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26
병풍같이 두른 층층(層層) 산은 겹겹(益山)이 쌓여 있네.
만장운봉을 내려오니 아직도 층층산(層層山) 익산(益山)이다. 산(山)이 쌓인 건가? 이로움(益)이 쌓인 건가? 걸어만 다녀도 좋은 땅, 익산은 우리에게 이로운 일, 더할 것만 있는 고을이다.
누구라도 다 한 때는 빛나는 때가 있다.
여성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갓 피어난 꽃송이처럼 아름답고, 이슬 머금은 풀잎처럼 싱그럽다. 남성은 수염을 깎지 않아도 초라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옷을 걸쳐도 맞춤 옷걸이가 된다.
누구라도 다 한 때는 빛나는 사랑도 하고, 그 사랑의 기쁨과 설렘에 행복하고 또 그 사랑의 고뇌에 떨며 슬픔을 알게 된다.
누구라도 다 한 때는 그런 빛나는 때가 있다.
하지만 아침 안개 스러짐이라 할까?
풀잎에 맺힌 이슬의 운명이라 할까?
그 빛나는 아름답던 날은 어디로 간 것일까?
만장운봉이 높이 솟아
층층한 익산이요….
만경강과 금강 사이에 너른 벌을 펼친 익산에 무슨 산이 있어서 층층할까?
산이 층층하다는 말은 익산에서 살아온 인간의 역사가 오래임을 말하는 거라 여겨진다. 또한 더할 것, 얻을 것이 넘치고 흘러서 쌓이는 고을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두 강 사이의 토지는 삼각주와 같아서 비옥함이 천연적이다. 풍요로운 수확을 보장하는 천혜의 땅이었다. 자연에 의존하여 살아야 했던 인간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의 무게와 두께를 층층히 쌓으며 살아온 것이리라.
층층한 익산의 의미가 그러할 진데 오늘은 그 겹겹이 쌓여 넘치는 익산의 이야기를 사랑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그런데 2012년 10월의 마지막 밤을 하루 앞둔 30일, 스쳐 지나는 뉴스 하나가 눈에 확 들어오며 나그네를 절망 시킨다.
5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고려 때도 그러할 진데 마한은 더 한 옛날이다. 그런 전차로 마한의 옛 왕도인 익산을 둘러보면서 막걸리 한 사발 없어서야 되겠는가?
흰구름 나그네 술 한 사발 들어가니 말이 거칠어진다. 그러지만 나그네 흰구름이 저 좋아서 쓰는 글이니, 혹시 읽다가 기분 나쁘면 해량하시라.
그렇다면 나그네 흰구름을 갑자기 확 기분 상하게 한 일은 무엇인가? 사실은 별 거 아니다. 쥐품달구새끼들의 저질 코메디다. 그래도 역사의 기록에 남겨놓기로 한다.
차떼기로 먹어도, 장롱으로 먹어도 배가 고프다. 새로 더 먹으며 누리자는 먹어도 먹어도 항시 배고파 당의 선대위 인사들이 말했다.
“2030세대에서 표를 많이 늘리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박근혜가 싫어서’ 투표장에서 뛰어나오는 사태는 막아야 한다.”
이 말이 뭔 말인가? 쉽게 얘기하면 젊은이들이 투표를 못하게 막아야 한다는 말 아닌가?
이런 빌어먹을 세상, 환장한 놈들 아닌가? 이런 현실에서 사랑은 무슨 얼어 죽을 얘기인가? 하지만 이에는 이요, 독에는 독이다. 더런 인간을 이기는 방법은 단 하나다. 사랑이다.
그 인간들이 사기와 협잡, 위선과 교활함으로 위세 부리고 장물을 지키려 지랄발광하는 때에 우리는 이 세상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사랑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사랑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시는 사랑
한 마디로 그런 사랑으로 그들을 무시 하자는 거다.
역사에 남은 이야기가 있다. 더러운 말에 귀를 씻은 소부처럼, 그 귀 씻은 물을 말에게조차 먹이지 않은 허유처럼 그들을 짐승 취급하기로 하고 사랑 얘길 이어나가기로 한다.
더하고 넘치는 익산의 사랑 얘기, 바로 서동과 선화공주를 만나러 간다.
먼저 서동이 어찌 태어났는지부터 알아본다.
익산 지역의 민간에 전승되어 오던 서동 설화가 기록에 남겨진 것은 일연의 삼국유사다. 그 삼국유사 기이편(奇異篇) 무왕조에 내용이 있다.
백제 30대 무왕(武王) 부여장(夫餘璋)의 어머니가 홀몸이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의 익산 남지(南池)라고도 하고 부여의 궁남지((宮南池)라고도 하나, 지금 그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기에 넘어가기로 하겠다.
아무튼 어느 날 서동의 어머니가 그 못의 용과 사랑을 나누고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무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왕의 어린 시절의 이름이 서동(薯童)이다. 어려운 가계를 돕느라 늘 마(薯)를 캐어 팔았기에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한다.
자, 그럼 이번엔 선화공주를 알아보자. 선화는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579-632)의 셋째 공주다. 오늘의 유신공주는 고약스런 마귀할멈 닮았지만 이 선화는 재색을 겸비한 아리따운 처자였다.
이 소문이 백제 땅까지 전해졌다.
소문을 들은 서동은 머리를 깎고 신라에 왔다. 먼저 1단계 직전으로 특기인 마를 캐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친해졌다. 달리 친구인가? 오래 사귀면 친구(親舊)이고, 함께 먹을 걸 나누면 친구(親口)인 것이다.
이어 2단계로 노래를 지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이 노래가 삽시간에 신라 서울 서라벌(徐羅伐 지금의 慶州)의 유행가가 되었다. 한 마디로 ‘경주 스타일’ 지금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된 것이다.
이러니 대궐에 난리가 났다.
당시의 신라의 성 풍속은 꽤 자유로운 것으로 전해지지만 아, 공주가 바람이 났으니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다. 더욱이 그 상대가 누구인지도 확실치 않으니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확실한 증거도 없이 공주를 유배 보내자고 주장하는 대신들의 행태가 이상하다. 그에 응한 왕의 처신도 그렇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의 염문에 변명도 없이 순순히 귀양길을 떠나는 공주의 행동도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짜고 치는 노름이었을 게다. 눈엣가시 백제를 없애기 위해 신라의 미인계가 시작된 것이라는 얘기다.
신라는 비밀계획을 세워 백제의 여러 인물을 놓고 적합도를 검토했다. 그리고 빼어난 용모와 재주를 지녔음에도 가난에 허덕이며 마를 팔아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는 백제왕의 서자 서동을 미인계의 상대후보로 골랐다.
이어 계획에 따라 잘 훈련된 영리한 소년을 백제로 보냈다. 그 소년은 서동에게 접근하여 마를 사면서 친교를 맺었다.
“여자 친구 있나?”
“나같이 가난한 놈에게 무슨 여자 친구가 있겠나?”
많이 가까워 진 어느 날 신라의 첩자소년이 서동에게 물었다. 이에 서동은 한숨을 내쉬며 신세한탄을 했다.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
소년의 말에 서동의 귀가 번쩍 뜨였다.
“좋은 방법이라니? 나 같은 놈도 연애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렴. 그것도 보통 여인이 아닐세. 잘만하면, 아니 내 말만 들으면 마 낚시로 금잉어를 낚을 수 있네.”
“어서 말해주게. 내 그 은혜는 잊지 않음세.”
서동이 꾐에 걸린 걸 안 소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서동의 귀를 잡아당겼다. 자고로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지 않던가? 소년의 귀엣말을 들으며 서동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입이 벌어지더니 마침내 귀에 걸렸다.
“고마워. 그리하겠네.”
서동은 길 떠날 차비를 꾸렸다. 신라의 최고 미인이자, 공주인 선화를 연인으로 만들 수 있다니, 한시도 미적거릴 수가 없었다.
이런 숨겨진 비화로 서동이 신라에 왔고, 선화공주를 얻을 2단계 작전이 진행되었다. 마(薯) 캐는 모습을 곁들인 경쾌한 마춤(薯Dance)과, 직설적인 합환의 가사가 어우러진 향가 ‘서동요’가 삽시간에 서라벌을 휩쓸었다.
그 뒤 이야기는 다 아는 내용이다. 선화공주는 각본대로 쫓겨났고, 기다렸던 서동이 접근하였다. 선화공주는 못 이기는 척 서동의 여인이 되어 백제로 오게 되었다. 또 백제에서 서동과 가난하게 살 것을 염려한 왕후가 금덩이까지 한 보따리 싸주었으니 서동은 말 그대로 알 먹고 꿩 먹고였다.
그런데 갑자기 웬 금덩어리인가? 여기서 잠깐 쉬어가기로 한다.
그러니까 역사는 반복이라고 오늘날도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명박이가 쥐통직을 물러나 살 집을 만들 매 국고를 슬쩍 도둑질하는 것 역시 도둑적으로 완벽한 정권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작태다. 더하여 전무후무한 한국의 명사기꾼 명가문 아닌가? 상은, 상득 등의 쥐 형제들이 강조하여 말하였다. 그 쥐들 주장에 따르면,
‘보통 우리들은 집안 장롱에 현금 뭉치를 십 수억씩 쌓아놓고 산다.’
그게 상례라 하지 않던가? 그 현금뭉치가 어디서 생긴 것일까? 돈에 발이 달려 그 쥐들 집으로 저절로 걸어왔을까?
오호, 통재라. 내 입이 더러워지니 구질구질 설명을 줄이겠다. 그럴진데 진평왕의 장롱이나 벽장에 황금이 보따리로 있었던 게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라 창고의 물건을 사유물처럼 쓸 수 있는 게 왕이다. 그 나라 창고의 물건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역시 구질구질 설명은 줄이겠다.
이번엔 박근혜의 경우를 보자. 왜왕을 천황이라 칭하며 충성을 다하겠다고 혈서를 쓰고 왜장교가 된 오까모도 미노루(岡本實)는 박정희다. 그 박정희의 또 하나 왜명이 다까끼 마사오(高木正雄)다. 그 박정희가 부일장학회, 영남대학 등을 꿀꺽 삼켰고, 그 장물을 딸인 근혜에게 주었다. 29만원 전두환이는 다까끼 마사오가 피살된 뒤 청와대 금고에 있는 현금을 근혜에게 주었다. 박근혜는 그 장물과 현금으로 과거도, 현재도, 앞으로도, 그리고 그 후손들도 호의호식하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신라에서 쫓겨난 선화공주가 금덩이를 보따리 채 백제로 가져온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진평왕이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써야할 재물을 딸에게 주었고 딸은 거지에 불과한 서동을 백제왕으로까지 신분상승을 시키는 일에 사용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이상할 게 없이 지극히 당연한 일들이다.
그저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아름다운 사랑얘기로만 받아들이며, 그 지고지순한 사랑에 마음을 떨고 아픈 가슴을 쥐어 잡는 역할을 하면 된다.
아니다 그건 아니다.
국경을 넘고, 신분을 넘은 그 사랑에 숨겨진 독배를 보아야 한다. 이 사랑을 계기로 백제는 신라에게 내부의 모순과 정세를 낱낱이 넘겨주었다. 더하여 선화공주의 아들인 의자왕에 이르러 나라를 온전히 신라에게 바쳤다. 선화공주를 이용하여 서동을 끌어들이고, 백제의 내분과 실정을 가속화 시켜 마침내 백제 멸망의 계략을 완성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서동이 마를 주며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던 노래는 어떤 것인가?
원문은 ‘선화공주주은(善化公主主隱) 타밀지가랑치고(他密只嫁良置古) 서동방을(薯童房乙) 야의란을포견거여(夜矣卵乙抱遣去如)’이다.
‘선화공주(善化公主)니믄 남 그스지 얼어두고 맛둥바알 바매 몰 안고가다.’를 좀 더 쉽게 해석해보면 ‘선화 공주님은 남 그윽히 얼어 두고 맛둥방을 밤 몰래 안고 가다.’ 그러니까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 놓고(정을 통해 놓고) 서동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것이다.
이걸 한자 그대로 조금 재미있게 해석해보면 ‘선화공주님은(善化公主主隱) 타인 모르게 지 가랑치고(他密只嫁良置古) 서동방에서(薯童房乙) 밤의 알을(夜矣卵乙) 포겐거여(抱遣去如)’다. 다시 쉽게 풀면 ‘선화공주님이 남 몰래 지 가랑이를 벌리고 서동방에서 밤의 씨에 다릴 포갠 거다.’가 된다.
한자어라고 어려울 게 없다. 물론 위의 해석은 재미를 더하고자한 엉터리 해석일 뿐이다.
어느 시대에도 사랑이 있었고, 사랑 노래가 있었을 거다. 삼국유사에 이런 사랑 노래가 남겨져 그날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음은 천 수백 년 뒤의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사랑을 풍부하게 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헌데 본질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무서운 사랑이다. 슬픈 사랑이기도 하다.
다시 삼국유사에 기록된 그 시대로 가본다. 진평왕은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왕후(王后)는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 터로 가는데 서동이 나타나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몰랐으나 믿고 좋아했다. 서동(마동)의 이름을 알고 서동요의 의미를 알았다. 그렇게 백제로 와서 모후가 준 금을 내어놓으니 서동이 물었다.
“이게 무어요?”
“황금이라 하지요.”
“이런 거라면 내가 마를 파던 곳에 흙처럼 많이 있소.”
공주는 크게 놀랐다.
“이것은 천하의 진귀한 보배라오. 당신의 보물을 부모님(眞平王)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그리하여 그 황금을 신라로 보내게 되었다.
그 일을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신통력으로 해결하였다. 하룻밤 사이에 신라로 보낸 것이다. 이에 서동은 진평왕의 신임을 얻어 왕이 되었다.
무왕(武王)이 된 서동이 하루는 왕비와 함께 사자사에 가던 중 용화산 밑의 큰 못에 이르렀을 때다. 못 가운데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왕비가 무왕에게 간청을 했다.
“이 곳에 큰절을 세웁시다. 제 소원입니다.”
지명법사가 이번에도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평지로 만들었다. 미륵삼존의 상(像)을 세우고 전(展, 佛閣)과 탑(塔)과 묘무(廟廡)를 배치한 뒤 미륵사(彌勒寺)라 하였다. 신라 진평왕은 각종 공인(工人)을 보내어 그 역사를 도와주었다.
자, 다시 생각해보자. 서동이 신라에 보낸 황금이 그냥 단순한 황금일까? 얘기는 황금이라 했지만, 백제의 가장 소중한 정보와 자료, 물자들이 선화공주를 통해 신라로 간 것 아니겠는가?
또 선화공주의 뜻대로 미륵사를 세운 것도 이미 정치권력의 실권이 선화공주, 다시 말해 신라 쪽으로 기울어졌음 아니겠는가?
지명법사의 신통력 얘기는 삼국유사를 쓴 분이 일연 스님이다. 작가의 신분상종교주관적인 기술이 과장됐겠지만, 이 미륵사를 세움에 진평왕이 공인(工人)을 보냈다 함은 또 무엇인가?
신라의 실질적인 내정간섭이고, 백제를 지배할 수 있는 역량과 능력이 있음을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니면 후일 영토합병을 합리화 하고, 이미 두 나라는 그 때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것을 내세워 백제 유민을 달래기 위함인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게 신라는 선화공주를 이용하여 불쌍한 서동을 끌어들인 뒤 백제 멸망의 계략을 착착 진행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선화공주는 서동과 혼인한 것이 아니라, 백제와 결혼한 것이다.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결국 백제는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요즈음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지만 새대갈당이라는 정당이 있다고 한다. 그 당의 두목이 늙은 암탉이라고 한다. 그런 데 뜬금없이는 아니지만 그 늙은 암탉이 국가와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그 늙은 암탉을 무조건 사랑하라고 한다. 사랑하는 늙은 암탉에게 어떤 백성도 돌을 던지면 안 된다고 한다. 왜냐? ‘사랑하니까’다. 참으로 깨춤도 정도껏 춰야 하는데 이건 웬 잡춤인가? 싸이의 말춤(馬Dance)은 세계인을 흥분 시키는데, 이들의 깨춤은 혐오감만 불러일으킨다. 착각은 자유지만 섬뜩하고 역겹기만 하다.
사랑이란 게 어디 한 쪽의 일방통행으로 되는 것인가?
안상수의 자연산까지는 아니어도 된다. 하다못해 재배한 마라도 하나씩 나눠주면서 노래를 부르라 하여야 하는 거 아닌가? 입은 비뚤어져도 촐래는 바로 부르라 했다. 그런데 이 연놈들은 털도 안 뜯고 날것, 비린 것 가리지 않고 무조건 먹으려고만 한다. 국가도 사랑 내세워 통째로 삼키려 든다.
참으로 대단한 식탐이요, 후안무치다. 도대체 부끄러움이나, 낯 뜨거움을 아는 것일까? 무식한 나로서는 이해불가다. 그래서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일 뿐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국가와 결혼했다는 연놈들이 국민의 기본권인 참정권, 그러니까 투표시간을 연장해서 국민의 권리를 신장 시키자고 하는데 그 대응이 적반하장이다. 내 것 주고 뺨 맞는 다는 말이 생긴 이유를 알겠다.
‘투표시간 연장을 하면 돈이 든다. 먹튀법과 함께 제정하자.’
누가 지들보고 돈 내놓으라고 했나? 우리가 낸 세금으로 우리 권리를 찾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먹고 튀는 데 선수인 놈들은 그 연놈들이다.
누구말대로 위의 말을 한 이정현이를 광주 서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게 해줬으면 땅을 치고 통곡했을 거다. 원래 시정잡배들은 막가파다. 먹을 것이라면 구린 냄새가 나건 말건, 일단 먹고 보자는 종자들이다. 그래서 앞으로 또 이젓년인가 이젖년인가는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다시 나설 것이다.
아무튼 그 인간이 그렇게 큰 소리 땅땅 치며 핏대를 세워 큰소리를 쳤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하자니까 오리발을 내민다. 박근혜까지 나서서 돈이 드네 어쩌네 하면서 논의 해보자고 한 거지, 하자고 한 것이 아니란다. 오호라! 통제라. 결국 우리가 그 연놈들 말을 오해 한 것이다. 명박표 오해대국에서 그저 말귀를 못 알아먹는 우리 무식한 백성의 잘못일 뿐이다.
그렇게 국민을 우습게 아는 연놈들이다. 거기까지는 또 그 종자들의 특성상 그러든지 말든지다. 지금까지도 그 어떤 기대를 하지 않은 연놈들의 작태였으니 말이다.
중요한 건 그 연놈들이 내세우는 사랑이다. 아니 누가 언제 그 새대갈당의 연놈들을 사랑한다고 했나? 한때 성누리당이란 명칭처럼 지 연놈들끼리 연병을 하든 연설을 하든 알 게 뭔가?
그런데 뜬금없이 우리에게 웬 사랑을 하란 말인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는 거다.
아! 이제 사랑도 맘대로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 연놈들이 사랑을 하자고 하면 우린 꼼짝없이 두 팔, 두 다리 벌려 사랑에 응해줘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결코 돌멩이도 던져선 안 된다. 혹시라도 던지고 싶으면 내 대갈통을 향해 던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제 사랑도 내 의지대로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 새대갈당 늙은 여우 황우여가 ‘사랑하는 근혜에게 누가 돌멩이를 던질 건가? 영국은 엘리자베스여왕에게 그 누구도 돌멩이를 던지지 않더라’며 여우 눈을 부라린다. 그러니까 근혜가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동급이라는 거다. 그러니 사랑하라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근혜가 사랑을 하자고 하면 해야 한다. 거저 주는 공짜라도 싫은데 사랑을 하자면 해야 하는 거다. 그 늙은 누렁 여우 딸랑이 황우연가, 황여우의 추접스런 사랑론에 2012년을 채 두 달도 안 남긴 이 늦가을에 마음이 더 춥다. 깊숙이 찬바람이 휘잉 돈다.
아! 그렇다면 이렇게 층층이, 켜켜이 쌓인 익산의 사랑 이야기를 허망하게 마쳐야 하는가?
백제와 신라가 적대국이었으나, 국가를 벗겨버리면 서동과 선화는 자연인이다. 지아비 지어미로써 사랑을 나누고 자식을 나아 대를 잇는 평범한 이 땅의 우리들 아버지요, 어머니다.
사랑은 그 사랑 자체로 족하다. 거기에 국가가 들어가고 국민이 들어가면 추해진다.
국가와 결혼했다. 국민을 사랑한다.
참으로 결혼 모독이고 사랑 모독이다.
함부로 사랑을 말하지 말고 내세우지 말라. 그래서 오늘은, 여기서는 서동과 선화를 자연인으로 만들어 사랑을 말하고 싶다.
두 사람의 사랑 얘기 ‘서동요’는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향가 14수 중의 하나다. 내막이야 어떻든 신라 사람들은 공주 신분의 선화가, 적국의 사내를 사랑한 운명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선화의 사랑을 칭송하고 불운한 서동의 행운으로 대리만족을 했던 것이다.
더하여 사랑으로 하여금 평화와 안식을 찾고자 했다. 덧붙여진 황금 얘기는 부귀와 풍요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의 표현이었고, 미륵사 창건은 후세, 후대의 안녕과 번영의 바람이었다.
전쟁의 참혹함, 왕과 귀족의 폭정에 시달리며 살아야했던 신라와 백제의 백성들이었다. 선화와 서동의 사랑은 그래서 평화와 안식, 부귀와 풍요, 후대의 안녕과 번영을 염원하는 당시 백성들의 꿈의 반영이었다.
그래서 익산의 사랑 얘기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마(薯)가 되겠소이다. 당신이 배고플 때 날 원하면 기꺼이 먹거리가 되겠소.”
선거 때만 되면 국밥을 먹는다. 자신의 비리 의혹이 터지면, 시장에 나간다. 누가 왜놈종자 아니랄까봐 어구적어구적 오뎅(어묵) 국물 퍼먹으며 서민 흉내를 낸다. 민초들의 시선을 돌리고 지 잘못을 은폐하려는 얄팍한 잔꾀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속지 않는다.
추접스럽고 창피한 줄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명박에게 하는 말이다. 도둑적으로 완벽한 명 사기꾼 가문과 그들의 딸랑이들인 박근혜와 그 일당들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 민초들은 네 연놈들의 마가 아니다.
바로 국가와 국민을 내세우는 네 연놈들이 한 번 민초들의 마가 되어봐라. 민초들의 마가 되기 싫거든, 국가와 결혼하지도 말고 국민을 사랑하지도 말라.
익산의 사랑은 바로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임을 생각한다.
그 늦가을 사랑 얘기로 마음의 모닥불을 지피며, 익산의 보석 박물관을 둘러보고, 선화공주의 얘기가 남은 미륵사터를 들린다.
다시 흰구름 나그네는 호남가 따라 길을 떠난다. 백리 담양을 흐르는 물은 구비구비 만경인데…. 담양을 들려 만경으로 간다.
<익산 미륵사>
<서동과 선화공주>
<뉴시스에 실린 박근혜 사진. 황우여가 우리보고 사랑하라고 하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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