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만경을 금만평야라 하고 ‘징게맹개 외배미들’이라 일컫기도 한다. 예전에는 지역에 따라 논이나 밭을 2백평(660㎡) 또는 4백평(1320㎡) 등으로 나누어 한마지기 또는 한배미라 했다. 기억으로 죽산에서는 4백평을 한배미라 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징게맹게(김제만경) 외배미들(한 배미들)이란 표현은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김제와 만경을 채운 논들이 모두 한 배미로 연결돼 있음을 뜻한다.
김제(金堤)는 금둑이라는 말이다. 옛날에 사금을 채취했던 고장이었던 거다. 백제의 화려한 금속공예나 가까이 익산의 보석박물관이 달리 생긴 게 아니라 다 그런 연유가 있어서 일게다.
또 만경(萬頃)도 글자대로 풀면 두둑이 만 개라는 뜻이다. 숫자풀이만으로도 1경이 10,000㎡이니, 만경(萬頃)은 10,000㎡가 만개다. 평수로 하면 3천만평에 이르는 들녘이다. 고대인들의 계산으로는 답이 안 나오는 숫자다. 한마디로 한반도 최대 최고의 곡창지대요 평야지대로 들녘이 한없이 넓다는 의미다.
금만경 너른 들에 대한 선조들의 기록을 몇 개 소개해본다.
고려시대 이식(1090-1151)은 ‘1백여 리에 걸쳐 논만 질펀하게 펼쳐져 있을 뿐, 그 사이를 가로지른 언덕이나 시내도 하나 보이질 않는다.’고 했다. 산을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아도 그 산속에 물이 있는 법이다. 이 분은 너른 들녘에 그만 푹 빠져 언덕과 시내도 보질 못한 것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장유(1587-1638)는 ‘김제는 평야지대에 속한 고을이다. 그래서 사방 경내에 바라볼 만한 명산과 큰 강이 없음을 물론, 높은 지대라고 해야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하고 아래로 내려오면 모두가 습지로 뒤덮여 있을 따름’이라고 했다. 이 양반은 알곡을 키우느라 한 여름 뙤약볕에 피땀 흘린 농부들의 노고를 몰랐을까?
요즈음 집 안에 현금 뭉치로 수십억씩 쌓아놓고 사는 졸부들과 쥐박이 가문의 사기꾼 형제들의 심정도 그러리라.
그래서 김태호 그 싸가지 없는 놈의 홍어×이라는 망언도 나온 거 아닌가?
한 때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여 ‘개땅쇠’라 하였다. 갯땅에 사는 사람이어서 ‘개땅쇠’라 한 것이다. 전라도 땅이 다 갯땅은 아니나, 간척사업이 주로 이곳에서 이루어졌음이다.
특히 김만경평야의 한복판인 광할면, 죽산면의 해안 들녘은 일제강점기의 간척지다. 따라서 그 간척지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이곳 망해사 지역도 섬이었고 주변의 너른 들녘은 해안 갯벌이었다.
아무튼 왜인들이 이곳 금만경 갯벌에 농토조성을 함에 부려먹을 조선인 인부가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주변 어촌 사람들은 농토와 더불어 바다에서의 수확물도 있는지라 인부가 되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인부 모집을 확대한바, 특히 경상북도와 강원도에서 많은 희망자가 몰려왔다. 산골에서 힘들게 살던 사람들이 간척사업이 끝나면 농토를 나눠준다는 꼬임에 몰려온 것이다. 희망대로 그들은 간척이 끝난 뒤 대부분 소작인으로 눌러앉았다.
그러하기에 따지고 보면 전라도 개땅쇠는 전라도 사람이 아닌 경상도 강원도 이주민에 대한 지칭이다. 따라서 경상도 강원도 사람이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여 개땅쇠라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자기 직계 조상을 욕하는 것이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촉발한 정치인, 특히 박근혜의 애비 다까기 마사오, 박정희의 쿠데타가 불러온 비극의 결실이기도 하다.
홍어도 전라도 사람을 비하하는 경상도인과 비 전라도인들의 욕설 중의 하나다. 특히 홍어×은 듣기 거북한 대중적인 상스런 욕이다. 술자리에서나 싸움질할 때나 쓰는 말이다. 그런데 대통령을 만든다는 엄숙한 회의석상에서 그런 말을 썼다는 것은 깡패나 거지집단의 행태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으로 뭔가 이득을 취해보겠다는 음흉함의 극치다.
욕이라면 흰구름 나그네도 일가견이 있다. 그래서 그 김태호 놈 잡아다가 입안 가득 홍어×을 쳐 넣고 싶다. 사실 홍어는 수컷의 인기가 없다. 그래서 수컷의 거시기를 잘라 암컷으로 변장을 시키는 나쁜 상인이 있다. 그러니 홍어×은, 홍어에게는 소중한 물건이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쓰레기에 속하는 물건이다. 이러니 홍어×은 거저 얻을 수 있는 물건으로 김태호의 막창자까지 가득 채울 물량확보가 가능하다. 이 싸가지 김태호야, 먹고 싶으면 연락하라. 무료 제공할테다. 물론 니놈이 딸랑대는 두목이나 성누리당 소속이라면 누구에게든 무료제공을 약속하마.
그놈들이 그런다고 함께 하는 게 아닌데 조금 흥분을 했다. 자, 이제 사설을 마치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이번엔 대동여지도를 엮은 김정호 선생의 행적이다. 이 어르신은 한반도를 일곱 차례 이상 답사하면서 호남평야를 지날 때마다 가없이 넓은 벌에 무릎 꿇고 이마 대어 고마움의 절을 올렸다고 한다.
역시 땅의 의미를 아는 분이다. 낮은 곳 발아래서 우리를 먹여 살리는 땅이요, 다시 그 생명을 자연으로 보내어 순환되게 하는 창조의 힘을 가진 땅이다. 김정호 선생의 ‘무릎 꿇고 이마 대어 절을 올린’ 그 깊은 뜻과 의미를 큰 가르침으로 대할 일이다. 금만경 너른 들은 그 교훈의 땅이기도 한 것이다.
전라관찰사였던 이서구(李書九)는 광활 간척지를 가리켜 ‘구구지간 광활만인지지(九區之間廣闊萬人之地)’라고 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넓다는 뜻에서 광활(廣活)이라는 지명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 백학기 시인은 ‘김제 광활 평야를 일컬어 눈이 모자라 다 못 보겠다’ 노래했다.
유홍준도 ‘금만평야에서는 들판이 주는 풍요로움과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일어나는 처연한 심사가 차라리 이국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며 이곳을 지나갔다.
윤고산도 이곳 망해사에서 시 한 수를 남겼다. ‘문을 열면 모두 잃겠네/주인은 목탁을 잃고/석가모니는 중생을 잃고/나는 나를 잃고/바다의 품으로 모두 돌아오네/일제(一齊)는 하나의 공허(空虛)로/만파(萬波)는 하나의 추파(秋波)로/서역만리에 불가슴 펴고,/지는 해도 안겨오네/하늘도 넓게/바다를 펴고/짐짓 갈매기도 깨우친/대불(大佛)의 전개여….’
서해 낙조에 넋을 잃고 그 황홀함을 표현하였으니, 자연 속에서 인간이 살아감을 새삼 배운다.
다시금 들려오는 갈매기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 끼룩끼룩 소리에 파도소리와 제 구멍 찾아 들락거리는 게들의 움직인 소리까지 섞여 있음을 알게 된다.
눈을 뜨고도 십리를 못 보나, 눈을 감고도 천리를 봄이라. 자연은 인간의 위대한 스승이요, 먹여 살리는 어머니이시다.
인간들이 아등바등 먹고 살고자 강을 막고 바다를 막아 새만금이라 칭하며 호들갑 떨지만, 이를 가여이 여길지라.
잘난 놈 하나 잡아 그 항문을 막아버리면 어떨까? 아이고 나 죽겠네! 지랄발광을 하다가 급기야는 온갖 더러운 냄새 입으로 역류되어 죽을 것이다.
하지만 만경강은, 서해는 말이 없다.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긴 세월을 봄이다. 잘난 척 마라. 천년만년 살겠다는 놈 지명에 사는 거 못 봤다. 천년 먹은 산삼을 먹고, 젊은 피를 통째로 수혈했다는 어떤 그 부자 놈도 이미 백골이 진토 되었느니라. 영웅호걸도, 절세미인도 다 한낱 꿈이런가 하노라.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이라 했다. 동학혁명 때 흰옷 입은 농군들이 죽창을 들었다. 그 혁명군들이 앉으면 대나무 죽창이 산처럼 보였고, 서면 죽창이 흰옷에 가려지니 백산이라는 의미다. 죽산면의 이웃 고을이 백산이니, 어쩌면 두 마을은 동학혁명의 정신이 깃든 마을이기도 하다.
만경에서 그 앉으면 죽산인 죽산 마을로 가는 길목이 광활면이다.
1924년 왜인들은 경상북도 강원도 등 전국 각지의 인부를 모아 광활면(廣活面) 은파리(銀波里) 학당(學堂) 마을에서 동진강 하구를 따라 거전(巨田)에 이르는 10㎞의 방조제를 축조하였다. 노예와 다름없는 노역을 통해 몽리(蒙利) 면적 1.01㎢에 달하는 농경지가 조성하여 동진농장이라 하였다.
광활간척지 방조제는 1923년 10월 일본인 아베 후사치로(阿部房次郞)가 자기 자본 100만 엔과 정부 보조금 100만 엔 등 총 200만 엔을 들여 동진농업주식회사를 세운 뒤 만 3년 만에 준공되었다. 그러나 바닷물이 드나들던 갯벌이 농지가 되는 데는 9년을 더 기다렸다고 한다.
당시 왜인들은 1,928정(1정은 3천 평, 약 1만㎡)의 간척지를 1답구에서 9답구까지 바둑판 모양으로 나누었다. 또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고자 소작인들의 집을 경지마다 일렬로 6가구씩 배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육마을 또는 여섯가구뜸과 같은 마을 이름이 되었다. 물론 왜인들은 면소재지에서 술집과 정미소를 비롯한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고 떵떵 거리며 살았다.
왜인들의 집은 터를 돋우고 유리창을 이용하여 바닷바람을 막는 훤한 집이었다. 하지만 소작인들의 흙벽 단칸 초가집은 비가 오면 물이 올라왔고, 겨울철 차가운 바람을 막으려 볏짚 엮은걸 처마 밑에까지 둘러서 한낮에도 컴컴했다. 그것도 소작인이 되려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혀있어야 했으니, 그런 집도 감지덕지였다. 또 수확의 반은 왜인이 가져갔고, 나머지 반에서 비료 값, 물 값을 주어야 했다. 식수 역시 수로를 타고 온 농업용수를 걸러 마셨다. 자연스레 아이들 이름이 ‘똘물 먹는 애’가 되었다.
전라도 사람을 일컬어 하시하면서 똘물 먹는 놈, 개땅쇠, 홍어라고 부르는 놈들은 아마도 왜놈들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밀고자 겸 마름놈의 자식이 분명할 거다.
그런 놈들은 언제고 이웃과 나라를 배신할 놈들이다. 일본이건 미국이건, 러시아건, 중국이건 가리지 않고 충성을 하면서 내 나라, 내 이웃을 짓밟고 억누르는 데 앞장 설 놈들이다.
‘짱뚱어가 뛰면 망둥이도 뛴다.’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뛴다.’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 ‘게란 놈도 뛰다 등판 깨진다’ 는 속담이 있다.
같잖은 놈이 까불거릴 때, 뭣도 모르고 덩달아 따라할 때, 자기 분수도 모르고 함부로 날뛸 때 쓰는 말이다.
김태호가 딸랑거리는 성누리당 소속 두목부터 졸개까지 눈여겨 새길 속담들이다. 물론 그 색누리당의 말에 현혹하여 동조하는 인간들도 새겨야 할 말이다. 잘 살거나, 종교적 신념이 같거나, 하다못해 구정물이라도 튀겨서 동조한다면 이해하겠다. 못 먹고 못 입는 우리 걸 빼앗아가느라 환장한 그들이다. 잘 살지도 못하면서 무엇이 좋아 그들을 지지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불가다.
<망해사 약서전과 두 그루 팽나무, 여기가 서해 낙조를 일생에 한 번은 보셔야 할 곳>
<만경강의 갈매기 떼와 건너편의 옥구들판>
<심포항>
<망해사 전망대에서 바라본 광활들>
<징게맹게 외베미들인 광할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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