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27
백리 담양을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만 이랑 물결인데
백리(百里) 담양(潭陽)을 흐르는 물은
구비구비 만경(萬頃)인데….
용추산((龍秋山 523m)이 이름값을 했다. 용의 정기가 흘러넘치니 바로 가마골 용소(龍沼)다. 그곳 용소에서 발원한 삼 백리 영산강 물길이 맨 먼저 들리는 큰 고을이 담양(潭陽)이다.
<관방제림과 담양천>
굽이굽이 흐르는 긴 물결은 굽이칠 때마다 들판을 하나씩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들판을 포근하게 안아서 적셔준다. 그래서 강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며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생명을 키우고 살리는 젖줄이다.
영산강 유역 갯벌의 퇴적층에서 3천 년 전의 벼꽃가루가 발견되었다. 바로 백리 담양을 흐르는 물이 영산강이다. 사람들은 그 영산강이 굽이굽이 만든 들에서 농사를 짓고, 생명을 키웠다. 그래서 영산강의 발원지가 있는 이곳 담양은 고대인들에게 생명의 시원지요, 신앙지다.
담양(潭陽)이란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다. 이곳은 예로부터 왕대, 맹종죽 등 우수한 품질의 대나무로 유명한 고을이다. 따라서 죽제품이 발달하여, 바구니, 그릇, 돗자리, 죽부인, 부채, 방석, 발과 가리개, 모자, 신발, 크고 작은 상, 의자, 장롱, 평상 등 각종 생활용품의 생산지며 특산지다.
지금도 다양하고 우수한 죽제품이 특산품의 계보를 잇고 있다. 하지만 생활환경의 변화와 이에 알맞은 생활도구의 대량 보급으로 지금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다. 하지만 예술적 영역을 개척하며 진가를 높이고 발전의 계기로 삼고 있어서 다행인바, 그렇게 담양은 죽세공예의 본 고장이다.
그 대나무의 고장 담양을 찾은 날은 2012년 10월 28일, 가을비 내린 뒷날이었다. 맨 먼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에 홀려서 따라가니 관방제림이었다.
관방제림(官防堤林)은 조선 인조 26년(1648) 당시의 부사 성이성(府使 成以性)이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축조하고 나무를 심기 시작하여 조성되었다 한다. 그 후 철종 5년(1854)에 부사 황종림(府使 黃鍾林)이 다시 이 제방을 축조하면서 그 위에 현재와 같은 숲이 이루어졌다 한다.
이 관방제림의 나무들은 남해안에서 잘 자란다는 푸조나무, 마을 앞에서 그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나무인 느티나무와 팽나무, 그리고 음나무, 개서어나무, 곰의말채나무, 벚나무, 은단풍 등 여러 낙엽성 활엽수들로 이루어졌다. 나무 밑둥의 둘레가 어른이 두 팔 벌려 한 아름 되는 거부터 대 여섯 아름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오래된 나무의 수령이 300년에 이르니 이곳 관방제림의 나무들은 곧 담양의 역사이고 중인들이다.
조금 이른 시각이어서 그런지 둑길은 한산했다. 가슴 속 깊숙이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둑길을 걷는다.
돌이켜보니 삼십년도 더 된 예전이다. 그 때는 승용차가 귀했고, 광주에서 담양까지 직행버스가 수시로 다녔다. 어느 날 무작정 친구 몇이서 담양 행 버스를 탔다. 지인을 만나 막걸리를 얻어 마시는 게 목적이었다. 그 날 얼큰하게 취했던 막걸리에 덤으로 관방제 둑길을 만났다. 문득 그 오래 된 추억이 희미하게 꺼내진다. 그 날 함께였던 사람들은 다 어디서 무얼 할까? 살아가면서 사는 방법, 길이 달라져 그들과 다시 만나지 못하니 인생의 굽이굽이 길도 강물 못지않은 듯싶다.
조금 가니 조각공원이 있다. 한 쌍의 도깨비 얼굴 조각상, 학과 뱀의 설화, 여시(여우)와 농부를 형상화한 조각 등이 띄엄띄엄 놓여있다. 그 중 듬직하게 엎드려 있는 호랑이가 눈에 들어온다. 밋밋한 산책길에 얘깃거리를 만들어준다.
어제 비가 제법 왔나 보다. 물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장애물을 만나면 물소리가 커지고 흐르기 좋으면 속삭이는 소리가 되리라.
<여성 도깨비, 앞쪽의 남성 도깨비와 마주 보고 있다>
<네 이놈 여시야! 낫을 든 농부 내외. 쥐새끼도 죽여주면 좋은데>
<호랑이.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선남선녀를 낳는다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믿으면 복이온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살기 힘들면 말소리가 커지고, 마음이 평화로우면 부드러워 지는 법이다. 어디 사랑하는 이에게 눈 부라리며 악을 쓸 일 있던가?
세상사도 마찬가지다. 화염병을 던지고 촛불을 켰던 지난날은 민초들의 가슴앓이 병이었다. 하지만 군부독재, 친일무리, 도둑적으로 완벽한 쥐닭무리들은 그 가슴앓이를 빨갱이들의 소행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래서 흰구름 나그네도 뜻하지 않은 빨갱이가 되었던 게 몇 번이었을까?
그렇게 그들은 해방이후의 시공간에서 우리 민초들을 최류탄, 군화와 방패, 쇠막대와 물대포로 짓밟고 빨갱이로 짓눌렀다. 특히 세계 최초이며 완벽한 산성의 상징인 명박 산성으로 소통보다는 불통의 가치를 각인 시키고 국격(?)을 한층 높였다. 쥐박이를 위해 그 산성을 쌓은 혐오스러움의 대명사 조현오의 뻔뻔하고 가증스런 행태는 혐오의 결정판이었다. 따라서 한 인간과 혐오라는 낱말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사전적 의미를 신장시키고 확대하는 공헌(?)을 했다. 참으로 국격을 높이고 백과사전의 쪽수가 늘어나는 데 공헌을 한 잘한 짓으로 역사는 기록할 것인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민초의 한 사람으로 그런 기괴하고 괴기스런 경험을 갖는다는 게 특별한 걸까? 불행한 걸까?
고물 재처리 전문 딸랑딸랑 재철 방송국의 고위 인사가 MBC PD수첩에게 이런 명언을 남겼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조용해야 하고 세상이 조용하면 따라서 조용해야 한다.’
참으로 후대에 남을 쥐닭박 딸랑이의 명언 중의 금언이다. 그러니까 지놈들이 도둑질을 하던 사기를 치던 니놈들은 입 닥치고 살라 그 말인 것이다.
오랜 세월 제방 둑에 서서 물길의 흐름을 돕고, 민초들의 살림살이를 지켜준 나무만도 못한 작자들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이 득세하는 한국 땅 쥐닭 공화국이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리 살아야 하는지 백성들이 짠하다. 에라이! 이것들을 그냥 콱! 하지만 관방제림에게 부끄러워 차마 욕을 밖으로 못 내놓고 싸목싸목 걷던 길을 잇는다.
<가을길은 낙엽길>
<지난 여름이 평상에 있다>
<관방제림 사적비>
백리 담양의 흐르는 물소리, 그 물이 흐르는 관방제 길에서 가을바람을 맞는다. 그 가을바람이 가슴을 뻥 뚫어 놓는다. 그간의 답답함까지 실어간다.
이렇게 관방제림처럼 임야구역을 설치하고 보호 숲이 조성된 곳을 임수(林藪)라 하는데 전남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원형이 잘 보존된 곳이 이곳 담양의 관방제 임수라 한다.
모처럼 얻은 여유와 느긋함이다. 왕복 4Km의 관방제 길이 금세다. 이어서 죽록원으로 향한다. 대나무엿을 한 봉지 사서 오물거린다. 달다. 인생사도 이리 달면 오죽 좋을까? 단맛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했다. 그 단맛에 나그네 흰구름도 속절없이 행복을 느낀다.
백리 담양을 흐르는 물은 자연의 순리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 순리로 흘러야 만경이 되는 거다. 1경이 10,000㎡이니, 만경(萬頃)은 10,000㎡가 만개다. 머리 아프게 계산할 거 없이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너른 들이라는 거 아니겠느냐?
하지만 반대로 순리로 흐르지 못하면 어찌되는 걸까? 세상사 모두 반대급부가 뒤따르니 이 부분도 무삼 설명이 필요하랴?
그렇다. 우리의 위대(胃大)한 도둑적으로 완벽한 집안, 사기꾼 형제들로 똘똘 뭉친 쥐박이 가문과 그 무리들이 우리에게 그 해답을 알려주었다.
바로 사대강(死大江)이다. 흐르지 못하면 강은 죽는다. 죽은 강에서는 생명이 살 수 없다. 얼마 전 금강에서 떠오른 물고기들의 주검이 바로 눈으로 확인하는 답이다. 세상사 흐름의 순리를 막으니, 만경은 그만두고 1경은커녕 죽음이 있을 뿐이다.
정말이지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도둑놈도 제 자식에게만은 도둑놈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는 거 아닐까? 그런데 어찌된 놈의 집구석인지 지 아들놈에게도 거짓과 사기를 가르치는 대단한 가문이 있다. 푸른 기와집에 사는 쥐 집안 얘기다. 특검의 내곡동 땅 수사를 지켜보면서 다시 한 번 그 완벽한 도둑가문의 행태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애비는 재산 재테크의 달인이요, 어미 역시 발가락에 다이어를 끼고 공항을 통과하는 실력이다 이 웃기는 부창부수의 집안에다 무슨 말을 더하랴?
결국 창피만 당하고 그 내곡동에 집을 짓지 못하게 됐으니 자업자득이다. 그래도 살집이 없냐? 숨겨놓은 돈이 없냐? 배 두드리며 잘 먹고 잘 살 것 아니냐? 부럽지는 않지만 참으로 니들은 좋겠다. 그렇게 도둑과 사기 가문의 큰 영광 길이길이 함께 하거라. 쩝!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얘길 하나 더하자. 백리 담양의 흐르는 물 따라 가는 길이다. 굽이굽이 천천히 얘기판 벌린다고 그 누가 나무랄 건가?
그러니까 10월 28일 오후다. 박근혜와 안철수 씨의 부인이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열린 위드베이비 유모차 걷기대회에서 마주쳤다. 그런데 박근혜가 안철수 씨 부인을 쳐다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이 사진은 누군가의 요청으로 곧 삭제되었다.
한 마디로 늙은 폐계(廢鷄)닭, 마귀할멈의 눈빛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아무리 거짓으로 숨겨도 눈길은 숨기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상대의 눈을 보며 얘길 하는 거 아닌가?
진짜 족제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족제비도 낯짝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죄인을 심문할 때는 눈빛을 살펴보는 게 기본적인 원칙이다. 족제비같이 간사하더라도 낯짝은 못 숨기기 때문이다.
명박이의 졸개 떡검이 내곡동 수사를 할 때 서면 조사만 하고서는 아귀가 딱 맞아 떨어진다고 했다. 그리고 곧 바로 혐의 없음이었다. 그 떡검이 쥐박이의 눈빛을 보지 않으려고 서면조사만 한 것이다. 쥐의 교활한 눈빛이 무서웠는지, 족제비 낮짝을 일부러 외면한 건지…. 아마도 둘 다일 거다. 아무튼 떡검이 얼렁뚱땅 담 넘어가는 구렁이가 되었다. 자기들 스스로를 똥통에 빠뜨려 구더기가 된 것이다.
그러다 된통 걸렸다. 떡검 사라진 고을에 특검이 나타났다. 그 특검이 발가락 다이어 돼지의 눈빛을 보며 직접심문을 할 수도 있다하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제발 그 인간들의 탐욕스런 눈을 보며 심문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염원해본다. 발가락 돼지의 눈빛은 폐계닭의 눈빛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기만 하다. 특검 아자! 아자! 다.
바로 그 쥐새끼들 특유의 눈빛, 교활하고 음흉하고 탐욕스런 눈빛, 그러면서도 천박한 그 눈빛의 사진을 보면서 섬뜩하면서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그래, 늙은 폐계(廢鷄)닭! 네 본모습이 나왔구나.
또 하나의 사진이 얘기를 만든다. 한선교의 휴대폰 사진이다. 내용은 이렇다.
뉴시스는 10월 23일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선교가 휴대전화로 사생활이 담긴 문자 메시지를 작성하는 사진 기사를 게재했으나 한선교의 요청으로 곧 삭제했다. 이후 이 사진을 찍은 조성봉 뉴시스 기자는 지난 4일 자신의 트위터에 ‘경고합니다. 국회에서 뻘짓하시고 사진 찍힌 주제에 기사 삭제해달라고 앞으로 데스크에 전화하지 마세요’라며 해당 사진 기사를 올렸다.
하지만 궁금하면 오백원이라는 어느 개그맨의 개그처럼, 궁금하면 오백원을 내고 알아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줄이기로 한다. 예뻐서가 아니라, 그럴만한 가치가 없어서다.
<관방제림이 메타세콰이어길과 만난다>
<관방제림 전경>
그럼 이제 백리 담양의 마지막 얘길 시작하겠다.
담양읍 백동리 3구를 신기리라 한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새로 터를 잡았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고사리등(高士吏嶝)’이라 하였다. 높을 고, 선비 사, 관리 리, 오를 등이니 ‘높은 선비와 관리들이 많이 등용’ 된 곳이다. 다시 말해 인재(人材) 명당터인 것이다.
이 얘기는 이곳 고사리등에서 태어나 과거시험에 장원급제하고 높은 벼슬길에 오른 전형적인 고사리등 고을 출신 세 인물에 대한 사연이다.
이들 세 사람은 누가 봐도 부러워할 높은 관직에 올랐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누구도 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어느 날이다. 윗자리의 상사가 세 사람을 위하여 잔칫상을 차렸다. 술을 권하며 미리 준비한 대로 온갖 농담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웃기려 해도 이들 세 사람은 끝내 웃지 않았다.
“아니 이 사람들아! 이게 무슨 도리인가? 내가 오늘은 그대들의 웃는 얼굴을 보려고 온갖 농담을 다했는데 얼굴을 찡그리고만 있는가? 도대체 그대들이 똑같이 웃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은 마음 털어놓고 이야길 해보게.”
그러자 맨 왼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예, 저부터 말씀 올리겠습니다.”
사연인즉 이랬다.
“소신이 평생을 두고 웃지 못하는 사연은 다름이 아닙니다. 제가 결혼식을 올리고 사흘 뒤 처와 함께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가 높은 파도가 불러왔습니다. 배의 선장이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 배에 큰 죄인이 있소. 그 죄인을 찾아 용왕께 바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게 될 것이오. 여러분이 입고 있는 저고리를 벗어 바다에 던지시오. 죄인의 옷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그러지 않은 사람의 옷은 물에 뜰 것이오.’ 그래서 배에 탄 사람들이 윗저고리를 벗어 던지고 마지막 두 사람이 남았습니다. 바로 저와 제 아내였습니다. 마침내 저도 윗저고리를 벗어던졌습니다. 옷은 파도를 따라 떠내려갔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저와 아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빨리 윗저고리를 바다에 던지라고 재촉하였습니다. 마침내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윗저고리를 벗어 바다에 던졌습니다. 아내의 옷은 바다에 떨어지자마자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가라앉았습니다. 선장과 사람들은 제 아내에게 빨리 바다에 몸을 던질 것을 강요했습니다. 신랑인 제게 마지막 말 한 마디 못한 채 아내는 치마를 머리에 둘러쓰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신행길에 이와 같은 일을 당하고 소생 어찌 웃음이 있겠습니까?”
이야기가 끝나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기막힌 사연에 함께 가슴이 아팠다.
이어 가운데 앉아있던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도 결혼식을 올린 후 처음으로 등청하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아내에게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방문을 나와 토방에 있는 신을 신으려는 순간이었지요. 제 두루마기 끈을 방에서 당기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는 아내를 나무라며 두루마기 끈을 놓으라고 몇 차례 간청하였지요. 하지만 아내는 끝내 놓지 않았습니다. 화가 나서 저는 그 날부터 일체 아내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지요. 그 후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어느 날이지요. 신부가 신방에서 나오지 않아 가족들이 신방의 문을 열려고 애를 써도 열리지 않았지요. 그래서 제가 여러 어르신들의 요청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아, 그런데 신부가 머리를 산발한 채 눈을 뜨고 죽어있지 않겠습니까? 무릎 앞에는 한 장의 유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니 ‘서방님! 너무나 억울하옵니다. 두루마기의 옷고름이 문고리에 걸려 끝내는 떨어졌을 뿐입니다. 어찌 제가 감히 등청하는 서방님의 옷고름을 잡아당겼겠습니까?’라 쓰여 있었습니다. 살펴보니 떨어진 옷고름이 문고리에 그대로 걸려 있었습니다. 억울한 아내의 사연을 알고 저는 대성통곡 하였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날부터 웃음을 잃었습니다.”
이번에도 모두들 기구한 사연에 가슴이 아팠다.
마지막으로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이야길 시작했다.
“네, 저는 어머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의 어머님은 평생을 이 못난 소생을 위해 살아오셨습니다. 제가 10여 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떠나는 아침이었습니다. 그 날 어머님이 손수 들고 들어오는 아침 밥상은 진수성찬에 그동안 한 번도 먹지 못한 하얀 쌀밥이었습니다. 그 쌀밥은 어머님께서 부잣집 일을 하시면서 얻어온 거였습니다. 절구통에 나락을 넣어 절구질을 할 때 떨어진 쌀알을 한 알, 한 알 주워 모은 거였습니다. 그렇게 10여 년간을 모은 쌀로 과거시험을 치르러 가는 저에게 밥을 해주신 거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차마 그 쌀밥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님! 저는 이 흰 쌀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님이 드셔야 합니다.’ 저는 먹지 않겠다고 했고 어머님은 제게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어머님과 저는 쌀밥을 먹지 못하고 아쉬운 이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관직에 부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장가도 들고 어머니도 편히 모셔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님! 이 불효자식이 돌아왔습니다. 어머님! 어머님!’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어머님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주위를 살피니 마당에는 풀이 무성하고, 토방에는 어머님이 신으셨던 짚신이 나란히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님이 주무시는 걸로 여기고 ‘어머님!’ 하고 부르면서 방문을 열었습니다. 아, 그런데 어머님이 눈을 뜬 채 밥상 앞에 앉아 돌아가신 겁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란 말입니까? 어머님이 쳐다보고 있는 흰쌀밥에서는 따뜻한 김이 오르면서 윤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쌀밥 한번 먹어보지 못한 저를 위해 그 흰쌀밥을 드시지 않고 기다리신 어머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어찌 제가 함부로 웃을 수 있겠습니까?”
이야기를 마친 세 사람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대들의 사연을 들으니 나 역시 눈물이 앞을 가리네. 하지만 지난 일이니 이제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갔으면 하네.”
명당 터 고사리등 고을의 이야기는 무얼 뜻하는 걸까?
인간만사 세옹지마요, 호사다마인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법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칠 바 아니고,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는 법이다.
오늘의 어려움에 떨 일도 아니고, 오늘의 즐거움에 자만해서도 안 된다는 교훈이다. 나아가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고 출세하는 것만이 인생사 전부가 아니라는 거다. 명당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는 얘기다.
백리 담양에서 또 삶의 지혜와 혜안을 배운다. 그러면서 소망 하나를 떠올린다. 이제 2012년 12월 19일, 한 번 웃어보고 싶다. 쥐에서 닭으로 이어지면 어찌할까? 흰구름 나그네는 이 땅에서 더 이상 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어디 가서 살 건가?
딸랑이들은 어디 가서든 딸랑딸랑 딸랑거리며 잘 살 것이지만….
<죽녹원의 대나무 숲길>
<고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모습이 보인다. 아차, 아직 대통령이라하면 안 되지. ㅋ>
“이 사람 흰구름 나그네여! 자네는 왜 그리 불만이 많은가? 그것들이 뭘 하든 괘념치 말고 자네나 편히 살게나.”
어디선가 나무라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당히 세금을 내고 사는 이 땅의 주인이고 백성입니다. 제가 낸 세금을 지놈들 용돈으로 알고 도둑질하여 쓰는 그들을 어찌 두고만 본단 말입니까? 아니지요. 이 땅의 주인은 미래의 우리 자손들입니다. 나의 무관심이 앞으로 우리 자손들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제가 힘들더라도 쥐새끼 같은, 닭새끼 같은 종자들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다 그 말입니다. 그 쥐닭무리들의 이름을 역사에 남겨놓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글이라도 맘대로 써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저 역시 지금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고사리등 관리들처럼 말이냐?”
“녜! 그렇습니다. 오래 됐습니다만 MBC 방송극 전원일기 아시나요?”
“나도 한 때 잘 봤지. 그게 어쨌다는 말이냐?”
“그 극에 나오던 유인촌이란 놈이 쥐박이의 완장을 차고 칼춤을 추며 언론학살을 하던 걸 잊지 않으셨지요?”
“알지. 그 괘씸한 놈! 지금 어디로 쥐새끼처럼 내뺐다는 것까지 알고 있고 말고.”
“또 거기 나오던 최불알 알지요?”
“불암 아니었느냐? 아니 불임이었던가?”
“불임이고 불알이고요. 아무튼 그 인간도 이순대인가 재인가, 노쥐현인가 주현인가와 더불어 이번에도 폐계의 딸랑이가 되었지요.”
“그런데 그거하고 네가 웃음을 잃은 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상관이 있지요. 티비를 켜도 상판대기 보기 싫은 인간들뿐이니 무슨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그래도 요즈음 김성주가 영계 이야기로 웃기지 않더냐?”
“뭐라고요? 안상수의 자연산, 이명박의 못생긴 마사지걸, 그리고 강용석에 이르면 더 다양하지요. ‘섹시한 박근혜, 나경원은 얼굴은 예쁘지만 키가 작아 볼품이 없다, 전현희는 60대 이상 의원들이 밥 한 번 먹고 싶어 줄을 설 정도로 여성 의원의 외모는 한나라당보다 민주당이 낫다’ 에 이르면 백화점이 되지요. 그것도 안 웃기는데 생겨도 진짜 못생겨 쳐다만 봐도 토할 것 같은 김성주 말에 웃으라고요?”
“어야! 어야! 알겠네. 더 심한 말 나오기 전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네. 그러니 앞으로 자네 맘대로 하게나.”
이리하여 휜구름 나그네는 그 어떤 분으로부터 마음대로 글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굽이굽이 만경을 향해 굽힘없이 길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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