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49
농사(農事)하는 옥구백성(沃溝百姓) 임피사의(臨陂蓑依) 둘러 입고
정읍(井邑)의 정전법(井田法)은 납세인심(納稅人心) 순창(淳昌)이라.
전라북도 남부 중앙의 산간지대인 순창 고을은 서쪽과 북쪽의 병풍처럼 솟은 산이 절경이다. 그 서쪽 절경 강천산(584m)에서 흘러온 경천이 북쪽에서 온 양지천을 읍에서 만나 남쪽으로 내려가는 섬진강으로 들어간다.
산이 높으니 수량이 풍부하다. 맑고 깨끗한 물에 농토가 기름지고 가뭄걱정이 없으니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 또한 풍요롭다.
순창에서 전주까지 60.5km, 광주광역시는 40km, 남원시는 28km 거리로 관광시장도 좋다.
가족과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들려서 강천산 맑은 계곡물에 탁족을 하고, 순창 읍의 한식집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최고급 품질의 고추장, 된장, 간장을 살 수 있다. 일석 삼조의 나들이를 할 수 있는 고을이 바로 이 순창 고을이다.
납세가 헌법에 명시된 백성의 의무라는 건 초등학교를 나오면 다 안다.
그런데 한국에는 초등학교를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많다. 이명박은 전과 14범이란 말로 인구에 회자된 불량 납세자였다. 박근혜도 전두환에게 6억인가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 돈에서 세금을 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이들이 일제 식민지 시대의 국민학교를 나오고 한국의 초등학교를 나오지 않아 납세의 의무를 모르는지 어쩌는지, 알 수는 없다.
갑근세(甲勤稅)는 유리알 징세라고 하니 그만 두고, 힘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갑들의 행태를 살펴보자. 들리는 바에 의하면 2012년 이후 고액체납자로 명단이 공개된 인원은 1만2779명, 전체 체납액은 26조원을 웃돈다고 한다. 그런데 명단 공개자가 낸 체납액은 2474억 원으로 전체 체납액의 0.9%라고 한다. 이에 국회 입법조사처가 고액체납자 명단공개와 징세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관보와 인터넷, 주요 일간지는 물론 공항과 항만에도 명단을 공개하자고 제안했고 정부는 개인의 사적 권리를 과도하게 침범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신중한 입장이라고 한다.
채동욱 사건을 보면 정부와 특정 집단이 개인의 사적정보를 몰래 사찰하고 그 내용을 고래고래 사방팔방 악을 써서 개인의 사적 권리를 똥 걸레로 만든 게 분명하다.
그런데 개인의 사적 권리를 과도하게 침범하는 경우라니? 구르는 개똥이 웃을 일 아닌가?
납세 인심 순창이라, 순창 고을에 들어서며 헛웃음부터 나오니, 순창 고을 사람에게 진정으로 미안하다.
아무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순창 읍내에서 보통 백반이라 부르는 한식으로 점심을 먹고, 강천산에서 잠시 탁족을 한 뒤, 피노리에 있는 전봉준 장군 피체지로 간다.
피체지는 전봉준 장군이 옛 부하의 밀고로 붙잡힌 곳이다. 말로만 들으면 기분 나쁘고 정나미가 떨어지지만 그곳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는 산 좋고 물 좋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사연인즉 이렇다.
전봉준이 장성 입암산성을 거쳐 갈재(蘆嶺)을 넘어 쌍치면 피노리(현 금성리)로 김경천을 찾아간다. 태인현 종성(현 산내면)에 피신한 김개남과 합류하려 가다 들린 것이다.
김경천은 전봉준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막으로 안내해 저녁밥을 대접하며 생각했다. 이제 혁명은 실패했다. 자칫 숨겨준 게 발각 되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고, 이 기회를 살리면 황금과 벼슬이다. 김경천은 후자를 택했다. 슬그머니 마을에 사는 전주퇴교(全州退校) 한신현에게 밀고를 한 것이다.
당시 전봉준 체포자는 ‘상금 천냥과 일등군수(一等郡守)’였으니 지금 같으면 권력이 덤으로 붙은 로또복권이다. 한신현은 마을장정 김영철, 정창욱 등과 함께 주막을 포위했다.
전봉준은 천보총(千步銃)을 든 채 장작단을 밟고 담을 넘었으나, 포위자들의 몽둥이에 다리가 부러져 붙잡혔다. 1894년 12월 2일(음) 한 겨울 밤, 동학혁명은 그렇게 더러운 배신으로 매듭 되었다.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돼 이듬해 손화중, 최경선과 함께 처형됐다.
이일로 피노리 마을은 ‘전봉준 피체지(被逮地)’로 역사에 남고 순창은 본의 아니게 치욕을 덮어쓴 격이 되었다.
이 일과 얽혀 동학혁명 발상지라는 자부심을 가진 정읍과 전봉준 피체지인 순창 간에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순창군이 피노리에 피체지 기념관을 세우면서 김경천이 정읍 덕천면 출신이라는 최현식의 ‘갑오동학혁명사’를 근거로 ‘정읍 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라는 표지석을 세웠고, 정읍은 정읍시에 있는 전봉준 장군 허묘에 ‘순창 피노에 사는 김경천의 밀고’로 라는 표지석을 세운 것이다.
고발은 사회 변혁에 기여하지만, 밀고는 사회를 불신과 반목으로 처박는다. 그리고 밀고는 그 결과가 더럽다. 당시 김경천은 더러운 밀고자였고 역사에 치욕을 남겼다.
그런데 이 밀고자가 어느 고을 출신이냐 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천박한 역사관, 황금만능의 세태, 가진 자들의 길들이기와 편 가르기에 걸리면 그 누구도 밀고자가 되기 때문이다.
산자수려한 정읍,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 순창의 피노리도 역사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리고 김경천은 정읍 사람도 아니고, 피노리에 산 것도 아니다. 바로 우리 마음의 위선과 거짓, 탐욕과 이기심 속에 살고 있을 뿐이다.
간명하다. 전봉준 장군이 이명박이나 전두환이 집에 숨을 수 있겠는가? 윤상현이나 김무성이가 숨겨주겠는가?
우리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며 기록에 남겨야 할 것은 어디 출신이 아니라 바로 사악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의 이름일 뿐이다.
그 사악한 자들의 이름을 전봉준 장군 피체지 표지석에 출신지 대신 새기고, 순박하고 고운 인심 서로서로 어울려서 번창(繁昌)하는 순창(淳昌)을 작별한다. 그리고 고부(古阜) 청청(靑靑) 양유색(楊柳色)은 광양(光陽) 춘색(春色)이 팔도에 온 것이라는 고부와 광양 고을을 찾아간다.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의 전봉준 장군 피체지>
<피체지 기념관 전경>
<당시 주막을 재현해 놓은 모습. 실제 주막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 한다.>
<초라한 기념관, 그러나 진정으로 고개 숙여지는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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