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9년 11월 15일, 조광조는 애끓는 마음을 달래며 광주와 화순을 잇는 고갯길 너릿재를 넘어 능주에 다달았으리라. 지금은 이 너릿재에 4차로 터널이 뚫렸고 또 더하여 4차로 새 길이 나고 있다. 광주 외곽에서 5분여면 화순에 닿고 능주까지도 10여분이면 족하다.
흰구름 나그네는 그 너릿재 길을 택하지 않고 봄이면 능주의 붉은꽃이 만발하는 비봉산 자락을 돌아 목사고을 능주로 들어섰다.
능주의 붉은꽃이 피고, 또 그 붉은꽃이 지면 금세 여름이다. 그러면 능주를 오가는 길가에서 먹음직스런 복숭아를 볼 수 있다. 토실토실 살찐 아이의 엉덩이라 할까? 여인의 무르익은 입술이라 할까?
광주에서 온천휴양지인 도곡면을 지나 비봉산 자락을 돌아 능주로 들어서는 길도 향기로운 능주복숭아를 팔던 상인들이 즐비했던 길이다. 깊은 가을, 그리고 설한풍 겨울이 지나고 나면 다시 온 산천에 붉은꽃이 피고, 붉은꽃이 열매를 맺으리라.
그 비봉산길을 돌아 조광조 적려유허지를 찾은 날이 2012년 11월 18일이다. 조광조가 도착한 날이 1519년 11월 15일이니 만으로 셈하여 어언 493년의 세월이 흐른 날이다. 하지만 음력과 양력이 한 달여 차이가 나니, 당시보다 한 달여 앞선 셈이다.
음력 11월은 양력으로는 12월이니 몹시 추운날씨였으리라고 여겨진다. 조광조는 그렇게 능성현에 도착하여 작은 초막으로 들어섰다. 현재 위치와는 조금 다르다고 하는데, 적려유허지에 그 초막이 옛 모습을 반추하고 있다.
깊어가는 늦가을 아무도 찾지 않는 조광조 유허지에 이르러 그 적막한 담 안을 기웃대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선다.
애우당 안쪽으로 들어가면 적중거가라고 써진 초가집과 영정각이라고 써진 기와집이 있다. 적중거가는 방 2칸, 부엌 한 칸의 초가집이다. 조광조가 머물다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곳이다. 영정각 문을 여니, 관복을 입은 조광조 선생이 단아하면서도 위엄이 서린 얼굴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환한 햇살이 영정을 모신 액자 유리창에서 빛난다. 하지만 햇살처럼 환하게 웃지를 않는다. 큰 뜻 이루지 못하고 사약을 먹고 세상을 버려야했던 그 비통한 심정이 어떠했을까? 순간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동한 묵념을 올리고 돌아 나오며 비각 안에 모셔진 적려유허비를 살핀다. 거북이가 받친 비석 앞면에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라는 12자의 해서체 글씨가 세로 두 줄로 6자씩 적혀 있고, 뒷면에는 추모내역이 한문으로 적혀 있다. 글씨도 희미하고 한문 실력도 일천한바, 바로 곁에 비문을 설명해놓은 안내판이 답답한 마음에 큰 도움을 준다. 조광조 사후 150여년 뒤인 1667년에 능주목사 민여로가 세우고 글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음을 알 수 있었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으면서 ‘내가 죽거든 관은 얇은 것으로 하라. 행여 무거운 것을 쓰면 먼 길에 돌아가기 어려우므로 아주 얇은 것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또 초가집 주인에게 집을 더럽혀 미안하다고도 했다 한다.
이어 학포 양팽손을 찾았다. 양팽손이 눈물을 주체치 못하며 들어오자,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양공! 어찌 이토록 늦게야 오시나이까?”
조광조는 이어 ‘태산이 무너지는 도다(泰山其頹乎), 철주는 부러지는 도다(梁木其壞乎), 철인이 시들려는 도다(哲人其萎乎)’하고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오는 공자의 마지막 노래를 나직하게 불렀다.
한동안 말없는 침묵이 흐른 뒤, 마침내 조광조는 ‘양공, 신이 먼저 갑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사약을 마셨다. 하지만 한 사발의 사약에 쉽게 죽지 않자, 술 한 사발을 마신 뒤 다시 사약을 한 사발 더 마셨다 한다.
그렇게 위대한 개혁정치가는 허망하게 세상을 하직하였다.
세상이 평안할 때 의리를 말하기는 쉬우나 난세에 의리를 행하기는 정말 어렵다. 조광조는 임금의 사약을 받은 죄인이었다. 하지만 양팽손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조광조의 시신을 손수 염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마을인 지금의 이양면 쌍봉사 근처 중조산 서원터(화순군 이양면 중리 서원동 마을)에 가묘를 썼다. 후일 이곳을 조대감골이라 불렀는데, 그때 조광조의 시신을 임시로 장사지냈던 골짜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해가 가고 조광조의 주검은 선영이 있는 경기도 용인으로 옮겨갔다.
양팽손이 세상을 떠난 뒤 100년이 지나, 그의 4세손인 양세남이 집안 대대로 전해오던 그날의 일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그날은 눈이 한 자나 더 쌓이고 햇빛도 스산하고 바람이 몹시 불어 추위를 견디기가 어려웠는데, 선생은 홀로 적려(謫廬)의 밖에서 눈발에 옷을 적시고 앉아 종일 곡읍을 하였다. 추운 기운이 몸에 든 줄도 모르고 병이 나서 여러 번 기절을 하기까지 했다. 염(殮)과 빈(殯)을 끝내고 큰아들인 응기를 시켜서 전(奠)까지 올리게 하고 슬프게 곡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병든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참으로 대단한 우정이요, 의리다. 양팽손은 그 뒤 화순군 이양면 쌍봉마을에 학포당이라는 서재를 짓고 시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과 등졌다. 그 때 그린 그림 중에 ‘산수도’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절벽이 있는 강산에 뱃사공이 있는 배 한 척, 그리고 절벽에는 나무와 집이 있으며 먼 곳에 구름이 자욱하다. 마치 안견의 ‘몽유도원도’ 비슷한데 화제(畵題)는 이렇다.
家住淸江上(가주청강상) 晴窓日日開(청창일일개) 護村林影畵(호촌림영화) 聾世瀨聲催(롱세뢰성최) 客棹隨潮泊(객도수조박) 漁船捲釣廻(어선권조회) 遙知臺上客(요지대상객) 應爲看山來(응위간산래) 江闊飛塵隔(강활비진격) 灘喧俗語聾(탄훤속어롱) 漁舟莫來往(어주막래왕) 恐與世上通(공여세상통)
맑은 강가에 집을 짓고 / 갠 날마다 창을 열어 놓으니 / 산촌을 둘러싼 숲 그림자 / 흐르는 강물 소리에 세상 일 전혀 못 듣네. / 나그네 타고 온 배 닻을 내리고 / 고기 잡던 배, 낚시 걷어 돌아오니 / 저 멀리 소요하는 나그네는 / 응당 산천 구경 나온 것이리라. / 강은 넓어 분분한 티끌 멀리할 수 있고 / 여울 소리 요란하니 속된 사연 아니 들리네. / 돛 단 고깃배야 오고 가지 말라. / 행여 세상과 통할 까 두렵다.
이 시에는 세상과 담을 쌓고 은거하는 이의 심정이 담긴 시다. ‘행여 세상과 통할 까 두려워서 고깃배도 오고 가지 말라’고 한 표현은 은일(隱逸)의 극치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조광조에 대한 그리움과 상처받은 자신의 마음이 처절하게 담겨있다.
흔히 향기로운 우정을 ‘지란지교(芝蘭之交)라 했다. 조광조와 양팽손의 인연은 죽어서도 향기롭다. 화순군 한천면에 있는 죽수서원과 경기도 용인시의 심곡서원에는 지초, 난초 향기가 풍기는 두 사람의 신위가 같이 있어 그날의 인연과 운명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옛 능주목 관아 모습>
<영정각>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지, 왼쪽으로 조금 보이는 초가가 적중거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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