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아낌없이 주련다
-도솔산 선운사 다녀오다
사람의 일이란 게 보통 복잡한 게 아니어서 하루쯤 맘 팍 내려놓고 아무데나 훌쩍 다녀오기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선운사가 있는 도솔산 들머리에 가면, 그저 푸른 물 뚝뚝 묻어날 푸른 웃음만 짓는 푸른빛 송악 한 그루 변함없이 그대로다. 몇 백 년이란 나무의 나이를 우리네 인간이 따져서 무엇 하랴?
<천년의 송악에 억겁의 빛이 내린다>
역설적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유행가는 ‘정주지 않으리’ 라는 싸가지 없는 가사보다 그저 ‘아낌없이 주련다’ 처럼 푸짐해야 한다.
사람도 유행가처럼 별 것도 없는 것이 으스대고 건방져서는 안 된다. 그저 모두를 편안하게 하는 사람, 소주건, 막걸리건, 맥주건, 양주건, 술 맛 나는 사람이면 참 좋다.
위 이야기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스개 소리로 나눈 말이지만, 첫 번째 도착지인 도솔암 나한전 앞마당 석탑의 참 편한 모습이 맘에 들었다. 자신처럼 못 생긴 녀석을 만나면 친구처럼 좋은 그런 맘이다.
<저 석탑처럼 편한 모습으로 살고 싶다>
참, 여기서 선운사 절집부터 얘길 시작하지 않은 것은 먼저 산행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절집을 들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에 양쪽 산허리를 올려다보니, 열아홉 색시의 입술처럼 불그레 봄물이 들고 있는 나무들이 그냥 비린내도 나지 않을 물고기처럼 싱싱하다. 그 풋풋함이 온 몸으로 시냇물처럼 졸졸 흘러든다. 산들바람으로 스며든다. 어디 보약이 따로 있으랴?
아무튼 도솔암 절집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왜냐하면 ‘○○ 큰 스님 기도법회’라는 기다란 현수막이 걸려 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큰 스님의 법명과 자신의 이름이 같은 당사자가 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웃는다.
진짜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멋있는 젊은이, 그리고 짓궂은 박 선생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 초상권 보호를 위해 사진은 인물이 없는 걸로 대체한다.
<도솔암의 극락보전-극락이 그 어디메뇨?>
도솔암을 지나 바위 벼랑에 양각된 미륵부처님을 보았다. 부처님의 눈이 사납게 생겼다는 ○○큰 스님의(?) 말에 진짜 올려다보니 얼굴선이 굵다.
그래, 부처님이라고 매양 인심 팍팍 쓰며 둥글게 살 수 만은 없지 않은가?
‘이 놈! 나쁜 놈 내가 벼락을 때리노라’
그 말 한 마디에다, 진짜 벼락 한 방이면 장담하건데 신도 수 하루에 백만 명은 늘어날 것이다.
<천도교, 동학혁명과 관련된 얘기까지 안고 있는 미륵부처님>
나무 등걸 다람쥐 친구에게 손 흔들어 주고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오르니 용문굴이다.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어머니 돌무덤 앞에 있는 모습을 촬영한 곳이라는 푯말이 있다.
<용문굴-봄 눈 녹아 흐르는 고드름이 아기 손가락처럼 달려있었다>
그 용처럼 생긴 바위굴문을 오르니, 이내 저만큼 황해가 눈에 들어온다.
바람이 조금 더 차가워졌지만, 겨울 날씨가 이만큼 좋으랴? 크게 소리 내지르고 싶은 맑고 밝은 환한 날이다.
젊고 희망이 있는 친구 박 선생과 매실주를 나눈다. 좋은 친구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캬아! 그 술 맛! 아는 사람만 아는 맛이다. 인생살이가 이만큼이면 신선이 부럽지 않다.
<쉬엄쉬엄 나무계단을 밟아 오르면 낙조대다>
200m쯤 나무계단을 밟아가니 역시 대장금에서 최상궁이 자살을 한 바위가 있다. 죽음이 곧 새 삶 아닌가?
죽음이라?
언젠가 찾아갈 저 세상의 일이다. 금세 잊고 바위를 돌아 웃는 얼굴로 작품 사진 만들었다.
바위의 정식 명칭은 낙조대이다. 함께 어우러진 바위들의 모습이 그림처럼 기기묘묘하다. 인간사란 고해라고 했지만, 황혼이 지나면 새 아침이 오고, 밝은 해 떠 오르리라.
<낙조대 전경-해질녁, 낙조는 맘으로만 보았다>
마침내 저만큼 아래에서 볼 때는 하늘만큼 높아 보이던 바위벼랑에 섰다. 천마봉이다. 세상이 다 눈 아래다. 여기 이 천마를 타고 하늘을 나르리니!
저기 바라보이는 배맨바위는 배를 맸다는 바위라? 지형이 융기해서 그럴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허풍을 쳐도 그 정도는 돼야지. 암, 그래야지.
에이 나도 이렇게 산에 오른 날 만이라도 배포 크게 큰 소리 한 번 쳐보자.
그래, 세상살이 별거더냐?
오늘 이 세상 아름다운 사람, 좋은 사람들하고 도솔산에 다녀간다. 건강과 행복은 이제 만사 오케이! 댕큐! 모두 우리 것! 아무튼 그냥 더 말할 것 없이 이상 끝! 남은 건강과 행복은 그냥 공짜로 모두에게 나눠준다. 진짜 공짜다!
그렇게 소리 한 번 크게 내지르니, 맘 넉넉하고 기분도 흐뭇하다.
<인생이란 배를 저 배맨바위(왼쪽)에 매어놓고>
<천마를 타고 하늘을 나르리라>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것, 오늘 날씨도, 산행도, ‘너무 좋다’는 희열감을 산위에 남겨놓고 오던 길 되밟아 하산을 한다. 빨리 내려오는 길이 있지만, 며칠 전 눈이 아직 그 길에 버티고 있어 안전을 선택했다.
그 덕분에 그냥 스쳐 지났던 내원궁이란 문을 지나 지장전과 산신각까지 다녀왔다.
그것뿐이랴. 올 들어 첫 동백을 봤다.
‘꽃잎은 빨갛게 물이 들었소!’ - 뜬금없이 유행가 한 자락이 흥얼거려진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었는데 오늘은 진짜 날도 좋고 산도 좋다.
<오메! 동백 좋은거-저 내원궁의 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지장보살님이 계시는 내원궁의 산신각>
<천마를 타고 와 산신령님을 잠시 만났다>
장사송지나 진흥굴 지나오는데, 꽃눈이 흩날린다. 참 예쁘다.
하늘하늘 마음을 즈려밟는 하얀 눈송이, 하늘의 사랑이다.
<정인을 기다리다 죽었다는 아내의 전설이 깃든 장사송-남자들은 듣기 좋겄제?>
<진흥왕과 관련된 굴-나라 잃은 백제의 서러움이 묻어나는 전설이다>
선운사 대웅전 잠시 들려 돌아오는 길, 서서히 어둠이 내린다.
<고려 때 석탑을 안고 있는 대웅전-아직 절집 뒷 마당 동백은 피지 않았다>
<아낌없이 주련다!>
삶이란 주는 거더냐?
받는 거더냐?
주는 거라면 아낌없이 주자.
받는 거라도 아낌없이 받자.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아까울 게 없는 사랑
그런 사람 아낌없이
그런 사랑 아름답게
사랑하고 살자.
<천마를 타고 세상을 보았다-저 고해에 우리 삶이 있구나. 아름답게 사랑하며 살자>
철 지난 유행가 가락처럼, 시 한 수 멋대로 지어 읊으며 2007년 1월의 마지막 날 선운사 산행을 마무리한다. 열사흘 붉은 달이 하늘에 떠있다. 달도 참 곱다. 고운 것 참 많은 세상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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