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45

운당 2013. 7. 30. 06:58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45

 

강진(康津)의 상가선(商賈船)은 진도(珍島)로 건너갈제

금구(金溝)의 금()을 일어 쌓인 게 김제(金堤)로다.

 

계급이 없는 자유민주사회라더니 어찌된 일인지, 갑과 을, 빈부격차가 명확하게 둘로 나눠져 계급이 된지 오래다. 그리고 권력, 돈 가진 그런 부모 둔 놈들만 앞으로도 뒤로도 떵떵거리며 지배계급을 물려받게 되었다.

쥐뿔도 없는 놈은 없는 것도 죄다. 이것도 모르냐? 저것은 안 된다. 호통치고 윽박지르는 놈들 비위 맞추고 눈치 보며 죄인처럼 힘들게 산다.

혹여 국민 세금을 자기 용돈으로 쓰는 사기꾼 놈에게 욕이라도 하면 바로 국격이 어떻고, 품성이 어떻다고 나무란다. 푸른 기와집에서까지 눈알 부라리며 나선다.

무슨 놈의 욕 한마디가 국격과 품성에 기인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버러지를 버러지라 하고, 쥐를 쥐, 낙지를 낙지, 닭대가리를 닭대가리라 할 뿐인데 말이다.

 

그렇게 혼잣말하며 강진의 상가선을 타고 파도치는 대로 흘러가니 진도 고을이다. 보배섬이다.

진도에 첨찰산이 있다. 이 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아, 이래서 보배섬이구나 하게 된다. 참으로 아름다운 섬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485m의 명산이다.

 

첨찰산을 내려오면 운림산방이 있다.

이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종화의 대가이던 허유(18071890)가 말년에 머물면서 그림을 그리던 화실이다. 선생은 추사 김정희에게 서화수업을 받았다. 헌종(18241849)의 벼루,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왕실 소장의 서화를 평했다 한다. 대표작으로 선면산수도’,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이 있고 몽연록을 저술하였다. 이 운림산방은 철종 8(1857)에 지었는데 본채와 사랑채인 화실, 신축인 유물보존각과 연못이 있다.

 

이 운림산방이 아니더라도 진도에서 풍월자랑, 그림자랑하려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을 때 해야 한다. 오죽하면 벽장을 통째로 사고, 개를 사며 개밥그릇을 덤으로 주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을까?

벽장을 통째로 샀다는 말은 벽장에 대대로 붙여진 그림을 가지려고 그냥 통째로 벽장을 샀다는 얘기다.

또 개 이야기는 개 주인이 값을 부르는 대로 개를 사고 개밥그릇은 덤으로 달라 했다는 얘기다.

주인장 왈 그 개밥그릇 줘버리면 앞으로는 개를 못 파는데요.’했다 한다. 그러니까 그 문화재로 보이는 개밥그릇을 내세워 개를 팔아먹었던 것이다.

실화일 수도 있는데, 문화재를 포함해 세상 모든 걸 돈으로만 보는 미친 세태를 풍자한 얘기일 것이다.

 

하긴 그러더라도 진돗개를 샀다면 손해 본 것은 아니다. 진도의 진돗개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개로 유명하다. 한 번 주인을 섬기면 죽는 날까지 섬긴다고 한다. 또 평생 첫 주인을 알아본다고 한다.

그래서 개 같은 이라는 욕은 안해야 하는데, 개견, 개검, 국개란 말이 반쪽, 4쪽으로 쪼개진 한국에서는 통한다. 다 검경, 국회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나그네의 입을 탓하지 말라.

 

또 진도는 항몽 전적지가 있는 곳이다. 지켜줘 봤자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고 사는 후손들을 위해 선조들이 괜스레 피만 흘렸다 여겨진다. 차라리 삼별초도 몽골과 손잡고 왜적이나 확실하게 쳐서 끝장을 봤다면 양 왜란과 왜정시대는 없었을지 모른다는 허망한 꿈을 그린다.

 

진도의 끝자락에 이르면 팽목항이 있다. 이곳에 있는 남도석성을 둘러보고 관매도로 가는 배를 타면, 첨찰산에서 보던 피안의 세계 중 하나인 관매의 절경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 사람은 가시지 말라. 이곳은 멀쩡한 사람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곳이다. 그만큼 자연이 아름답다는 말이다.

 

진도에서 애주가는 두 가지 술을 맛볼 수 있다. 바로 증류주인 홍주가 그것인데 이 홍주의 붉은 색은 지초(芝草)라는 약초 때문이라고 한다. 아무튼 40여도의 독술로 맛과 향기가 일품이다. 또 하나는 발효주인 노랑색 울금막걸리다. 울금은 카레 원료라고 하는데, 역시 그 맛과 향이 좋다.

 

또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의 바다가 조수 간만의 차이로 길이 2.8, 너비 40m로 열린다. 이 바닷길이 최대로 열리는 4월말 경 신비의 바닷길 축제가 있다. 뽕 할머니의 전설과 함께 남쪽 바다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리고 진도에 들어가면서 만나는 울돌목은 역사의 현장이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격파한 이순신 장군을 뵐 수 있다.

바다 가까이 내려가 울돌목이 왜 명량인가? 파도 울음소리를 들은 뒤, 해남 땅 우수영 쪽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충무사에 참배도 할 수 있다.

충무사는 1964년에 중건한 사당이다. 명량대첩 비와 충무공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그런데 기막힌 사연이 있다.

이곳의 명량대첩비는 충무공이 정유년(1597) 916일 우수영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을 기록한 것으로 숙종 때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당대의 명필(名筆) 판돈령부사 이정영,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로 써서 숙종 143월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했다.

그런데 왜놈의 따까리인 조선총독부가 그 비()를 가만둘 리 만무했다. 1942년 전남 경찰부가 왜경과 목수, 학생까지 강제동원 높이 2.67m, 1.14m의 비석을 우수영 선창으로 옮기고 비각을 흔적도 없이 헐어버렸다.

조선총독부는 한때 대첩비를 아예 없애려다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어버렸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우수영 유지(有志)들이 수소문 끝에 대첩비를 겨우 찾았다.

그러나 대첩비를 우수영으로 옮길 것이 막연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군 트럭에 실어 서울역으로 옮기고 목포까지는 열차로, 목포에서 배를 이용 우수영 선창으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또 비()를 세울 장소가 없어서 제각(祭閣)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에 들어갔다. 풍물패를 조직, 나주 무안 등 8개 군을 돌았고 대첩비를 수백 장 탁본하여 팔기도 했다.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1950년 마침내 비각이 완공되어 비를 모셨다.

그런데 지금의 충무사란 현판 글씨를 쓴 자가 누군가 하면 왜명 다까기 마사오란 박정희다. 또 장군의 영정 그림은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렸다.

무에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한 마디만 더하자면 다까기 마사오놈 기념관에 국비 208억원을 들였다고 하니, 이놈의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니 나그네는 죄인이 되어 이순신 장군께 절하고 밖으로 나와 박정희와 김은호 두 놈에게 욕을 하고, 성스러운 곳에서 욕한 것을 장군께 사죄해야 했다.

또 사기 치는 놈이라면 명박이 하나로도 징글징글인데 세계 수영선수권대회 사기 친 강운태랑 사는 지역이 같으니, 그 놈까지 욕하고 이순신 장군께 또 사죄를 했다.

왜놈들한테 당하든 말든 냅두시지 무슨 영광을 보시려 그리 고생하시었소?”

하지만 차마 그 말은 못했다.

 

보배섬 진도를 그렇게 작별하고 골짜기마다 금밭(金溝)이라, 캐어내니 금무더기라, 김제(金堤)로 간다.

 

<바닷길 열리는 진도 뽕 할머니 상 있는 곳>

<뽕 할머니 사당>

<겨울 운림산방>

<연못>

<한 겨울이라 관광객이 없다>

<그대로 그림이 되어버린...>

<남도석성>

<이 땅을 지켰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