목촌, 중야, 전중, 열대자 등도 왜식 명칭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백제 오성인(五聖人)의 충절로 남아있는 오성산에 가본다. 금강 하류, 군산시 성산면에 자리한 오성산(227m)은 백제시대 교역로의 관문이었다.
그 백제가 서기 660년(의자왕 20년) 나당연합군 13만 명에 의해 멸망할 때다. 그 때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지역이 오성산이었다 한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임피현(臨陂縣) 고적조(古蹟條)’의 ‘오성인(五聖人)의 충절’기록이다.
‘당나라 소정방이 오성산에 병사를 주둔하고, 안개로 헤매다가 다섯 노인을 만났다. 그들에게 사비성으로 가는 길을 묻자 ’너희가 우리나라를 치러 왔는데 어찌 길을 가리켜 줄 것이냐?‘라고 항거하였다. 격분한 소정방이 노인들을 참살했고 후일 물러갈 때 그 충절을 기려 오성산 위에 장사지냈다.’
이 오성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92년부터 매년 ‘오성문화제전’을 개최한다고 하니 뒤늦은 일이지만 다행한 일이다.
어떤 트위터가 외교(外交)는 명사로서 다른 나라에 교미 하러 가는 행위라고 정의했다. 박근혜를 따라 미국에 갔던 윤창중이의 추태를 질타하는 말이다.
피땀을 흘리는 노동의 현장에서 묵묵히 삶터를 지켜온 민초들이 없었다면, 어찌 외국에 나가 기립 박수를 받았다고 자랑할 수 있고, 패션 쇼 하듯 옷을 갈아입으며 얍삽한 미소를 실실 흘리는 호사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
나그네는 농사하는 옥구 백성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우물 좋은 마을 정읍(井邑)에서 정전법(井田法)으로 사이좋게 농사짓고 좋은 곡식으로 납세(納稅)하면서 번창해가는 순창(淳昌)을 찾아간다.
<임피역>
<임피역>
<임피역사 안의 옥구농민항쟁 기념비>
<한잔 허세. 농사하는 옥구 백성, 역시 임피역에서 만날 수 있다.>
<익산방향으로 달려가는 철길>
<오성인지묘>
'호남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49 (0) | 2013.09.22 |
---|---|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48 (0) | 2013.09.21 |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46 (0) | 2013.08.30 |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45 (0) | 2013.07.30 |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44 (0) | 2013.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