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24-2
온 세상 아우르고 덮어주는 나주(羅州) 풍경은 하늘이 내린 비단이려니
나주는 호남의 중심 고을이다. 전라도라는 지명이 전주와 나주가 합쳐져서 되었다 하니 나주는 호남의 남쪽을 대표하고 전주는 북쪽을 대표하는 도시라 할 수 있다.
전라도라는 말이 동서남북 온 세상 모두를 아우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분이 있다. 전라도의 전(全)자가 온전할 전자이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주(羅州)는 비단 고을이니 온 세상을 아우르고 덮어주는 비단자락인 셈이다.
<나주 국제 농업박람회장에서 바라본 나주들판과 금성산 줄기, 한 마리 용이 꿈틀대는 듯>
나주는 삼한시대에 마한의 54개국 중 불미국으로 추정되며, 백제시대에는 발라, 통의라 칭하였다.
신라에 이르러 금성군(일명 금산)이라 칭하다가 903년(효공왕 7)에 나주라 개칭 되었고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의 영지였다.
고려에 들어서 983년(성종 2) 전국 12목(牧) 중의 하나로 나주목이 설치되었으며 995년(성종 14)에 이르러 병마절도사를 두어 군대의 칭호를 진해군(鎭海軍)이라 하였다.
1011년(현종 2) 거란의 침입으로 잠시 피난왕도가 되었으며(1011년 1월 13일~1월31일까지) 1018년 전국8목 중 하나로 나주목이 되어 1895년까지 계속되었다.
고종 32년(1895년) 5월 갑오경장 후 나주군수(羅州郡守)를 두고 나주관찰부(羅州觀察部)를 설치하였다.
1981년 7월 1일 나주읍, 영산포읍이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다.
1986년 금성시를 나주시로 변경했고, 1995년 1월 1일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 나주목 고을의 상징 남고문>
대원군이 나주를 평하여 결불여나주(結不如羅州)라고 했다 한다. 경지 면적 넓기는 나주만한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런 해석도 할 수 있다. 경지가 넓으니 수확량도 많았다. 따라서 관아에서 거둬들이는 세금도 많았을 거고, 비리나 수탈도 함께 정비례했을 거다.
아리따운 기생들이 득실대는 평양감사를 선호하듯 세금을 거둬 치부하기 좋은 곳인 나주 목사도 벼슬아치들이 침 흘리는 1순위 자리였을 거다. 땅이 넓고 기름지어 산물이 풍족한 만큼 비리나 부정을 저지르는 탐관오리가 많았다는 얘기다. 또 그런 개차반일수록 선정비나 공덕비를 세우기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명박이가 독도에 기념비 세우듯 말이다. 똥물로 썩어가는 4대강 공사를 녹색성장이라고 자랑하는 후안무치를 저지르면서도 입에 침도 안 바르듯 말이다.
하지만 세수(稅收) 도적(盜賊) 탐관오리(貪官汚吏) 많은 게 어디 고을민의 잘못인가?
어디서나, 어디에나, 시대불문, 장소불문으로 못된 탐관오리가 있기 마련이다. 이를 고장의 부끄러움으로만 여기지 말고 후대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다.
나주는 총면적 608.15㎢ 로 영산강이 금성산을 만나 휘돌며 시가지를 나주와 영산포로 나누어 다리로 건너다니게 했다. 동쪽으로 화순군, 서쪽으로 함평군과 무안군, 남쪽으로 영암군, 북쪽으로 광주광역시와 경계를 둔 인근 10개시군의 관문이며 중심지다.
과거에 영산강에 범선이 뜰 때는 굽이굽이 돛배를 타고 영산포와 산포를 지나 광주의 코앞인 남평까지 배가 올라왔으리라 여겨진다. 실제로 산포라는 지명에 포구를 뜻하는 포(浦)자가 있고 그곳에 배매산이 있다. 배를 매어 놓은 산이라는 뜻이다.
영산강은 드넓은 나주평야를 만들어 남평, 금천, 다시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이 풍부하여 남쪽 호남 곡창의 상징이다. 우뚝 솟아 나주평야를 그림처럼 내려다보는 시의 진산인 금성산(451m)의 산형이 서울 삼각산과 같다 해서 나주를 소경이라고도 불렀다.
금성산은 광주광역시가 있는 서북쪽에서 17Km여를 남쪽으로 길쭉하게 달려와 영산강을 만난다. 마치 한 마리 용이 들판 위를 나는 형상이다. 꼬리가 광주광역시 광산구 쪽이라면 머리는 금성산이요, 입은 영산포 삼거리 뒷산이다. 그리고 왕건의 둘째 부인 장화황후가 태어난 흑룡동 뒷산이 여의주다. 이렇듯 금성산이 한 마리의 커다란 흑룡인만큼 산의 오른 쪽에 사격장을 두어 불을 뿜게 했고, 왼쪽에는 실내 자전거 경기장을 두어 빙글빙글 바람을 일으키게 했다. 용에 대한 대접이 이 정도면 성의가 있는 편이다.
<버들낭자 장화황후와 왕건. 나주 시청 들머리 완사천 유적지 조형물>
흑룡 여의주의 정기를 받아 아리땁고 현명한 장화황후를 낳게 하여 고려의 개국에 공헌했듯 나주는 빼어난 인물의 고장이다. 굳이 조상이나 인물 자랑이라면 도토리 키 재기이리라.
장군이라면 고려만 정지 장군, 임진왜란 의병장 김천일 선생과 나대용 장군이 그 중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학자라면 신라 때의 남평 출신 문다성(文多省) 선생이 제 일 순위다. 이분은 나중에 남평을 둘러볼 때 따로 만나 뵐 생각이다. 호남가에 나주와 따로 남평의 지명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 수많은 학자가 있지만 한글창제의 일등 공신이며 조선 최고의 석학인 신숙주 선생과 풍운아 임제 선생이 손에 꼽힌다.
무엇보다도 나주인만의 자랑이 아닌 우리 민족의 긍지로 승화된 광주학생독립운동 진원지가 바로 또 이곳이다.
장화황후 오씨는 고려 말 나주 흑룡동에서 영산강 상권을 쥐고 흔들던 대부호이자 상인인 오다련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나주는 지금의 목포와 같은 큰 항구를 가진 고을이었다. 이곳에서 태어난 오 황후는 급히 말을 타고 온 왕건에게 버들잎을 띠운 물을 건네 천천히 마시게 했던 버들낭자로 알려진 현명한 여인이다. 더하여 공산성 전투 때는 견훤 군사의 새벽급습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왕건을 박달 방망이를 휘둘러 구해낸 당찬 여인이기도 하다.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역사를 썼듯 한국의 역사를 쓴 분이다.
<신숙주 선생이 공부한 쌍계정>
<선생의 생가 입구>
<선생의 생가>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1417~1475) 선생은 조선 초기 세종대왕과 함께 한글을 창제하여 오늘 날 우리의 말글 생활이 있게 하고 새 국가의 문물 정비에 큰 공헌을 한 분이다.
나주 금안동은 신숙주 선생의 외가 마을이다. 선생은 외가 마을에서 5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모친의 고조부는 고려말 학자이며 중국에서 한림학사까지 지낸 정치가 문정공(文靖公) 정가신(鄭可臣 1244~1298) 선생이다. 이 금안동(金鞍洞)은 처음에는 새들의 낙원이라는 금안동(禽安洞)이었다 한다. 그런데 정가신이 원의 세조 쿠빌라이에게 금혁(金革), 백마(白馬), 옥대(玉帶)를 받아 그 백마에 금안장(金鞍裝)을 두르고 옥대를 찬 모습으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한 뒤부터 금안동(金鞍洞)이라 했다 한다. 또 오룡동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신숙주 선생의 5형제(孟舟, 仲舟, 松舟, 末舟)가 모두 훌륭한 인물이 되었기에 그리 부른다고 한다.
또 여담이지만 신숙주 선생의 부친인 신장(申檣, 1382~1433)이 워낙 술을 좋아해 술주(酒)자와 음이 같은 주(舟)자로 5형제의 이름을 지었다는 말도 있다. 친구인 문인 허조가 ‘어진 사람을 오직 술이 헤쳤다’고 말하듯 그의 능력을 아낀 세종이 절주를 당부했건만, 과음은 결국 그의 사인(死因 세종 15년 2월 8일)이 되었다. 그러니까 신숙주는 16세 때 아버지를 여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신숙주 선생은 세종대왕에게 발탁된 집현전 8학사 중 한 사람으로 훈민정음의 창제와 발전, 보급에 절대적인 인물이었다. ‘동국정운(東國正韻)’ ‘사성통고 (四聲通攷)’ 등 운서 편찬에 주도적으로 활약했고 국가의 기본질서를 적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교정, 간행한 것을 비롯, ‘세조실록’, ‘예종실록’, ‘동국통감’, ‘국조보감(國朝寶鑑)’, ‘영모록(永募錄)’ 등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1452년(문종 2년)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수행하면서 그와 깊은 유대를 맺어 세조의 즉위과정에 참여했고, 영의정을 지내며 조선 초기 왕조의 기둥 역할을 했다.
<호남의 명촌 금안리 안내도>
<금안리 들머리>
<좋은 후손 얻고 싶거든 이 마을에 들려보시라. 100% 성공>
기말리라고도 부르는 이 노안 금안리는 정읍의 태인, 영암의 구림과 함께 조선시대 호남 3대 명촌 중 하나라고 한다. 그 흔적으로 12개의 자연마을에 서원, 정자, 재실이 20여개나 있고 효자비 등 비석 100여개, 고인돌 56기가 널려 있다. 지금도 풍수가들이 한결같이 ‘금성산에는 전국에 손꼽히는 명당이 있다’고 하며 이 고장 사람들은 ‘일 금안(金鞍)이요, 이 회진(會津 임제의 고향 마을)’이라 하면서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렇듯 금안리에 가면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 34호인 쌍계정(雙溪亭)과 설재 정가신을 배향하기 위해 1688년(숙종14)에 세운 설재서원, 고려시대 명장 정지(鄭地1347-1391)장군의 사당인 경렬사, 사암(思庵) 박순(朴淳1523-1589)을 흠모하여 1659년(효종10년)에 세운 월정서원 등 수많은 유적과 유물을 만날 수 있다. 마음이 혼란할 때 찾아서 선열의 깊고 숭고한 뜻을 배울 수 있었으면 한다.
또 이 마을에도 아침 안개의 고을 둘러 있는 영암 구림 마을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의 대동계가 있다. 지난번에 영암의 대동계는 잠깐 언급을 했다.
그곳 구림마을의 대동계는 1565년 조선 명종 때 시작됐다. 구림마을 노거수가 깊은 그늘을 드리우는 곳에 대동계의 집회소인 회사정이 있었다.
잠깐 어사 박문수의 일화를 소개해본다.
박문수가 거지꼴로 찾아와 대뜸 회사정에 올라와 손님 대접을 요구하자 계원들이 그를 무력으로 쫓아냈다. 실랑이 중에 마패가 떨어졌고, 크게 놀란 주민들이 반성과 사죄의 뜻으로 어사가 앉았던 자리의 마루 조각을 떼어냈다고 한다.
그렇게 대동계는 자체 규율에 따라 불효한 자, 연장자에 능욕한 자, 패악무도한 자, 풍기문란한 자들을 멍석말이하고, 심하면 동네에서 내치는 벌을 주었다. 지금도 구림 마을의 회사정 앞에는 매를 치던 곤장터가 있어 당시의 대동계가 단순하게 마을의 화합과 단결만을 위하는 조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인간 같지 않은 인간이 있으면, 그 인간이 죽었다고 방을 내고, 실제처럼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혹여 그 인간을 길에서 만나도 모른 척 했다고 한다. 하긴 귀신을 어찌 산 사람이 알아본단 말인가?
오늘날도 살아있어도 죽은 인간들이 많다. 그 중에 몇 사람을 들라하면 얼른 김재철, 현병철 등 철없는 개차반부터 손가락을 꼽아 이정희, 이석기, 문대성, 김형태, 아이고 명박이까지 이르러야 하지만 숨넘어가니 그만 세겠다. 정말 질긴 인간들, 추접스러움의 표본들이다.
아무튼 금안동의 대동계도 임진왜란 직후에 생겼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마을을 다시 일으켜 세우자며 금안동 4개 성씨가 주축이 돼 계를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음력 4월 20일이면 정가신 선생이 세운 쌍계정에서 계원들이 모여 대동계를 잇고 있다 한다. 대동계의 숭고한 정신과 맥을 잇는 그들 모두에게 무한한 영광과 영원한 번영 있으리라 믿는다.
이렇듯 마을 사람들의 화목을 도모하고 협동의 원동력이 되는 대동계의 역사야 말로 세상에 내세울 수 있는 가치고 자랑이다. 온 세상에 이 마을이 명촌 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나 중요한 때가 아닐 때가 있었을까만 2012년 12월 19일 한국의 미래가 좌우되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중요한 때다. 쥐나 개나 날뛰는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때에 민족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분들을 만나보는 것도 삶의 큰 지침이라는 생각으로 노안면 금안리의 쌍계사에 들린다.
정가신 선생이 원나라에서 이곳 고향 마을을 그리던 목소리가 들린다.
‘해동 남쪽 금성산 아래, 초가 몇 칸이 우리 집이라네. 골목의 버들과 동산의 복숭아는 내가 심었나니, 봄바람에 주인 오기를 응당 고대하고 있을 게야.’
어린 시절의 신숙주도 만나본다.
그의 생가 터에 기대어 눈을 감으니 영특하고 사리에 밝아 부모와 이웃은 물론 보는 이들의 칭송을 한 몸에 안았을 어린 신숙주의 낭랑한 글 읽은 목소리가 금세라도 들려오는 듯했다.
이 신숙주 선생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신의 절친한 친구 성삼문이 절의의 상징으로 이름을 남긴 것과 달리 변절자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녹두나물을 숙주나물이라고 할 만큼 변절자의 낙인이 찍혔다.
하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웃기는 소리일 뿐이다. 신숙주 선생이 처음부터 악인이 된 건 아니다. 그의 사후 2백여 년이 흐른 17세기에 이르러 조청(조선과 청나라) 전쟁 뒤, 명(明)나라에 대해 절의(節義)를 지켜야 한다는 풍조가 확산 되면서 성상문은 의리의 상징이 되었고, 신숙주는 그 반대가 된 것이다. 일테면 만들어진 영웅과 악당의 도식화인 것이다.
또 친일파인 춘원 이광수도 한 몫을 했다. 아무리 소설이래도 그렇지, 흥미본위로 고증도 없이 맘 꼴린 대로 쓴 소설 ‘단종애사’가 그것이다. 그가 눈물 나게 묘사한 신숙주 부인이 사육신이 처형되는 날 죽지 않고 퇴근하는 남편을 보고 목을 매 죽었다는 것도 가짜다. 이미 5개월 전에 죽은 부인이 또 어찌 살아나서 다시 죽는단 말인가?
춘원 이광수를 비롯하여 말당 서정주, 모윤숙 등 그들은 그렇게 교묘하고 교활하게 글로 민족을 현혹하여 민족정기를 더럽힌 친일파일 뿐이다.
이제 신숙주 선생의 명예는 복권되고 복원되어야 한다. 성삼문도 훌륭했으면 신숙주도 똑 같이 훌륭한 것이다.
세종대왕과 문종, 단종, 세조로 이어지는 왕조의 관습과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한 마디 더 비유해 보겠다.
일군 장교로 독립군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독재정치로 정적을 학살한 박정희를 찬양하고, 그의 딸에게 대이어 충성하란 말인가? 그 친일파들의 후예 쥐닭무리에게 대이어 충성하면 성삼문이요, 정치를 바로 세우려면 신숙주란 말인가?
관점이 다르면 논리도 달라지겠기에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신숙주 선생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으면 한다. 그리고 위정자들의 입맛에 따라 역사를 바꾸려는 것도 경계해야 하겠다.
<임제 선생 묘소>
<묘소에서 바라본 풍경>
<나주에서 목포 가는 길, 가운리 삼거리에서 금방이다>
이어 회진 마을의 백호 임제 선생을 찾아뵌다. 한마디로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 선생은 조선의 천재문학가다. 8대조가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인 탁(卓)이다. 이때부터 그의 집안은 나주 다시면 회진에서 은거했다. 그의 증조부 대에 벼슬길에 다시 나갔고 부친인 병마절도사 진(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임제와 5형제는 모두 당대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임제는 경주 김씨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는데 그의 셋째 딸이 낳은 외손이 바로 훗날 남인의 영수가 되며 우암 송시열과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유명한 미수 허목(許穆)이다. 예송논쟁은 당시 왕실에서 상복을 입는 기간을 문제로 하여 일어난 학문적 논쟁으로, 각 당파간의 정치적인 다툼이었다. 1차 논쟁은 송시열의 서인이, 2차 논쟁은 미수 허목의 남인이 이겼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고문을 줄줄 외우고 성격도 호탕하여 촉망받는 신동이었다. 그의 사상은 민중중심, 자주독립이었고 그의 소설은 허균과 더불어 조선중기에 쌍벽을 이루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3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임제의 고향 회진마을에는 기념비와 사당, 영모정(永慕亭)이 있고, 그가 어린시절 오르내리며 학문과 시심을 닦았던 신걸산이 있다. 신걸산에는 백제 의자왕 4년(654)에 세워진 복암사가 있고 그의 묘소도 있다. 또 이곳은 광주 목포간 큰 도로가 지나는 가운리 삼거리여서 달리는 차창 너머로도 잠시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지금도 맛집이 있지만, 영산강이 한 바탕 휘돌아 가는 구진포는 예전에 민물장어로 유명한 곳이다. 들린 김에 영산포에서 구진포 가는 옛 길에 있는 선생의 외손 미수 허목 선생의 미천서원도 들려본다.
미천 서원을 나와 잠깐 쉬었다 가기로 하자. 오라는 곳도, 가라는 곳도 없는 나그네 길 뉘라 바쁠 손가?
미천서원에서 영산포쪽으로 가는 옛길을 따라 가면 전남면허시험장이 나오고 그 삼거리 길가에 나합의 도내기샘이 있다.
나합은 구한말 세도가 김좌근의 첩으로 세도정치판에서 권세를 부린 여인으로 많은 야화를 남겼다. 나합은 도내기샘 앞 동네인 영산포 삼영동에서 태어났고 양씨라 하는데 확실치 않다.
나합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로 다음의 일화가 있다. 호남가의 작자이며 한학의 대가였던 이서구가 전주감사일 때 천기를 보고 점을 치니 나주에 큰 인물이 태어날 괘였다. 그래 사람을 불러 하명을 했다.
“지금 영산포 삼영리로 내려가면 어린아이를 낳은 이가 있을 것이다. 그 아이를 찾아서 남아면 즉시 죽이고 여아면 살려 주어라”
하명을 받은 사람이 급히 영산포에 이르니 과연 산고가 든 집이 있어 확인하니 여아였다. 그래서 돌아와 감사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였다.
이에 이소구 감사는 혀를 끌끌 차면서 ‘그년 세상을 꽤나 시끄럽게 하겠구나.’했다고 한다.
나합은 자라면서 피어나는 꽃송이 같이 고운 자태에 소리와 기악에도 뛰어났다. 그녀의 집은 현재 내영산마을 건너 어장촌 근처였는데, 도내기샘에 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려고 총각들이 일없이 애를 태웠다 한다.
“나주 영산 도내기샘에 상추 씻는 저 큰 애기, 속잎일랑 네가 먹고 겉잎일랑 활활 씻어 나를 주소”
이 민요에 나오는 도내기샘의 큰 애기가 바로 나합이었던 것이다. 후일 나합이 김좌근의 애첩이 되면서 도내기샘이 나합샘이 된 것이다.
나합은 기생이 되었다. 그리고 나합은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다. 옛날 정1품의 고관들에게만 붙여 주는 칭호가 각하 비슷한 뜻의 합하(閤下)였다.
나합은 기생이지만 워낙 세도가 당당하여 ‘합’자를 붙였고 고향이 나주라서 나주 합부인, 줄여서 나합이 된 것이다.
나합의 세도에 관한 이야기가 또 전해진다. 자기 첩이 너무 설친다는 소문을 들은 김좌근이 ‘사람들이 너를 나합이라고 부른다며?’ 하고 언짢은 듯 웃자, 나합은 한 술 더 뜬 것이다.
“소첩은 합(閤)이 아니라 합(蛤조개)이지요. 아들을 낳으면 고추라 하고 딸을 낳으면 조개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자를 뜻하는 합이라 부르는 거지요.”
역시 여걸다운 대답이었다.
세도가의 첩으로 나합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어느 해 흉년이 들었을 때다. 나합이 김좌근을 졸라 나주에 구휼미를 풀어 고향을 도왔다.
그 탓인지 나주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김좌근을 기리는 비가 나주 관아 터 안에 남아 있다. 영의정김공좌근영세불망비(領議政金公左根永世不忘碑)다. 안동김씨의 세도가 끝나고 그 비는 두 동강이 난 채로 쓰러졌는데, 뒷날 금성관 경내로 옮겨 다시 세웠다.
<나합의 도내기샘>
뒤이어 임진왜란의 명장인 문평면의 나대용 장군, 금성산 자락에 계시는 정렬사의 김천일 장군도 뵙는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계기가 된 구 나주역사에 들려 학생독립운동의 흔적도 찾아본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반 경 통학기차에서 내린 광주여자고보 3년생인 이광춘, 박기옥, 이금자 등이 나주역을 나가는데, 일본인들이 다니는 광주중학교 후쿠다와 다나카가 이들을 희롱하면서 이광춘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이에 한국인 중학교 광주고보 2학년인 이광춘의 사촌동생 박준채와 후쿠다 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급기야 두 학교간의 패싸움이 되었다. 일명 댕기머리 사건이라도 하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전국적인 학생항일운동으로 번졌다.
역시 보한제 신숙주 선생에게처럼 그분들에게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리고, 만장운봉이 높이 솟아 층층한 익산이라, 호남가 가락 따라 다음 행선지인 운봉고을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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