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28
백리 담양을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만 이랑(만경) 물결인데
담양을 지나 굽이굽이 흐르니 마침내 만 이랑의 물결이다. 끝없는 지평선의 고을, 드넓게 트인 땅, 생명을 살리는 너른 땅인 광활면(廣活面)을 품은 만경에 이른다.
2012년 11월 10일, 만경을 찾는 날짜로는 조금 늦었다. 황금물결이 치는 들판을 보려면 10월 중순쯤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다. 어릴 적 메뚜기 뛰노는 그 황금물결 이랑이 자꾸만 눈에 어린다.
고향은 아니지만, 김제만경 들녘은 흰구름 나그네가 어린 시절을 온전히 보낸 곳이다. 그래서 김제만경의 한가운데 고을 중 하나인 죽산면 죽산 마을은 흰구름 나그네에겐 그리움의 본향이기도 하다. 이번 만경 기행을 어릴 적 추억이 서린 망해사(望海寺)와 죽산면(竹山面) 죽산(竹山)마을로 정한 것도 그런 연유다.
왼쪽이나 오른쪽 모두 지평선이다. 산지가 70%인 금수강산 반도 땅에서 이곳 김제만경평야만큼 지평선이 확실한 곳이 또 있으랴? 그렇게 들녘 한 가운데를 달리는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서김제 만경 나들목을 나선다. 황금물결이 출렁였던 들녘에는 둥글게 말아진 볏짚 낟가리들이 하얀 꽃처럼 피어있다. 일학년 꼬맹이들이 줄을 지은 모습처럼 보기에 좋다.
오른쪽으로 만경읍을 지나 곧장 진봉면쪽으로 간다. 진봉산(72m) 기슭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절집 망해사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들이 너르니 방앗간도 크다. 이젠 방앗간이 아니고, 도정공장도 아니고 이름이 무슨 라이스 센터다. 세월이 흘러 쌀도 미국식으로 혀를 굴린다. 괜히 시비 거는 건 아니지만, 참새 날아드는 방앗간이 그립다. 이 때쯤이면 볏짚으로 만든 쌀가마니를 그득그득 실은 소달구지가 방앗간 창고 앞에 장을 섰다. 그 소들이 싼 소똥을 산처럼 모아놓은 소똥산도 그립다.
그리움의 대상은 다 지나가기 마련이다. 지나간 일이니까 그리울 거 아닌가? 싱거우면 간장을 치라는 싱거운 농담도 있지만, 수십 년 묵은 그리움을 꺼내며 마침내 망해사 들머리에 이른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이곳 망해사에 소풍을 왔다. 죽산 초등학교에서 이곳까지는 왕복 20여Km에 이르는 원족길이었으리라. 당시는 소풍을 원족이라고도 했다. 신작로라 부르는 길은 먼지 나는 비포장 길이었고 그늘을 주는 가로수도 없었다. 가을이지만 햇살은 따갑고 다리는 아프고 배도 고팠다는 생각이 아스라하다.
그래도 망해사에 이르러 할머니 보살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일, 너른 바다를 내려다보는 꼬맹이 마음에도 아름다움이 솟구치던 일 등이 주마등으로 스친다.
그런데 그 때의 추억과 겹치는 것은 절집뿐이다. 이제 바라보는 바다는 새만금둑으로 막혔고, 건너편으로 보이는 군산항의 즐비한 고층건물이 낯설기만 한다.
그렇게 세월이 무심하지만, 아, 있다. 11살짜리 꼬맹이가 거기에 있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 검정 학생복을 단정히 입고 앞머리를 가지런히 자른 상고머리의 꼬맹이다. 절집 할머니 보살님도 계신다.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그러다 순간 어지럽다.
아무 것도 없다. 한순간의 꿈에서 깨어나니 만경강 갯벌 밭의 한 무리의 갈매기 떼들이 보인다. 바람에 실려 오는 끼룩끼룩 갈매기 울음소리가 새로운 추억을 덧붙인다.
<왼쪽 심포항, 오른쪽 군산항, 가운데 새만금 둑, 망해사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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