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25-2
산들은 높이 솟아 구름 위에 떠있고(萬丈 雲峰),
병풍같이 두른 층층(層層) 산은 겹겹(益山)이 쌓여 있네.
<이 양반 보고 싶다. 진중권, 조국 씨 등 덕분에 반 속풀이는 하지만.>
구름 위 고을 운봉!
마지막으로 이 역사의 현실을 되살려 보지 않을 수 없다. 걸핏하면 뒷날 역사에 맡기자고 하는 후안무치한 쥐를 품은 달구새끼도 있지만, 역사는 맡기는 게 아니라, 언제든 옆에다 두고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荒山大捷)에 관한 역사다.
남원에서 인월 방면 24번 국도를 타고 운봉읍을 지나면 화수리 비전마을 들머리에 황산대첩비 표지석이 있다. 그리고 운봉의 젖줄인 람천 건너 황산대첩비가 있다.
1380년 8월경 왜구가 진포(鎭浦 금강 하구)에 500여 척의 함선(艦船)을 이끌고 와서 전라, 충청, 경상도에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고려는 화통(火筒)과 화포(火砲)로 맞섰다. 새로운 화약 제조법을 완성한 최무선(崔茂宣)이 부원수로 출전, 왜선을 모두 불태웠다. 그러자 돌아갈 길이 없는 왜구들은 개경까지 진격할 것이라고 발악하듯 위협하며 전라, 경상 양도에서 노략질을 했다. 이윽고 사근내역(沙斤乃驛 함양)을 약탈하고 황산으로 모였을 때다.
토벌장군 이성계가 남원에서 패장 배극렴(裵克廉)의 멋쩍은 영접을 받으며 합류한 뒤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에 이르러 적과 마주쳤다. 왜구의 진은 산이었고 이성계 군은 평지여서 어려운 싸움이었다. 세 번이나 왜구의 기세에 밀려 퇴각을 해야 했다.
여러 장수들은 반쯤은 두렵고 반쯤은 시간을 벌고자,
“적들이 험준한 요새에 의지하고 있으니 그들이 나올 때를 기다렸다가 전투를 합시다”
이성계에게 건의하였다.
하지만 이성계는,
“군사들의 적개심이 충천하거늘 적을 보고서 공격하지 않는 것이 옳은가?”
하고 꾸짖으며 백병전을 이끌었다. 스스로 선봉이 되어 맨 앞에서 나아갔는데, 황산의 정산봉에 다다르니 왜구가 갑자기 튀어 나왔다.
이성계는 기다린 듯 가까이 있는 왜구에게는 대우전을 쏘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왜구에게는 유엽전을 날렸다.
번개 같은 빠르기로 모두가 다 백발백중이다. 활시위 소리 하나에 왜구의 시체가 하나였다.
싸움터가 진흙 벌이어서 모두가 진흙탕 범벅이 되었다. 한동안 그렇게 진흙탕 속의 혈투를 치르고 군사들을 점검하니 죽은 자는 모두 적이고, 아군은 한사람도 부상하지 않았다.
이에 왜구는 기가 꺾여 산에 웅거하고 나오지 않았다.
한숨 돌린 이성계는 지형을 살펴 군사를 배치한 뒤 다시 이대중 등 10여 인을 이끌고 왜구 토벌에 나섰다. 궁지에 몰린 왜구도 더 이상 밀릴 자리가 없자, 고양이에게 달려드는 쥐새끼처럼 사력을 다해 돌진해 왔다.
“말고삐를 단단히 잡아 말이 넘어지지 않도록 하라.”
이성계는 기다렸다는 듯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소라를 힘껏 불어 총 공격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용기백배하여 개미떼처럼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이때다.
두목 급으로 보이는 왜구 하나가 창을 뽑아들고 이성계 뒤로 재빠르게 다가섰다. 일촉즉발, 지켜보던 이두란이 황급히 말을 달려오면서 외쳤다.
“장군은 뒤를 보시오.”
하지만 이성계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이다. 이두란의 화살이 왜구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 순간 이번엔 날아 온 왜구의 화살이 이성계의 왼쪽다리에 꽂혔다. 다시 찾아온 위기, 그러나 이성계는 괘념치 않고 더욱 사납게 나아갔다. 전투 또한 급박하여 아무도 이성계가 화살에 부상을 입은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성계를 겨냥해 화살을 쏜 왜구들은 때는 이때다 하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화살에 맞은 이성계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가소롭구나. 얼마든지 덤벼라.”
허나 왜구들은 맞수가 되지 못했다. 이성계는 달려드는 왜구들을 선 자리에서 여덟 사람이나 베어버렸다. 그러자 누구도 감히 앞에 나서지 못하였다.
온 몸에 왜구의 피를 뒤집어 쓴 이성계는 칼을 높이 들어 해를 가리키며 말했다.
“왜구들은 허수아비다. 병사들은 두려워 말라. 겁이 나면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겠다.”
병사들은 장군의 솔선수범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용기백배하였다.
하지만 왜구도 만만치 않았다. 왜구의 장수 하나로 겨우 십 오륙 세 되는 자가 있었다. 온 몸을 갑옷으로 감싼 그는 용감하고 무술이 빼어났다. 그가 향하는 곳마다 고려병사들이 낙엽 떨어지듯 무너졌다.
“저 어린 소년 장수가 누구냐?”
“아지발도입니다.”
“저 장수를 사로잡도록 하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이 상할 것입니다.”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용감하고 날쌤을 아껴서 생포하도록 명하자 이두란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면 아쉽지만 죽이도록 하자.”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 꼭지를 맞추었다. 투구가 땅에 떨어지며 아지발도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두란의 화살이 아지발도의 벌어진 입으로 들어갔다. 온몸을 갑옷으로 감싸 화살이 효과가 없었던 아지발도가 마침내 쓰러졌다. 왜구의 기세는 완전히 꺾였다.
“돌격!”
고려군이 총공격을 감행하니, 아침에 시작한 전투는 저녁 무렵에 막을 내렸다. 겨우 70여명의 왜구가 지리산 깊숙이 도망을 쳤고, 하천은 일주일 넘게 핏물이 흘러 마시지 못했다 한다. 바로 오늘의 우리가 말하는 1600여 마리의 말과 무기 등을 노획한 황산대첩이 바로 그 전투다.
<태조 어진. 비나이다. 아래 인간 좀 혼내주세요.>
<눈깔 조심혀라. 요즈음은 벙커 안 가나? 궁금하다>
지금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황산대첩비는 1977년 새로 복원한 것이다. 원 비는 1577년(선조 10년)에는 전라도 관찰사였던 박계현의 건의로 세워진 것으로 일제강점기 제 2의 왜구들이 무참히 깨어버린 걸 모아 파비각(破碑閣)에 보관하고 있다.
또 이성계가 후일 이곳을 들려 황산대첩이 자신만의 공로가 아니라 여러 충신들의 공로임을 알리기 위해 바위에 그 이름을 새겼는데, 이 글씨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비각(碑閣)이 어휘각(御諱閣)이다.
<새전북 만평 정윤성 화백>
<야! 밑에 있는 놈! 국기 바로 들어>
<야! 이놈아 위에서 보면 빨간 게 위쪽이잖아.>
이때의 역사가 담긴 지명이 지금도 이곳 운봉에 남아있다고 한다..
운봉에서 인월로 가는 길목의 남천변에 있는 피바위는 당시 왜구들이 흘린 피로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하여 붙여졌다 한다.
또 ‘인월’의 지명은 날이 저물어 도망가는 왜구를 쫓아 달을 당겨놓고 밤늦게까지 싸워 전멸시킨 것에서 유래했고, ‘인풍’은 이성계가 바람을 몰고 다니며 싸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황산 부근의 토성이 있던 곳은, 당시 군대가 주둔하며 말을 매어 놓은 곳이라 하여 ‘군마동’이 되었다 한다.
<피바위>
모두가 다 민초들의 염원과 바람이 담긴 땅 이름 아니겠는가?
아직도 군주, 군국, 식민, 사대주의의 미몽에 빠져있는 외세와 기득권의 딸랑이들이 있다. 딸랑이들의 가운데 다리를 붙들고 꼭두각시의 완장을 차고 있는 위정자들이 있다. 그들부터 대오각성을 해야 한다. 땅 이름에 새겨진 의미를 옛 이야기로만 치부하지 말아야 한다.
오죽하면 달을 당겨놓고, 바람을 몰고 다녀서라도 외적을 물리쳤으면 하는 염원을 땅에 새겼을까?
태극기도 거꾸로, 총구의 가늠쇠도 모르는 인간 아니던가? 창피한 줄을 아는지, 모르는지, 걸핏하면 군복입고 지하 벙커로 들어가던 쥐박이다. 국민 세금으로 노후보장, 살림집 지을 땅을 사는 추접스런 놈이다.
더하여 아비가 장물로 넘겨준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면서 국민에게 걸핏하면 빨갱이를 들이대는 닭무리들은 또 어떤가? 원래 닭이나 꿩 종류는 다급하면 풀숲에 고개만 처박고 ‘나 없지!’하고 엉덩이춤을 추는 종류다. 이번에야말로 민초들은 두 눈 부릅뜨고 정신 차려야 한다. 그 닭무리들이 풀숲에 고개 쳐 박고 엉덩일 흔들 때 냅다 한 가운데에 정확하게 발침을 줘야한다.
또 있다. 이익이 있을 때는 고개 쳐들고 으스대고, 불리하면 재빨리 숨는 두더지형 인간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유인분촌, 김재처리, 이상썩은 등의 교활한 도피행태가 바로 이 땅의 현실이다. 아직도 왜구 같은 그런 인간들이 설치는 걸 보면서 오년 전에 먹은 과메기가 기어 나오려 한다는 민초들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더 이상 땅 이름으로나 한을 풀지 말고 행동과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바로 그 날이 2012년 12월 19일이다.
<람천>
<황산대첩비지>
일본은 우리와 가까우며 먼 나라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일본의 한국침략의 횟수를 살펴본다.
삼국사기의 왜구침략이 20여회다. 고려사의 왜구침략은 무려 515회에 이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78회이다. 일제의 36년 강점기를 또 1회로 했을 때 총 714회의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누락된 기록이 있을 거여서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특히 고려 공민왕 재위 23년간(1352-1374)에 115회, 우왕 14년간(375-1388 )에 378회나 집중적으로 침략을 했다. 이는 당시 일본 남북조 쟁란으로 서부일본지역의 군사들이 해적이 된 탓이지만, 무엇보다도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왕조의 책임이 크다. 또 일차적이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사기꾼 정권인 쥐박이와 쥐품닭들의 말도 안 되는 사기와 기만으로 우리 민중은 고초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에도 ‘새누리당은 잘못한 일이 있을 때마다 국민 앞에 무릎 꿇고 깨끗하게 반성하며 오늘까지 왔다’고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국민에게 큰 소릴 쳤다.
이에 어떤 네티즌이 댓글을 달았다.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우기고 반성했느냐?
친구 핑계대고 공갈 협박을 한 정준길이 반성했느냐?
제수씨 성폭행을 한 김형태가 반성했느냐?
대놓고 표절한 문대성이가 반성했느냐?
뇌물을 먹은 홍사덕이가 반성했느냐?
박근혜 대통령 시키자고 기업가한테 삥땅을 뜯은 송영선이가 반성했느냐?
언제 네가 국민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며 반성했느냐?
참말로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고, 개 풀 뜯는 소릴 하고 있어서 소가 다 웃을 일이다.
또 있다.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위원회’의 진상규명보고서는 ‘백선엽은 만주국군 장교로 침략전쟁에 협력했고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한 간도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한마디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을 한 것이다.
그런데도 몰지각한 친일무리들은 백선엽을 대단한 군인으로 칭송하고 있고, 그를 기리는 뮤지컬에 국방예산까지 지원하려 한다.
참으로 미친 나라이고, 미친 국방부다.
북한 잠수함이 귀신같이 다가와 어뢰를 발사해 천암함이 두 동강이 난 게 무슨 자랑일까? 믿지 않으면 빨갱이라고 어거지를 쓰며 눈 부라리는 것도 모자라, 경계에 실패한 군인들에게 훈장을 주는 파렴치한 종자들이다. 북한 귀순병이 노크 할 때까지 모르고 거짓 보고까지 한 뒤에도 적당히 넘어가는 시드기 들이다.
<태조의 사랑이 새겨진 어휘각>
<일제의 만행>
<경향 만평>
에라이! 똥물에 튀길 잡것들이다. 아니다 아지발도 같은 왜구의 장수가 다시 왔으면 한다. 마치 암행어사 출두처럼 소리 한 번 질렀으면 한다.
“아지발도 출두야!”
그러면 오줌 재리고 쌩 똥 싸며 비행기 타고 미국으로, 스위스로 도망칠 인간들이다. 비행기에서 악취 고약하겠지만, 쓰레기 처리도 비행기 속도에 비례할 것이다.
그때 우리가 이성계처럼 나서는 거다. 아깝지만 우리도 아지발도를 죽여야겠지. 쥐닭 무리는 도망쳤고, 아지발도도 없애는 일이니 일거양득이다. 아니다. 우리들 평화와 행복이 보장되는 일이니 일거삼득이 되는 일이다.
그렇게 모두들 댕강댕강 쓸어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다.
그렇게 현재는 쓰레기들이 득세하고 큰 소리 치는 나라다. 쓰레기들이 되레 빗자루에게 충성을 하라 하고, 정의를 세우라하고, 역사가 무서운 줄 알라고 큰소리치니 실소해야 하나, 분노해야 하나?
운봉 고을을 떠나며 쥐닭 무리들의 행태에 다시 한 번 개탄을 금치 못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우리 민중들이 고초, 고통을 겪고, 희생을 치러야 할까?
<구름위 고을 운봉>
구름 위 고을 운봉!
신선이 살 고을이다. 하지만 아직 세상의 어둠이 깊고, 민초들의 한숨은 높다. 그래도 두 눈 부릅뜨고, 두 주먹도 불끈 쥐고 쥐와 쥐를 품은 닭 무리 쓰레기를 치우자. 만장 운봉이 높이 솟아 층층한 익산으로 향하며 그림 같은 운봉 풍경에 평화와 희망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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