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0-3

운당 2012. 12. 2. 09:49

 

그런 관점에서 이곳 비단고을 능주 고을의 아름다운 일화를 풀어가겠다. 바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1488~1545)의 우정이다.

조광조는 1482년 경기도 용인군에서 감찰 조원강(趙元綱)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생질인 양절공 조온의 4대손이다. 그 고조부 조온은 조선의 개국공신이었으니 조광조는 귀족 자제였다.

양팽손은 조광조처럼 공신명문가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5세 때에 이미 능성현의 신동이라 불린 인물이다.

그가 일곱 살 때다. 이 고을을 순시한 전라감사가 양팽손의 출중함을 듣고 천지일월이란 제목으로 시를 지으라 했다. 어린 양팽손은 거침없이 천지는 나의 도량이요, 일월은 나의 밝음이 된다(天地爲吾量 日月爲吾明)’라고 시를 읊었다. 이에 전라감사가 이는 해학(海鶴)의 모습이요, 추월(秋月)의 정기라 훗날 용문에서 크게 이름을 떨치리라고 감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렇게 어릴 적부터 영특하고 문재가 뛰어난 양팽손은 22세 때인 중종 5(1510)에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516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김정(金淨) 등을 위해 항소하다 삭직되어 고향인 전라도 능성현 쌍봉리에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독서로 소일했다. 또 서화(書畵)에도 능해 산수도등의 그림을 남겼다.

이 양팽손과 조광조의 우정과 운명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우리 후손들에게 큰 감동과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마땅히 지금도 본받아 따라야할 귀감이요 표상인 것이다.

조광조보다 양팽손은 6살 손아래로 두 사람은 사상적, 정치적 동지였다. 조광조가 양팽손을 일컬어 더불어 이야기하면 마치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서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뒤의 가을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人慾)을 초월한 사람이라 했다. 두 사람의 끈끈한 우정과 신뢰를 느낄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은 때로는 가혹함을 강요하기도 하다. 기묘사화가 바로 그들에게 닥친 기막힌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기묘사화란 어떤 일이었는가? 조선조 연산군 시절 무오년과 갑자년에 두 번의 사화(士禍)가 있었다. 이어 중종 임금대에 있었던 세번째 사화가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 기묘년이어서 기묘사화라 한다.

당시 중종반정에 성공한 훈구파(勳舊派) 세력들은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날뛰었다. 이에 맞서 사림파(士林派)인 조광조가 개혁정치를 부르짖으며 이들을 진정시키고 공신자격을 빼앗는데 앞장을 섰다.

노회한 훈구파들이 가만있겠는가? 이에 음흉한 계략으로 맞서 궁궐 안 나뭇잎에 꿀로 글씨를 쓴다. 주초위왕(走肖僞王)이 그것이니 주()와 초()를 합치면 조(). 곧 조씨(趙氏)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이 글자를 벌레들이 파먹고 그 나뭇잎이 중종에게 바쳐진다. 중종은 왕에게까지 훈계를 하는 조광조가 내심 부담스러운 판에 잘 되었다 싶어 훈구파의 손을 들어줬고, 조광조 등은 유배되고 처형된다. 바로 기묘사화라 불리는 정변(政變)이다.

 

이런 연유로 조광조는 양팽손의 고향인 능성현으로 유배를 온다. 양팽손은 조광조를 반갑게 맞아 유배지에서의 적적함을 함께한다. 하지만 정변에 성공한 수구세력들의 행태는 집요하고 잔인했다. 그들은 기어이 정적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게 한다.

그렇게 양팽손과 조광조의 마음 아픈 해후와 기쁨도 잠깐, 양팽손은 동지가 눈앞에서 사약을 받아 숨을 거두는 걸 지켜봐야했다. 피눈물을 쏟으며 그의 마지막을 지키고 주검을 거두어야했다.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 웃음을 짓네. / 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 독 안에 들어 있어 빠져 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151911월 기묘사화로 능성현(화순군 능주면)에 유배 온 뒤 쓴 정암 조광조의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 자신의 처지를 활 맞은 한 마리 새로 비유하고, 마음은 말 잃은 마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은근히 중종의 재 부름을 기대하며 개혁정치를 꿈꿨지만, 그 실낱같은 기다림은 사약으로 바뀌고 만다. 독 안에 들어 빠져 나오기 어렵다는 체념이 사실이 되고 말았다. 조광조가 능성에 온 것이 초겨울인 음력 1115일이고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온 게 음력 1220일이었으니 유배 온 지 한 달 닷새 만이다.

새 생명이 움트는 봄이면 능주의 붉은꽃이 피처럼 온 산천에 피어날 것이다. 그 능주의 붉은꽃을 보지도 못하고 한 많은 세상을 등진 셈이다.

 

그리고 죽음 앞에 이르러 또 한 편의 절명시(絶命詩)를 쓴다.

애군여애부(愛君如愛夫)

우국여우가(憂國如憂家)

백일임하토(白日臨下土)

소소조단충(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네. /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 내 일 편 단심 충심을 밝게 비추리.

 

위의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와 절명시(絶命詩)는 현재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의 조광조 적려유허지 애우당(愛憂堂)에 걸려 있다. 애우당은 절명시 1구 첫 글자인 애()2구 첫 글자인 우()를 딴 강당 이름이다.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지>

<애우당>

<절명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